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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06.02.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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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46회 작성일 Jun 03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6월 2일
본문: 마가복음 8:22-26
제목: 무엇이 보이느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날은 과학과 기술을 신봉하는 시대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믿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나오는 이적과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은 자연 현상만을 가지고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초자연 현상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와 같은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자신들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은 허구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오늘 본문은 복음서 기자가 자신의 상상이나 허위로 거짓 증언한 것이 아니라 목격한 사실 그대로 기록했다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뜻 깊습니다. 예수님이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는데 두 차례 안수하시며 눈을 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마치 예수님이 한 번만에 안되니까 두 번해서 고치셨다고 오해될 만한 부분입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딸이 완전히 심장이 멈춰 죽었음에도 살리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치유절차를 보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두 차례 안수해서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 과학기술에 의하면 꾸며낸 이야기, 허구가 아니라 오히려 목격한 사실 그대로 기록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김정훈 연세대 의대교수께서 아주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김정훈,"벳새다의 소경 이야기는 사실이다!")

소경이 눈을 뜨고 나서 무엇이 보이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절) 라고 답변했는데,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무가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왜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소경이 정말로 장님이었는데 이제는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거해 줄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날 때부터 혹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어른이 된 후에, 의학적 수술에 의해서 시력을 회복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정상적인 시각을 완전히 회복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였다고 금방 사물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현대 신경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소위 ‘본다는 것(seeing)’의 신경생리학적 과정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사물을 인지하려면 일단 눈의 감각세포와 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새로운 정보가 뇌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사물을 인식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뇌에 들어온 새로운 정보가 이미 기억에 의해 저장되어 있던 기존의 정보와 연관하여서 새로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새로운 정보에 대한 해석을 내릴 때 비로소 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다는 것 (seeing)’이 비록 눈이라는 감각 기관에 의존하여 정보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정보를 처리하여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해석을 내릴수 있는 뇌가 같이 발달되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물론 시각이 정상인 사람은 처음 눈을 뜬 갓난 아기 시절부터 시각이 완전히 형성될 때 까지의 일정 기간을 지나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시각 정보를 뇌에 저장하며 발달해 왔습니다. 그래서 보는 순간 한 눈에 여러 가지 사물을 즉각 인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릴 적 시각 발달이 매우 중요한 시기를 놓친 소경의 경우에는, 그에 따른 뇌의 시각피질이 발달되지 않아서 그 정보를 곧바로 올바르게 처리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중에 눈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게 되어도, 상당한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소경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라고 답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려서부터 소경이었다가 실제로 눈을 떠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답변입니다. 저자 마가가 상상력으로 지어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대 의학의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그 때 일어났던 일과 말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벳새다의 소경은 예수님의 첫 번 안수때에 눈을 회복하였고, 두 번째 안수때에는 뇌까지도 회복하여 만물을 밝게 보게 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단 한 번에 눈과 뇌를 고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보 두 차례에 걸쳐 고쳐 주신 것은 예수께서 훗날 의학이 발달하여 이 치유의 사실이 허구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실임을 증거하게 될 것을 예견하신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기록은 사실이며, 이로써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그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저자 마가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그대로 성취 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1. 메시아 예언의 성취

이사야 35장 1-6절 말씀은 메시아를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의 역사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 35:1-6)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있는 이 구원의 역사의 현상을 보면 광야와 메마른 땅이 백합화 같이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 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주며 겁내는 자에게 굳세게 하여 주신다고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떠서 밝히 볼 것이요,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합니다. 벙어리의 혀는 노래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이 구원의 역사가 놀랍게도 지금 이방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되시는 것입니다.

2. 제자들의 불신앙과 오순절 성령강림

그런데 예수님이 이방 땅에도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이적과 기적들을 통해 그분이 약속 된 메시아 하나님 아들 도심을 증거해 주셔고, 그들을 애정을 가지고 돌보며 섬겼지만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저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한탄하시며 책망하십니다.

