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니 두려워 말라 (05.26.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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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347회 작성일 May 27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5월 26일
본문: 마가복음 6:45-52
제목: 내니 두려워 말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복음서에는 마법과 같은 초능력이 발휘되는 기적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초능력이 역사하여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는 ‘기적’이란 단어 대신에 ‘표적’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왜 사도 요한은 굳히 ‘표적’이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기적(miracle)’과 ‘표적(sig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에서 ‘기적’이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자연 법칙을 넘어서 일어나는 일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많은 일들이 다 기적입니다.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되는 것, 기적입니다. 모든 불치의 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 기적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 갈릴리 깊은 바다 위를 걷는 것,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표적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영어로 사인(sign)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어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감추어진 뜻’을 의미합니다. 자연법칙을 넘어서 행하신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사인을 주는 것이 바로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기적들이 기록된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이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왜 표적을 보여주셨는지 그 답을 이미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표적을 기록한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이란 제목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초능력을 발휘해서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명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 모두 배불리 먹은 후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다는 기적을 전달하고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가르쳐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께서 만인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내고, 자신의 살과 피로써 우리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어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떡을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저 허기에 찬 자기 배를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능력자 정도까지로만 이해했습니다. 저들의 생각에 ‘저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면 먹는 문제도 해결되고, 로마 군대를 쫓아내어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표적으로 주신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워줄 분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알기를 소원하며 그분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믿음이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배 드리고, 기도 응답의 체험도 있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믿음이 내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의 효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사정없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절망합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한 현주소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착각의 원인이 어디로 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인생의 풍랑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 타고 건너편 뱃새다로 건너 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사람들의 이런 열광에 휩싸여서 잘못된 메시아 운동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나 환호성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자기왕국을 세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입니다. 바로 이것에 집중하기 원하셨기에 사람들을 피해서 홀로 산에 오르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제자들이 힘들게 노 젓는 것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막 6: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했던 제자들은 갑작스런 풍랑을 만나서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고 밤새도록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순항하는 배가 갑자기 돌풍을 만나듯이 우리 인생에도 평탄하게 잘 살던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나는 혼자다’,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다’등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자신만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외롭고, 무섭고, 두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크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이 모든 상황을 우리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 아픈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까? 그뿐만 아니라 그분의 강한 팔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그 힘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행동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2. 유령을 믿는 수준의 신앙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유령이라고 겁에 질려 소리질렀습니다(43절). 어릴 적 어른들로 부터 귀신, 유령,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험한 산길을 홀로 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 끝이 하늘로 솟구치며 섬찟해 하는 놀라움을 겪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들과 다를바 없는 범부들이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었고 무서우면 소리질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나 큰 호수 아래에 악령과 같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미신이 존재합니다. 뱃사람들이 거센 풍랑을 만날 때마다 제사를 지낸 것도 결국은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악령의 심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바다의 풍랑을 주관하는 용왕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유령”이라고 소리쳤던 제자들도 세상사람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신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권위
두려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곧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얼마나 위안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내니(It is I)”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이는 용법입니다.
