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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크냐 (06.09.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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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461회 작성일 Jun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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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6월 9일
본문: 마가복음 9:33-41
제목: 누가 크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힘이고,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힘이라고 하는 것에는 돈의 힘, 무력의 힘, 권력의 힘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움직입니다. 돈 때문에 남을 위해서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합니다. 죽기 살기로 뜁니다. 무력의 힘도 사람을 움직입니다. 주먹이 무서워서, 매가 무서워서, 어떤 외부적인 압력에 두려워서 할 수 없이 움직입니다. 권력의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아부 아첨을 합니다. 그 힘에 맞게 변신하여 권력자의 비위를 맞춥니다. 이런 권력의 속성 때문에 한 번 권력 맛을 본 사람은 자꾸 권력을 쥐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힘들에 의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는 것은 일시적이고 피상적입니다. 결국 탈이 납니다. 갈등과 불화를 불러 일으키고, 복수와 보복의 악순환 속에서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 눈을 뜨면 당면하는 현실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사랑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섬기고 대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는 사랑만이 사람을 진심으로 변화시키고 움직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일을 계속 일으켜 백성들의 환심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예수께서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천사들을 동원하여 로마 군대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랑으로 섬기고 희생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 은혜에 설득되어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기존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뒤집어 놓는 일입니다. 기존 세상 질서는 무력으로 통치하고 지배하고, 강제하여 질서를 세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불러온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용서하고, 희생하고,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으뜸 된 자가 낮은 자를 섬기는 질서입니다. 이에 모범을 보여주시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를 본받아 좇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수난 받으실 것을 두 번째로 예고하신 직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주 비장한 심정으로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사이에 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다퉜는지를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 이유는 “누가 크냐”라는 것으로 서로 다퉜기 때문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누가 위냐? 누가 선임이냐? 누가 높으냐? 누가 위대하냐? 누가 힘이 세냐? 누가 영향력이 있느냐? 누가 인기가 많으냐?’그런 종류의 다툼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에 이어서 10장 35절 부터 41절에서도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이를 듣고  다른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자기가 크다는 주장을 하며 나름의 이유를 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수제자로서 당연히 자신이 가장 큰 자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다. 그는 항상 가장 앞장 서서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자신의 충성심과 리더십을 강조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가장 먼저 신앙고백했던 점을 앞세웠을 것입니다. 이에 그의 형제 안드레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예수께 소개했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한 소년의 점심 한 끼로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도록 주도했던 자입니다. 그러자 요한과 야고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말하기를 “예수님이 자신의 심중에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과연 누구를 가장 사랑하시는지를 따져 봐라.”고 주장합니다. 더구나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인척관계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분개한 나머지 “그래 너희들이 다 해먹어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1. 다툼의 원인

여러분, 사람들이 모이면 “누가 크냐?”와 같은 비교와 경쟁이 일어납니다. ‘누가 더 위대하냐?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유명하냐?’이것은 인간 내면에 깊숙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언제나 있어왔던 고질병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사랑, 자기애 때문에 생긴 고질병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낳은 두 아들이 등장합니다. 큰 아들 가인은 농사를 지었고,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을 첬습니다. 가인은 농사 지은 것으로 하나님께 바쳤고, 아벨도 양의 첫새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분노로 가인의 얼굴색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아벨을 들판에서 쳐죽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과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를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동생 아벨과 비교하고 경쟁하다가 그 결과 아벨을 향한 미움과 시기로 분노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을 최초로 죽이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또 사람과 사람을 놓고 비교합니다. 비교하여 내린 결론에 따라 열등감에 시달리기고 하고, 반대로 교만에 빠져 으시대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뒤처진다 싶으면 부단한 경쟁을 통해서 이기려고 노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난 지고는 못 살아!’그러면서 끊임없는 승부욕을 발동하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로 극심한 경쟁을 벌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노여워하거나 상처를 받는 원인 중에 가장 많이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말 때문에 비롯합니다. “얘, 네 형을 봐라, 너는 왜 형처럼 야무지게 못하니?” “너는 언니가 되어 네 동생보다도 못하니, 정신 차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남들보다 위에, 남들보다 더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자기를 과시하기도 하고, 자기를 포장합니다. 명품 물건에 집착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누가 크냐? 누가 더 높으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였느냐?’하는 것으로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려니까 허세도 부리고, 사치와 허영에 빠지기도 하고, 그것이 안 되면 패배감, 상실감, 열등감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누가 크냐’로 다투는 상황을 보면 매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그리고 부활 사건을 예고하시는 직후에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자식들이 재산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과 삶을 함께 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누가 크냐’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시려고 했던 천국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은 익히 들었고,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그들은 누가 크냐로 다투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누구도 모임에서 첫째가 되고 싶지, 끝이 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지, 뒷바라지하는 조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특히 자존심과 명예심을 중시하는 남자들의 세계에서 아주 민감한 문제입니다. 여성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칭찬과 영광이 주어지면 시기와 질투가 보통이 아닙니다. 왕따를 시킵니다.

