제자의 길 (1) (06.30.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자의 길 (1) (06.30.2024)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799회 작성일 Jul 01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6월 30일
본문: 마가복음 8:31-34
제목: 제자의 길 (1)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세상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각자 나름의 의견과 사상과 견해 속에 틀어 박혀 있어서 밖이 환한 세상으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꼬라지가 나오고, 똥고집을 피워 꼴통이라고 놀림 받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소책자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상의 집을 짓고 살아가는 철학가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각자 엉성하지만 무엇인지 나름대로 견해를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그 견해는 견고한 진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상 불신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하나님은 누구시고, 교회가 무엇이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나름대로 정의내린 견해가 있습니다. 사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는 자신이 생각한 바대로 ‘하나님은 누구이여야 하고, 교회는 어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이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상틀 속에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철학가, 사상가들이 이렇게 부질없는 노력을 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왜 근거도 분명치 않은 사실은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자기 견해를 너무도 안일하게, 너무도 쉽게 확신하고, 그것에 붙들려서 어쩌면 그렇게도 완강히 예수 믿기를 거절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의탁할 수 있는 어떤 가치체계, 인생관이나 세계관 속에 살아갈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기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가치 체계가 거짓의 누각을 세웠다고 해도 별로 대수로운 것이 못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보편타당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은 차후 문제입니다. 그저 자신의 행동이 논리가 없고, 판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하는, 이런 방황이 고통스럽고, 두렵기 때문에 얼기설기 만든 개똥철학일 망정 나름대로 인생관, 가치 체계, 세계관을 세우고 거기에 안주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인지, 성경에서 지지하는 것인가에 대한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는 자기 나름의 교묘한 생각과 논리 아닌 논리들로 자신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논리, 성경의 논리를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적개심을 가지고 기독교를 정면으로 대적하기도 합니다.

이전에 우리도 이렇게 오도된 가치체계와 영적 무지로 말미암아 영적 흑암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지각에 진리의 빛을 던져 주심으로 비로소 영적 실체, 의의 나라, 영광의 나라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고, 그 분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의 거짓된 개념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말해 주지 않습니까? 출애굽기 3장에서 떨기나무의 타지 않는 불꽃으로 나타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모세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 그리고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었던 그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의 최고 종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눈으로, 귀로, 만져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 분의 행동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는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런즉 십자가 이해 없이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푸는 열쇠와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생명으로 부터 단절된 세상은 이런 기독교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도, 받아 드릴 수도 없습니다. 세상의 세계관이 지향하며 추구하는 것은 힘입니다. 강한 힘을 추구합니다. 경제의 힘, 군사력의 힘, 정치 권력의 힘, 과학기술의 힘, 등등. 심지어 종교도 저급한 종교일수록 맹목적으로 힘을 숭상합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세요. 그 신화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신들의 파워 게임, 힘의 경쟁입니다. 제우스는 처음부터 올림푸스를 지배한 게 아니고, 티타노마키아(티탄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신들과의 싸움에서 이겨 그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힘을 숭상했다는 것을 신화를 통해 보여 줍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힘의 숭배를 신화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 거예요. 그리고 로마는 막강한 군대의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네가 진정 메시야라면 모세처럼 홍해를 가르며 광야에서 만나를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해 보라”는 거에요. 그 능력으로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다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라는 겁니다. 먹고 사는 경제적 문제, 사회 부조리와 악을 제거하는 정의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꿈꾸던 메시야는 다윗 왕같이 힘을 가진 메시아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요즘 교회 또한 교인 숫자가 많은 것과 헌금 재정의 힘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정치에도 관여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힘의 논리를 가지고 세상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힘으로는 사람을 강제로 눌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격적으로 설득시킬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힘으로 세상 문제를 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해법은 희생적 사랑입니다. 힘이 아닌 십자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를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셨습니다.