출애굽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양을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십니다. 종살이로 억압과 탄압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여 자유와 풍요 속에서 살아갈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는’ 사명자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제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이 묻기를 ‘너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하고 물었을 때 ‘누가 보냈다고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출 4: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영어 성경을 보면,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I am who(that) I am.” 즉, “나는 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존재, 곧 나는 나다. I am myself.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존재, 시간과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 너희를 이끌어 가는 존재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알려 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와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아라. 너희가 나와 더불어 있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조들과도 함께 하셨고, 지금 모세와도 함께 하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고,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그래서 ‘내니’‘It is I’‘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의 신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로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문제가 발생해서 두려움이 몰려오고,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이 흔들릴 때 주님은 “내가 그 해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배에 오르자 풍랑에 파선할 것같은 큰 위기상황이 금세 해결 되었습니다. 51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폭풍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공포와 위기도 한 순간에 날려버리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사업이 안 될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고, 아들에게 사고가 날 수 있고, 딸의 가정이 불화하여 사네 못사네 하는 소식이 들려 올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몸 안에 종양이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가정의 위기와 건강의 문제가 생길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인생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평화로운 세상은 끝이 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 인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지를, 인간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솔직해지고 정직해 집니다. 밋밋하던 기도가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해 냅니다.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강력하게 부르짖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주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잔잔하여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절망적인 인생이 소망적인 인생으로, 어두운 인생이 밝은 인생으로 변합니다. 불안한 인생이 평안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4. 더 깊은 부르심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도 막상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그때마다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랐고, 베에 오르자 즉각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5천 명을 비롯해서 만 오천에서 2만 명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니 12바구니에 가득했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불과 몇 시간 전입니다. 그런데도 풍랑 앞에서 두려워 했고, 예수님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키자 마치 기적을 처음 본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방금 봤는데도 왜 제자들은 처음 겪은 것처럼 마냥 놀랄까요.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이런 경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세 차례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제자들은 한사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기 까지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 앞에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그런데 3일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물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만나를 먹여 주셨지만 도무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습니까? 우리를 절망과 위기, 그리고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어서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 마음이 냉담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고 세상이 크게 느껴지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인해서 불만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요, 영적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52절입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들은 매번 기적의 현장에서 놀라고 그때마다 주님을 경외심으로 주님을 인정했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잊어버리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험에 드는 까닭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은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인식하여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장성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깨우침이 없습니다. 그분이 자연만물을 지배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속하실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되심을 인식하는 믿음에서 자라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저 우리 소원을 성취시켜 줄 분, 현실적인 욕구를 채워주실 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분으로만 여기고 접근합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근거에 의해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분의 신성과 거룩과 지혜와 구원에 대한 깊은 깨달음도 부족하고, 그분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그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골 1:13-20)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결론: 오늘날처럼 유혹거리가 날마다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우리는 진지하게 예수는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그분의 존재에 대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등을 비롯한 기계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당장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일이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쉴 틈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시대에 뒤지 않게 열심히 뛰어야 할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낡고 시대에 뒤지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과학의 발전과 아울러 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젊은이들은 자기 앞가림하기에 급급하여 신앙에 관련된 일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비합리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에 의하면 2,000년 전에도 당시 사람들도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일로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의 위용이 더 커보이고, 로마황제가 예수보다 더 힘있는 권세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처한 현실 상황은 거센 바람을 만난 흔들리는 배와 같았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환경이 늘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교회는 중심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항상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두려움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마가복음 저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우리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견디어 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극심한 핍박 받고 있던 성도들은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권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그분이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을 거라는 것을 믿고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몰아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공동체가 의지하고 따라야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유령 같은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어떠한 환란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올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4년 5월 26일
본문: 마가복음 6:45-52
제목: 내니 두려워 말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복음서에는 마법과 같은 초능력이 발휘되는 기적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도 초능력이 역사하여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는 ‘기적’이란 단어 대신에 ‘표적’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왜 사도 요한은 굳히 ‘표적’이란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기적(miracle)’과 ‘표적(sig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국어사전에서 ‘기적’이란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신기한 일이나 초자연적인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도저히 인간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 자연 법칙을 넘어서 일어나는 일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많은 일들이 다 기적입니다. 가나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되는 것, 기적입니다. 모든 불치의 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것, 기적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 갈릴리 깊은 바다 위를 걷는 것,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표적은 무엇입니까? 표적을 영어로 사인(sign)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어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 감추어진 뜻’을 의미합니다. 자연법칙을 넘어서 행하신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사인을 주는 것이 바로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기적들이 기록된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기적을 베푸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일이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사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왜 표적을 보여주셨는지 그 답을 이미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표적을 기록한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이란 제목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초능력을 발휘해서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명 되는 사람들을 먹이고, 모두 배불리 먹은 후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다는 기적을 전달하고자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가르쳐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께서 만인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내고, 자신의 살과 피로써 우리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어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실 것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떡을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저 허기에 찬 자기 배를 부르게 하실 수 있는 능력자 정도까지로만 이해했습니다. 저들의 생각에 ‘저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면 먹는 문제도 해결되고, 로마 군대를 쫓아내어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표적으로 주신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욕망을 채워줄 분으로만 인식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그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신의 욕망하는 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찾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분 자신을 알기를 소원하며 그분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믿음이 없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배 드리고, 기도 응답의 체험도 있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믿음이 내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믿음의 효력이 전혀 발휘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사정없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며 절망합니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믿음에 대한 현주소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착각의 원인이 어디로 부터 말미암은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1. 인생의 풍랑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 타고 건너편 뱃새다로 건너 가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사람들의 이런 열광에 휩싸여서 잘못된 메시아 운동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떠난 후 예수님은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나 환호성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자기왕국을 세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입니다. 바로 이것에 집중하기 원하셨기에 사람들을 피해서 홀로 산에 오르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제자들이 힘들게 노 젓는 것을 내려다 보셨습니다.
