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06.23.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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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06.23.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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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8회 작성일 Jun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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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6월 23일
본문: 마가복음 8:27-30
제목: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격언중에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말로 실수를 많이 하고, 죄를 짓기 때문인줄 압니다. 부적절한 때, 부적절한 상대에게, 불필요한 말을 늘어 놓아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조금더 인내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냥 참지 못하고, 쏟아버린 바람에 더 낭패를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침묵해야할 때는 침묵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침묵이 죄악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을 묻을 때 침묵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악의 동조를 거부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묵인하는 경우입니다. 필요할 때 적당한 말이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일이지 모릅니다. 간혹 부부싸움을 하다가 어느 한 쪽이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루 이틀, 심지어 일주일이 가도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해요. 본인은 무언으로 항거를 표시하며 복수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만큼 상대를 고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같이 상대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대화는 다이아몬드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입을 열어서 하나님께 드릴 고백이 있다면 어떤 고백을 드리겠습니까? 저는 하나님도 우리에게서 사랑의 고백을 듣기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편히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 드리는 고백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 중 괴수인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기이함에 감복이 되어서 ‘나도 이제부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라는 고백을 드린다면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감동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런 고백이 없다면 아직도 주님을 뒤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신자입니다.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서 와~ 몰렸다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오합지졸처럼 흩어지는 민중일 뿐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방황하거나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신앙고백을 바로 하지 못하고, 그냥 건너 뛰었거나, 자신은 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가 아닐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들으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확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신앙의 도전

오늘 본문은 가리사랴 빌립보가 그 배경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을 지나가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지명이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아서 그냥 건너뛰기 쉬워요. 하지만 여기에서는 놓쳐서는 안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면 그 배경에 대한 지식이 예수님의 질문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그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의 땅이지만 철저히 이방인인 도시입니다. 역사적으로 그곳은 바알 숭배 중심지였습니다. 바로 그곳에 열 네 개나 되는 바알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의식에 음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근처에는 커다란 언덕이 있었는데 그 한 가운데 깊은 동굴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굴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자연의 신 판(Pan)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샤라 빌립보는 바알 숭배와 관련된 모든 죄악들이 창궐했던 곳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들 중 여러 가지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헤롯 대왕이 건축한 흰대리석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황제들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아주 화려하게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박한 어부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골뜨기에 불과한 제자들은 으리으리한 건축물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의 문화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도시마다 좋아하는 신이 있어서 신전을 짓고 신상을 숭배했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 가보니, 말 그대로 신상 천지였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세워진 아테나 여신의 파르테논 신전이 도시 전체를 압도했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전쟁의 신 아레스, 승리의 신 니케,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다산과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 등, 온갖 신이 광장마다 즐비했습니다.

(행 17:16)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행 17:22-23)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시대도 고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신상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지만, 많은 여성들이 외모와 몸매에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우울증과 위장병 등에 시달립니다. 실제로 다산과 부의 여신인 아르테미스에게 향을 피우며 제사하지 않아도, 돈과 성공을 세상 최고의 가치로 떠받들면 우리도 자녀를 일종의 인신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직장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더 많은 돈과 명예를 얻고자 가정과 공동체마저 팽개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래 전 사도 바울은 탐심이 나쁜 정도가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돈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의 신적 힘을 경험하고 그것에 마음을 점점 빼앗기게 되면 자유는 사라지고 숭배와 복종 관계에 가까워집니다. 이렇게 현대인들도 갖가지 우상을 마음에 두고 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에 대한 도전이 있습니다. 과연 이런 시대적 정신과 문화와 종교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화려한 우상과 신전들을 향해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을 때 예수께서 “자, 얘들아, 나를 쳐다보거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말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여기에 나열된 인물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최고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입니다. 예수님을 그들 중 하나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는 것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 즉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의심과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예수님이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신앙고백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수제자 베드로는 감연히 앞서서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자, 즉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구세주’하면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 주는 왕을 말할 때에도 ‘기름 부은 자, 즉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에 따라 다윗을 이스라엘왕으로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그리스도, 메시아는 백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정치적 압박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빈곤,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복된 나라를 건설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16절에 의하면 베드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16:16)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는 말입니다. 더더구나 유대인으로서 이 고백을 한다는 것은 아주 파격적입니다. 신성모독죄로 고발 당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감히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고백했으니까요.