1. 힘의 논리를 거절하신 예수님

“주는 그리스도시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지만 어떤 메시아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물론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는 제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세상을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메시아이지, 무력하게도 자신의 목숨 조차 지키지 못해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로막았습니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죽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길을 막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께서 악인들을 이기지 못하고 십자가 형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처형을 당하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여기에 베드로의 한계가 있습니다. 베드로 또한 여느 유대인들처럼 세상적 메시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아주 날카롭게 베드로를 책망하십니다. (마 16:3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아마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사단’이라는 책망보다 더 심한 책망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왜 이렇게 무섭게 책망하셨을까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길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은 하지만 고난과 희생에 대해서 거절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선택한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최선의 방법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하였지만 생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고백은 영적이었으나 생각은 육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사단으로 부터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사단으로 부터 끊임없이 힘의 유혹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공생애가 시작될 때 첫 번째 시험이 찾아옵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마귀가 유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 보라고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 상처 하나 없이 사뿐히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눈 한 번 딱 감고 내게 절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능력으로 메시아 사역을 해보라는 거에요. 일단 힘으로 밀어부치는 일은 쉽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화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힘의 유혹을 거절합니다.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제자들 또한 이런 힘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서로 다투었어요.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운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로마 세력을 꺾고 왕이 되실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또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보냄을 받은 무리들이 왔을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검으로 쳐 떨어뜨립니다. 이것을 보신 주님은 검을 가진 자는 모두 검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고 말씀하세요. 여기서 ‘영(營)’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레기온을 번역한 것인데 그 당시 로마 군대 단위 군단을 뜻합니다. 한 레기온은 대략 5-6,000명의 보병과 1,000여 필의 마병으로 편성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있다고 말씀하세요.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도 힘으로 모든 악을 쓸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씀을 하실리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힘의 충동을 극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에도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한 번 내려와 보라고 조롱합니다. ‘왜 남을 구원하면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느냐’고 비웃습니다. 무력을 사용하라고 충동질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힘의 유혹을 참아냅니다. 그리고 오히려 힘 없는 자처럼 죽임을 당하십니다. 결코 힘이 없어서 붙잡혀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예수님은 예고하셨습니다.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길은 사단이 유혹하여 제시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가셔야할 메시아의 길과 사람들이 대망했던 메시아의 길과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역설이 있습니다. 너무 위대하시고 강하신 성자 하나님이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아무 방어 수단이 없고 전적으로 남을 의지해야 하는 나약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약함의 극단인 죽음까지 맛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배약하고 추악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그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은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어요. 그 힘의 유혹을 거절했어요. 그리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의 연약함으로 죄의 세력을 가진 사단의 권세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구원의 길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으로 오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영광스롭게 나타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2. 죄의 파워와 십자가 구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죄란 단순히 선의 결핍정도로 생각해요. 그래서 선행을 해서 채우면 괜찮을 거라고 여겨요. 그런데 로마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죄를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가진 힘, 파워로 표현하고 있어요. 인간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파워라고 말해요. 그것은 마치 법, 법칙과도 같아요. 법칙이 무엇입니까? 가령 제가 여기서 물건을 떨어뜨리면 언제나 밑으로 떨어집니다. 중력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죠. 자연법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작용해요. 이처럼 죄는 압도적으로, 거의 일방적으로 역사하는 파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그 해법은 단순히 우리의 잘못된 행위들에 대한 처벌을 면하게 해 주시는 차원이 아니예요. 그것은 죄의 파워,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내 죽음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2,000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나도 죄에 대해서 죽었어요. 죽어 버린 나에게 죄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죽었기 때문에 죄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삼 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생명으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 대항하며 자기 중심적으로 살던 옛사람이 죽었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의와 거룩과 생명이 충만한 삶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런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삶이 구원의 삶입니다. 현재 구원을 누리는 삶을 말해요. 그리고 성령님은 미래 구원에 대한 보증이기도 합니다. 미래에 거룩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보증 또는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 성령의 삶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3. 십자가의 삶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의 내용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자기 희생과 섬김과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군림하지 않았습니다. 종이 되어서 섬김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길을 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물론 십자가의 길은 힘의 길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시간도, 노력도 많이 듭니다. 희생이 뒤따릅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힘을 좋아합니다. 힘의 매력이 대단합니다.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어 보이거든요. 한 마디 명령으로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얼마나 쉬워요. 그러나 사랑으로 살기는 어려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힘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사단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은 힘을 숭배합니다. 그래서 힘의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힘의 논리에 빠진 자에게는 십자가가 대단히 어리석게 보여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깨닫기 전까지 예수님의 형제들, 제자들, 그리고 바울도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십자가가 어리석어 보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힘의 길로 가지 않고, 자기 희생의 길로, 섬기는 길로, 사랑의 길로 가신 것을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받은 사람은 하나님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걸어 가셨던 길이고 오늘 우리 앞에 놓여진 길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입니까? 힘의 길입니까?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