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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제자의 길(2) (07.07.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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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82회 작성일 Jul 0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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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7월 7일
본문: 마가복음 8:34-9:1
제목: 제자의 길 (2)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Narcissus)라는 미소년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점성술가는 말하기를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모습을 절대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어느덧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아름다운 외모에 반해서 수많은 처녀들과 요정들이 그에게 구애를 했습니다. 요정 에코(Echo) 또한 나르키소스를 보자 첫눈에 반했지만 차가운 나르키소스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실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은 에코의 사랑은 그녀의 몸과 마음이 타들어가게 했고, 점차 목소리와 뼈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뼈마저 돌로 변해 버리고, 목소리만 울림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어느날 나르키소스는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던 중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에 홀린 그는 한 발자국도 물가를 떠나지 못하고 마침내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죽은 그 자리에서 수선화가 피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몰입해서 사랑에 빠지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자기애)이라고 합니다. 여성들이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의 모습에 황홀해 하는 심리는 바로 나르시시즘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누구나 자기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비극의 원초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집착이라고 부르지요. 기독교에는 죄의 특징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지적합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은 자기 가정만을 사랑하는 가족애로, 그리고 자기 지역만을 사랑하는 지역주의로, 민족주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교만이 되고,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할 때 독선이 됩니다. 독선은 배타적이고 폭력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국가와 국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이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물 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반해 물가를 떠나지 않는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와 같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가 한 말만 메아리로 듣고 있는 요정 에코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물 속에 비친, 다만 그림자에 불과한 ‘나’라는 절대 우상을 섬기는 이교도들인 셈입니다. 물론 은혜를 받고 기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이 자신이 추구하는 성공과 축복과 일치하는데까지는 같이 갈 수 있습니다. 자기의 견고한 자아,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 설계와 계획, 그리고 꿈과 비전, 이런 것들은 굳히 죄 짓는 것들이 아닌, 그저 소박한 소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이것들을 들추어내고 정면으로 도전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이상한 걸음을 걷기 시작합니다. 자기중심적 자기애에 강하게 붙들려 있기에 일단 하나님 말씀을 고의로 무시합니다. 잊고 회피합니다. 아니면 타협을 시도합니다. 즉 자신의 자아, 옛성품이 죽어야 내가 사는데, 바로 죽어야 되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완강히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저 희생없이 손해 안보고 적당히 신앙생활하고 싶습니다. 그저 편한함과 안락함 속에서 신앙생활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 가급적 피해 가고 싶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오라는 말씀은 자유 분방하게 마음껏 즐기며 인생을 살고 싶은 현대인들에게는 독약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 말씀이니까 어쩔 수 없이 들으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는 너무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자아실현이고, 자기표현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을 따르려면 우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자신을 부정하고, 혐오스러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왜 주님은 우리에게 과격한 요구를 하실까요? 그 이유는 우리 생각과 몸의 지체가 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병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훌륭한 신앙인으로서 부모 노릇도 잘하고, 직장이나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원하는데, 문제는 우리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하는 일마다 육체의 열매를 맺습니다. 마음에 선함을 원하지만 열매를 맺고 보니 죄의 열매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제대로 자라지 못한 성인아이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고, 억압과 학대 속에서 자란 아이가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할 때 어른이 되어도 더 고집 세고, 더 이기적인 어린아이처럼 굴 수 있습니다. 자격지심이 강하여 쉽게 분노하고, 쉽게 낙담하고, 쉽게 탐닉하고, 쉽게 감각적인 것에 빠져서 탈선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정당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삐뚤게 사물을 봅니다. 사고구조가 왜곡되어서 생각하는 것마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적대적입니다. 이렇게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처럼 우리를 병들게 하는 그 힘의 정체가 죄입니다. 죄의 힘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시 51:17)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원하시는 것이지 제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상한 심령, 즉 병든 자아를 드리지 않고 예배를 드립니다. 헌금을 드립니다. 봉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랫동안 출입하여도 인격에 변화가 없습니다. 옛 습관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 속에 보이지 않는 자아가 병들어 있는 채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올바르게 치유되지 않으면 신앙도 역시 병든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항상 불안하고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탐욕과 탐식, 음란, 중독, 시기, 질투, 흩기는 눈, 거짓말과 험담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제자의 길로 초청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병든 자아를 주님께 내놓아야 고쳐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터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신령한 열매를 많이 맺는 축복된 삶이 시작됩니다. 물론 십자가의 길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고,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가장 복 받는 길이요 형통의 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뒤를 좇아가는 제자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요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 모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제자의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면서 우리 신앙의 자세를 바로 잡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1. 제자의 길은 첫째 자기 부인에 있습니다.