우리에게 아주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질문할 때 우리가 “선생님은 하나님이십니다”하고 답변한다면 그 사람이 이단 교주나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노발대발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놀리느냐? 내가 정신병자냐?”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치고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베드로는 뼛속까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어릴 적부터 회당에 다니며 모세 오경을 공부했고, 암송하였습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려서는 안된다는 유일신론(monotheism) 신앙을 가진 자입니다. 그래서 더욱 충격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칭찬하셨습니다. (마 16:17-18)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가 어떻게 그런 신앙고백이 가능하였는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것은 지식과 지혜와 경험으로, 또 배워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계시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주장하시고 나중에 이로 인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도 이 주장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에 주님의 탄생, 말씀, 생애, 그리고 십자가도 의미가 있게 되고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다.

만약 예수님의 성자 하나님이 아니시다면 아무리 거룩하고 희생적인 삶을 살았더래도 한 종교 분파의 교주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에, 즉 성자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의 모든 말씀과 삶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3. 신앙고백과 제자도

이 신앙고백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3년동안 제자훈련을 받고 그 결과가 이 고백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3년동안 그들이 보고 듣고 만진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직접 보고 듣고 만져 보았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요일 1:1-2)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비로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막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사단의 흑암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 주실 영적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가셔야할 메시아의 길과 사람들이 대망했던 메시아의 길과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관은 정치적이고 물질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그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을 억지로 붙잡아 임금으로 삼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시려는 메시아의 길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사업을 완성시키심으로 자신이 참 메시아이심을 밝히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구원은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입으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십자가의 사랑이 강권하여서 그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로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제자도는 신앙고백후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다 자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겸손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놓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겸손한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하나님과 영광과 권세로 우리를 압도하여 압박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항복시키지 않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다고 힘으로 우리의 팔을 비틀어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시며 끝까지 우리를 설복시키십니다. (롬 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만약 여러분이 이 사랑을 깨닫고 설복되었다면 어떤 고백을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어떤 고백으로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셨습니까? 베드로처럼 고백하셨습니까? 그것이 전인격을 통해 나오는 체험적 고백입니까? 아니면 머리로만 수긍하는 고백입니까? 그리고 이 고백을 통해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오늘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신앙고백이 너무 쉽게 취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속에 담겨 있는 엄청난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피상적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 생명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진실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이 신앙고백이 생명처럼 소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백에 자신의 생명을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분을 따랐고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위에 하나님 교회가 세워졌고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고, 전세계로 퍼져 갔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고백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사회가 아무리 썩었어도 사람들이 거부하고 비웃어도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4. 계시

우리가 겸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지레 짐작하거나, 하나님은 이러저런 분이라고 추측하여 말하는 것은 무지와 교만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면 무얼 얼마나 알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물며 광대한 우주에 대해서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역사와 인생에 대해서 잘 압니까? 그래서 인생 문제가 없고 고민 또한 없습니까?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피조물도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삽니다.

하물며 창조주 되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해 무얼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 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해 아십니까? 무궁한 지혜에 대해서 아십니까? 십자가로 우리 죄를 구속하여 주시는 그 분의 은혜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는 알 수 없나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그래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적 진리는 오직 성령께서 밝혀 주셔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엡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게 이 계시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확연히 알았습니다. ‘이 분이 메시아시구나! 이분은 하나님이시구나! 이분이 구세주시구나!’

여러분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그 고백은 혹시 목사가 집어 넣어준 것이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다보니, 성경공부를 하다보니 그렇게 말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가짜 고백입니다. 그것은 내 마음으로 부터 믿음에서 나온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남의 말을 빌려서 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핍박과 환란의 무서운 폭풍이 훅 불면 겨처럼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은 교회와 성도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도, 아무리 수가 많이 모여도, 아무리 그럴듯한 신앙 형태를 갖추고 있어도,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없다면 대단히 위험한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과도 같습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이 언제 붕괴될지 몰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믿음을 확증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고후 13: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결론:
대형 할인마트가 가면 일상용품으로 필요한 것들이 거의 다 있습니다. 메이커 별로, 식료품, 전자제품, 학용품, 아이들 장난감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 중에서 자신의 취향에 따라 먹고 싶고, 갖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을 선택해서 구입을 합니다. 그런데 소비자들의 사랑을 영원히 받는 제품도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호응을 받는 상품도 없습니다.

이런 마트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신앙마저도 상대적이고, 선택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자기에게 맞는 종교를 골라서 믿는 것 아닌가? 또는 싫증나고 자기의 구미에 맞지 않다 싶으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조차도 마트에 가서 물건 사듯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예수를 믿고, 그리고 자기 삶에서 절대적인 분으로 그분의 주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일부분, 종교생활을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우 그 정도에서, 그 수준에서 중단 될 분이 아니십니다. 나는 그분을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믿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우리 모두 예수님을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나의 구원자로 믿고, 나의 주로 영접하여 날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장차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기쁨으로 어린양 잔치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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