(막 6:47-48)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했던 제자들은 갑작스런 풍랑을 만나서 한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고 밤새도록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순항하는 배가 갑자기 돌풍을 만나듯이 우리 인생에도 평탄하게 잘 살던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위기가 찾아오면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나만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다’,‘나는 혼자다’,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다’등의 생각이 그렇습니다. 자신만이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자기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외롭고, 무섭고, 두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크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이 모든 상황을 우리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당한 고난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 아픈 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 고통을 느끼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까? 그뿐만 아니라 그분의 강한 팔로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그 힘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행동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2. 유령을 믿는 수준의 신앙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유령이라고 겁에 질려 소리질렀습니다(43절). 어릴 적 어른들로 부터 귀신, 유령,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별빛도 없는 캄캄한 밤에 험한 산길을 홀로 가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카락 끝이 하늘로 솟구치며 섬찟해 하는 놀라움을 겪어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제자들은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들과 다를바 없는 범부들이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었고 무서우면 소리질렀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다나 큰 호수 아래에 악령과 같이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미신이 존재합니다. 뱃사람들이 거센 풍랑을 만날 때마다 제사를 지낸 것도 결국은 이 모든 원인이 바로 악령의 심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가 출항하기 전에 바다의 풍랑을 주관하는 용왕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유령”이라고 소리쳤던 제자들도 세상사람들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신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얼마나 피상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권위
두려워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곧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얼마나 위안이 되겠습니까? 여기서 “내니(It is I)”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지칭할 때 쓰이는 용법입니다.
출애굽기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양을 치며 살아가던 모세에게 나타나 사명을 주십니다. 종살이로 억압과 탄압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여 자유와 풍요 속에서 살아갈 아름답고 광대한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는’ 사명자로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제가 누구이기에”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들 앞에 섰을 때 그들이 묻기를 ‘너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하고 물었을 때 ‘누가 보냈다고 해야 합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출 4: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영어 성경을 보면,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I am who(that) I am.” 즉, “나는 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은 존재, 곧 나는 나다. I am myself. 나는 나 자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해석은 “I will be what I will be.” 즉, “나는 될 것을 되게 하는 존재, 시간과 역사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 너희를 이끌어 가는 존재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알려 한다면, 시간과 공간의 역사 속에서 내가 너희와 어떻게 함께하는지를 보아라. 너희가 나와 더불어 있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선조들과도 함께 하셨고, 지금 모세와도 함께 하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 하실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셨고, 너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그래서 ‘내니’‘It is I’‘에고 에이미’는 예수님의 신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로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문제가 발생해서 두려움이 몰려오고,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음이 흔들릴 때 주님은 “내가 그 해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배에 오르자 풍랑에 파선할 것같은 큰 위기상황이 금세 해결 되었습니다. 51절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배에 오르자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폭풍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과 공포와 위기도 한 순간에 날려버리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사업이 안 될 수도 있고, 직장을 잃을지도 모르고, 아들에게 사고가 날 수 있고, 딸의 가정이 불화하여 사네 못사네 하는 소식이 들려 올 수 있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 몸 안에 종양이 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가정의 위기와 건강의 문제가 생길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인생에 물이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평화로운 세상은 끝이 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 인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지를, 인간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의 기도는 솔직해지고 정직해 집니다. 밋밋하던 기도가 격정적으로 감정을 토해 냅니다.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강력하게 부르짖는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주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올 때 순식간에 모든 것이 잔잔하여 평정을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 절망적인 인생이 소망적인 인생으로, 어두운 인생이 밝은 인생으로 변합니다. 불안한 인생이 평안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4. 더 깊은 부르심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도 막상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그때마다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놀랐고, 베에 오르자 즉각 바람이 그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5천 명을 비롯해서 만 오천에서 2만 명을 배부르게 먹이셨습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니 12바구니에 가득했습니다. 이 기적을 체험한 불과 몇 시간 전입니다. 그런데도 풍랑 앞에서 두려워 했고, 예수님이 또 한 번 기적을 일으키자 마치 기적을 처음 본 것처럼 깜짝 놀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방금 봤는데도 왜 제자들은 처음 겪은 것처럼 마냥 놀랄까요.