제자가 되려면 가장 기본이 자기 부인에 달려 있습니다. “부인하고”이란 단어를 현대어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버리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는 무아지경이 되는 것을 말할까요? 금욕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기를 멸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도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의 도를 닦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부인이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하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며 그 고백대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고백합니다.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재권이 주님께 있고,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게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초가 삼간도 만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고대광실에서 살아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온갖 탐욕의 노예로 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남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발판으로 삼아서라도 내가 행복해 지고 싶은 욕망,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싶은 욕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여 역사의 중앙에 서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죄의 세력으로 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사랑과 희락, 자비, 양성,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로 가득 찬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비우고 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빈 내 마음에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생명도, 명예도, 권력도, 재능도, 학식도, 건강도, 자녀도, 가정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이 출발이 신앙인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기초가 되어 있을 때 신앙인은 어떤 경우도 행복할 수 있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2. 제자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사형언도를 받은 죄수가 자기가 처형당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처형 당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온전히 뒤따라가려면 치루어야 할 희생이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댓가를 지불하고도 좇아가는 자가 제자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얼마나 영악합니까? 결코 손해 볼 거래는 하지 않습니다. 혹시 자기 권리가 침해 당하거나 정당한 자기 몫이 줄어들까바 눈을 부릅뜨고 살핍니다.

어느 주일에 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어리석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면,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 한 아이가 번쩍 들더니 이렇게 답변하더랍니다. “선생님, 죽기 전까지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고 싶고요, 죽은 다음에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란 자신의 잘못이나 죄로 인해서 받는 고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가치, 그분이 지향하시는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살고자 할 때 세상으로 부터 받는 모욕, 차별, 불이익, 처벌, 투옥과 심지어 죽음까지를 포함합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기 원치 않는다면 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단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실제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지어진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도하며 순교했습니다. 빌립은 소아시아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었습니다. 바들로매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라고 소리치며 순교했다고 합니다.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순교했고, 맛디아는 예루살렘에서 돌팔매질에 맞아 쓰러진 후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안드레는 에데사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했고,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백세까지 온갖 환란을 겪다가 죽어간 살아 있는 순교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고통과 눈물과 한숨만 있는 삶입니까?’이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샘솟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세상을 밝게 하고, 세상을 썩지 않게 하는 빛과 소금이 됩니다. 이웃에 화평을 가져옵니다. 여기에 진정한 인간성, 삶의 질을 회복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담대한 믿음과 능력과 권세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고통의 십자가, 헌신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자원해서 지고 가야 합니다.
3. 제자는 예수님을 목표로 좇아갑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만을 좇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를 때 나를 따르라고 불렀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제자는 전신 전력하여 계속해서 좇아가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하고 가로 막았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 같지만 결국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만을 좇아가야지 내 생각과 꾀를 좇아 가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 목표를 보면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목표를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즉 가변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에 둡니다. 어떤 사람은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 즉 영원한 가치에 삶의 우선순위를 둡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 목표로 두는 사람들입니다. 개인적으로 명예를 얻고, 돈을 벌고, 권력을 쥐거나, 심지어 교회적으로 부흥하고,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단지 파생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 잠시 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구원주, 메시야,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분 자신이십니다.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가난할 때도, 부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건강할 때도, 잘될 때도, 잘못될 때도 목표는 오직 하나 예수님을 좇으면 그것이 성공이고 그것이 형통이며 그것이 복입니다.

4. 제자의 길의 영광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영영 수치와 패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원수 대적들의 승리로 종결되지 않았어요.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의 성취로 이어집니다. 죽음은 부활의 서곡입니다(8:31, 35-37). 그리고 영광의 발판입니다(8:38). 또한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9:1).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불러옵니다. 슬픔은 변하여 기쁨의 탄성과 환호로 바뀝니다. 수치에서 영광으로 변합니다.

1) 영생을 얻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역설의 진리입니다. 잃으면 찾을 것입니다. 주고자하면 받을 것입니다. 죽으면 살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과 목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구원코자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기꺼이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36절에서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3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어떤 사람이 온 천하를 얻었지만 자신의 목숨(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잃는다면 과연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있다 해도 결국 죽게 될 것이고,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습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Waodani)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29살에 순교한 짐 엘리엇(Jim Eiott)은 대학생 시절 자신의 일기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잃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이 지킬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과 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37절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2) 행한 대로 갚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부활의 영광에 이어지는 것처럼 제자의 삶은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38절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만약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기로 선택한다면,예수님도 천사들과 다시 오실 때에 그를 부끄러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과 함께 고난을 같이 하면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땅에서도 축복을 약속하고 내세에 영생의 축복이 확실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막 9: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오른 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오른 편이란 권세와 능력과 영광스러움을 상징합니다.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지금 그분이 집무를 보고 계신다. 왕으로써 통치하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로 가는 자에게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보호와 축복이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땅에서 이미 천국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우리가 주님을 좇아가면 돈을 따르고, 명예를 따르고, 권력을 따르는 것보다 더 큰 행복과 평강과 기쁨이 마음속에 솟구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과 사랑이 있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주님을 좇아 제자의 삶을 살면 고생과 고통만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두려워하거나 후퇴해서는 안 됩니다. 뒤로 물러서는 자를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히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결론: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주장을 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를 앞세워 자기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직 예수님을 좇는데 인생의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결단이 이 시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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