2. 섬기는 자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다같이 한 목소리로 35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조직이나 단체에서 일이 성취되려면 누구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나서서 이끌어 가려고 하면 질서가 무너지고, 조화와 화평이 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분자를 세워서 이끌어 가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도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고 말하며 이어서 직분자의 자격 요건에 대해서 쭉 나열했습니다. 직분자를 아무나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검증이 된 자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첫째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의 열망이나 소원 그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문제는 어떤 자가 과연 큰 자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뒤틀린 가치관입니다. 이것이 잘못 되어 있음을 지적하시고 바로 잡아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고, 돈이 많고, 학벌이 좋고, 권력을 쥐고 있어야 큰 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그만큼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아래 사람들을 부리고, 자기 마음대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실 때 진정으로 큰 자는 오히려 낮아져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고 섬겼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이해와 관심을 베풀었는가? 자기 한 사람만 훌륭하게 되고자 애쓴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겼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왜 위대합니까? 그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잘 알아 맞췄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나중에 총리가 되어서 정치를 잘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노예생활, 감옥생활 등 인생의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도 주위사람들을 돌아보며 섬기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 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자 노력했습니다. 자신을 죽이고자 했던 이복형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자신에게 추한 누명을 씌워 감옥생활을 하게 했던 보디발의 아내에게도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마음을 다해 섬겼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바로와 애굽의 백성과 흉년을 당한 주변국가 백성들을 성심성의껏 섬겼습니다. 그의 이런 위대한 섬김은 당시 바로도 감동시켰고, 이방인이었지만 전혀 거부감 없이 80 년 동안이나 총리 자리에 앉아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핍박을 받지 않고 거의 400년 동안이나 애굽 땅에서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요셉 한 사람의 위대한 섬김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반면에서 세상에서 위대한 자로 추앙을 받는 위인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의 전기물을 읽어보면 그들에게 있었던 사소한 선행을 아주 확대 과장하거나, 좋치 않은 일들은 축소하거나 아예 자신의 책임과는 무관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각색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미화하지만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들의 삶속에 빛과 어두움의 양면성을 분명히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영국의 위대한 위인이자,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BBC가 선정한 위대한 인물 1위의 평가를 받을만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저널리스트 마두스리 무케르지(Madhusree Mukerjee)가 발간한 <Churchill's Secret War>에 따르면 1940년대에 인도 벵골 지방을 강타해서 700만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이 굶어죽게 만들었던 세계 최대의 대기근에 대한 책임이 처칠의 야욕에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이 새로운 주장에 대한 반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밝힙니다.

1942년 영국은 동남아 국가들을 침략하여 세력을 확장해오던 일본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배령이었던 미얀마를 일본에게 뺏긴 상태이고 보니 처칠은 인도까지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에 대해 고민하던 처칠이 고안한 방안은 쌀을 모두 없애는 것입니다. 그러면 쌀이 주식인 일본군이 쳐들어와도 먹을 게 없으니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적에게 이득을 남겨놓지 말자는 논리로 내려진 명령하에, 영국군은 지역의 모든 쌀을 모조리 수탈해갔습니다. 쌀 수탈 정책이 시작되자마자 당연히 쌀값이 엄청나게 폭등했습니다. 4개월만에 쌀값이 무려 41%나 상승했고 그 후 6개월만에 4배나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쌀 수탈 정책이 시작된지 몇 개월 되지않아 거리에는 굶주린 사람들로 가득했고,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쌓이게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도에 머물던 영국 관료 ‘레오 아메리’는 이를 참다못해서 처칠에게 인도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지만 처칠은 이를 무시합니다. 벵골지방의 대기근 소식을 접한 세계 열강들이 인도에 식량 지원을 결정하고 처칠에게 식량을 인도까지 수송할 배를 요청하지만, 처칠은 이 역시 무시합니다. 그러자 미국과 호주 등은 자국의 배로 식량을 운반할테니 인도 항구를 열어달라고 요구하지만, 처칠은 이것  마저도 무시합니다. 결국 패권주의의 빠져있던 윈스턴 처칠의 야욕 때문에 인도 벵골 지방의 대기근으로 700만명이 굶어죽는 비극이 초래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세상 권력의 무서운 속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실력 있는 지도자, 능력 있는 지도자, 준비된 지도자, 경제에도 능통한 대통령을 찾습니다. 그것만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지난 역사가 말해 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런 지도자를 열망하고 열광합니다. 그런데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모든 백성의 끝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돌아보는 지도자, 즉 섬김의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은 얼마나 좋은 본이 되십니까?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러 오시지 않고,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시고 죄인들을 섬기시되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내어 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막 10:45) 예수님의 위대성은 그의 능력이나 권세보다도 바로 이 겸손과 섬김에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 때문에 저와 여러분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고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의 삶을 배워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과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만약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능력을 키워서 세상적으로 위대해지고, 업적을 쌓고자 끝없이 경쟁하게 되면 항상 쫓기고, 불안하고, 비교하느라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낮아져서 섬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며 살고자 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 내면에 항상 넉넉함이 있고 푸근하고 남모르는 내적 행복이 있습니다. 저희 모두가 섬김의 생활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받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3. 섬김의 대상

그러면 우리가 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36, 3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랑하고 섬길 대상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소자 한 사람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에 어린아이는 숫자에도 넣지 않을 만큼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 특히 큰 자가 되고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은 전혀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지만 어린아이 같은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끝까지 섬겨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무시하고 회피하는 문둥병자, 중풍병자들도 직접 찾아가셔서 그들의 환부에 손을 대사 치료해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린 자들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한 영혼을 구원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오늘날은 실용적이고 실리적이고 경제적 가치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작은 소자 한 사람의 가치를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별 볼일 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더더욱 인색합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이처럼 소외된 자, 도움이 필요한 소자 한 사람을 돌아보고 기도해주며 그들을 위해 진심과 정성을 쏟는 자입니다. 가정과 직장, 학교와 사회에서 상처받고, 그 영혼이 갈 길 몰라 방황하는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품고 섬겨서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낼 때 그 인생이 진정으로 위대하고 값진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싸움은 얼마나 큰 자가 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작은 자가 되느냐,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오르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낮아지느냐,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아가는 참 제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김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제자의 영광이 있고 형통이 있고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축복하십니다. 진정한 자유와 기쁨, 그리고 천국의 행복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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