그런데 성경을 살펴보면 이런 경우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세 차례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제자들은 한사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저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기 까지 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 앞에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 땅 같이 건넜습니다. 그런데 3일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물이 없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만나를 먹여 주셨지만 도무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평하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쉽게 잊어버립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습니까? 우리를 절망과 위기, 그리고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어서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 마음이 냉담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고 세상이 크게 느껴지고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인해서 불만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요, 영적 감각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52절입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들은 매번 기적의 현장에서 놀라고 그때마다 주님을 경외심으로 주님을 인정했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잊어버리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험에 드는 까닭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은혜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은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인식하여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장성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깨우침이 없습니다. 그분이 자연만물을 지배하시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우리를 구속하실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 되심을 인식하는 믿음에서 자라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저 우리 소원을 성취시켜 줄 분, 현실적인 욕구를 채워주실 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분으로만 여기고 접근합니다. 우리의 필요와 욕망에 근거에 의해서 주님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분의 신성과 거룩과 지혜와 구원에 대한 깊은 깨달음도 부족하고, 그분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자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그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골 1:13-20)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결론: 오늘날처럼 유혹거리가 날마다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현대사회의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우리는 진지하게 예수는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그분의 존재에 대한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등을 비롯한 기계문명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당장 가까운 시일 내에 어떤 일이 전개될지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쉴 틈없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시대에 뒤지 않게 열심히 뛰어야 할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낡고 시대에 뒤지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과학의 발전과 아울러 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교회가 점점 고령화 되어가고, 젊은이들은 자기 앞가림하기에 급급하여 신앙에 관련된 일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비합리적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보고에 의하면 2,000년 전에도 당시 사람들도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일로 보았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의 위용이 더 커보이고, 로마황제가 예수보다 더 힘있는 권세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처한 현실 상황은 거센 바람을 만난 흔들리는 배와 같았습니다. 교회를 둘러싼 환경이 늘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예수님의 부재 속에서 교회는 중심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잡히지 않은 경우에는 더욱 동요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언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항상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두려움 가운데 있던 그들에게 마가복음 저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려줍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우리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주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기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견디어 냈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에서 극심한 핍박 받고 있던 성도들은 예수께서 바다를 잔잔케 하는 권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의 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의 주가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상황을 그분이 통제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을 거라는 것을 믿고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몰아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눈 똑바로 뜨고 집중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공동체가 의지하고 따라야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유령 같은 세상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어떠한 환란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바로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올해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더욱 자라가고,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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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zKklbiXdTU8 874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