(마 11:21-24)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런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 하였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직접 많은 이적과 기적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도 믿음이 없었습니다. (막 8:17-1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제자들을 책망하신 까닭은 많은 이적과 기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음이 발휘되지 않는 불신앙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8장에는 칠병이어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적은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명의 군중을 먹이시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는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친히 목격한 제자들이었지만 건너편을 향해 배를 타고 가다가 떡 가져오기를 잊은 것으로 염려합니다. 조금전 칠병이어의 기적을 상기시키며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소경을 고치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본문처럼 두 차례에 걸쳐 눈을 뜨게 한 사건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한 번에 눈을 뜨게 합니다. 왜 유독 마가복음에서만 두 차례에 걸쳐 소경의 눈을 치료하셨을까요? 이것은 칠병이어의 사건을 보고도 영적으로 둔한 제자들을 예수께서 책망한 후에 이어서 두 차례 안수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기록한 저자 마가의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영적으로 어두웠던 제자들이기에 그들 또한 예수님의 두 번째 안수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할 수도, 받아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둔감했습니다. 주님의 다시 만져 주심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제자들은 의심과 불신앙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는 열정적인 사도로 변화됩니다. 그들에게 영적 눈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일어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신령한 세계,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부요함이 펼쳐졌습니다.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우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위해서 죽기까지 충성하며 전파했습니다.

3. 성령의 조명하심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신령한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보이기는 보이는데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다시 한 번 더 안수해 주심으로 만물을 밝히 보이는 수준에 올라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엡 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제발,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히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눈이 밝혀지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이란 우리 인격의 중심이요 우리의 존재와 행동의 원천입니다. 이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는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그 부요한 복들을 깨달고, 이를 더욱 풍성히 누리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마음의 눈이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이지와 총명이 어두워졌습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져서 무지함과 완고함이 찾아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엡 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이렇게 이전에는 우리가 사단의 영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물질과 정욕의 종이 되어 세상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영적으로 캄캄한 흑암에 갇혀 있었습니다. 걸려 넘어져도 무엇에 걸려 넘어지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더러움과 방탕에 뒹굴어도 염치와 수치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권세로부터 건져 주셨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에서 빛의 나라로, 사탄의 노예생활에서 은혜의 왕국으로 우리의 위치가 옮겨진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신분으로 탈바꿈시켜 주셨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력에 붙잡혀 있던 우리를 빛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신 민족,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소중히 여기셔서 보호하시며 인도하며 책임을 져 주십니다. 여기에 우리 부르심의 복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덕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워진 우리 마음의 눈이 다시 밝아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춰주심으로 진리가 밝히 깨달아지는 성령님의 조명하심입니다. 성령님이 밝혀 주시는 역사가 없다면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여전히 닫힌 책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진리를 내 것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조명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진리라고 믿어집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에게서 탄생한 사실이 진리로 받아드려집니다. 그분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서 하나님의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신령한 복과 그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감히 바라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복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이 이것을 고린도전서 2: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2: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영광을 조금이라도 보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그를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렇다고 그들이 현실을 도피하거나 회피하며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그것에 비추어 현재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 영광의 나라가 그들을 이끌어 간 것입니다. 인생살이에는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이 찾아옵니다. 때로는 사람의 오해로 말미암아 견딜 수 없는 마음 고생합니다. 물질적인 시련이 오기도 합니다. 건강에 이상이 오기도 합니다. 달콤한 유혹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만 포기하는 게 좋지 않아. 네가 믿는 하나님은 너에게 관심도 없어. 너는 지금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거야. 남들 보라. 그들은 얼마나 인생을 즐기며 사는지. 공연히 생고생하지 말고 너도 더 늦기 전에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 우리를 다시 한 번 더 만져 주심으로 신령한 눈이 완전히 열려져서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우리를 부르신 그분의 복된 부르심, 그리고 자녀된 우리에게 주신 그 나라의 부요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 인생의 모진 시련과 연단 가운데 있는 분들, 경제적 압박과 가정 불화, 그리고 늙고 병듦과 질병으로 인해 외롭고 힘든 삶을 사는 분들, 또 예수를 믿는데 화끈하게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뭔가 잡히는 것이 없어서 고민 중인 분들, 유혹과 갈등으로 그만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지 망설이는 분들에게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포기하지 말고 한 번 더 주님의 만져주심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에 최남선 씨나 이광수 씨는 처음에는 민족의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통치가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자 일제 말기에 변절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일제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영영히 일본의 속국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제국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36년 만에 일본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독립되었을 때에 그들은 친일파로 몰려서 온갖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감옥에서 끝까지 중심을 지킨 애국지사들은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해방되어 속히 독립을 얻게 될 것을 바라보았더라면 결코 지조를 굽혀 변절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난과 시련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영광의 때는 옵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으로 웃는 자입니다. 이 예배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다시 한 번 만져 주셔서 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소서. 다시 안수하심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그 영화로움과 위용과 거룩을 알게 하소서. 저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복된 부르심인지를 깨닫게 하소서. 우리가 유업으로 받을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과 충만함을 알게 하소서. 그래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갈 때 세상 일로 인해 실족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떤 환란과 시련을 만나더라도 이 비밀을 간직한 기쁨으로 너끈히 이겨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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