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 (05.19.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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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91회 작성일 May 20 2024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5월 19일
본문: 마가복음 6:31-44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
설교자: 이강웅 목사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자신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공급하는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의 복은 훗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복에 대한 것입니다. 이 약속된 복을 우리 인생에게 충만히 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어느 봄날 유월절기를 다 마친 후 집을 향해 돌아가는 민중을 향해서 예수께서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충만함에 이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치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부요하고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배’란 인간의 기본적 본능의 욕구와 욕망의 근원지를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것이 모든 탐욕과 욕심, 그리고 정욕의 원천이 되어서 우리 삶을 휘어잡아갑니다. 우리를 죄의 충동에 사로잡혀 죄를 짓도록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믿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배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생수의 원천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일생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생수를 공급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용서, 평안과 소망, 기쁨과 활력을 계속 채워주시겠다는 거예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 사람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 주시겠다는 거예요.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받을 뿐만 아니라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 영혼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의와 생명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그래서 고통 가운데서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평화 평화로다 하늘에서 내려오네’하고 찬양을 할 수 있어요. 이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수 있어요. 이웃을 돕고 섬길 힘이 있어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마치 댐에 물이 차서 마침내 수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공급합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차고 넘치니까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광야에서 베풀어진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부어질 영생의 충만함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릴 충만한 은혜와 복의 근원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게 한 것입니다.
1. 목자의 심정
마가복음 6장 7-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 지어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30절에 전도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의 행한 일들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가 귀신에 명하여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명하매 귀신이 ‘꿱’하고 나가던데요.” “예수님,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메시지를 전하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던데요. 정말 놀라운 역사였어요.”
제자들은 서로서로 자기가 체험한 믿음의 역사를 보고 하느라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힘을 다해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기특해서 휴식시간을 주기 원했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3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처럼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을 방해받지 않고 알차게 휴식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할 지점을 미리 예상하고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도움을 받고자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세상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먼. 어떻게 쉴 틈을 주지 않지? 밥 먹을 틈도 없잖아. 이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야” 이렇게 말은 못하고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염치없이 몰려온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우리 다같이 34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제자들은 염치없이 또 찾아온 무리들을 심히 부담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6장 17-29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의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고관대작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의붓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서 모든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지라 헤롯 왕이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장담합니다. 살로메가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구할까요’하고 묻자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끔찍한 요청을 하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안티파스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합에 대해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은 그 요구에 내키지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통을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합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자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가 얼마나 불의한 시대인가, 헤롯왕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음란하고 잔인한 자였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연히 불의를 책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세례 요한이 갑작스럽게 무력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은 그만 절망했습니다. 아무런 위로와 도움이 되어줄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로마정부는 탐욕스럽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며 탄압하니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만큼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그 당시 영적인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민중의 편이 되어서 함께 고통을 분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주 차갑고 비정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양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양들의 본이 되지 못하고, 양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착취하고 빼앗습니다. 양들은 고통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고, 힘들어도 어디 가서 변변한 위로와 사랑의 말 한마디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한 목자 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상처받은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병든 그들의 육신을 치료해 주시며,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습니다. 또한 은혜로운 말씀의 꼴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양들은 누가 자신을 참으로 사랑해주는 목자인가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 맞춥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줄 목자를 찾아, 언제든지, 어디든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는 오라고 초청한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5천명이 훨씬 넘는 무리들이, 그것도 달려서 구름떼와 같이 많이 몰려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이런 내적 갈급함을 보셨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하고 스케줄이 이미 있었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먼저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교만해서 좀처럼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영혼이 울부짖고 고통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문제, 성격문제, 관계문제, 경제문제, 장래문제로 말 못할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우주만한 문제를 안고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기만의 슬프고 아픈 인생 문제를 안고, 심히 고통스러워하며 사는 것을 봅니다. 한마디로 목자 없는 양처럼 그 영혼이 유리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들을 바라볼 때 우리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처럼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씀,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상하고 찢긴 그들의 심령을 싸매고 치료해 주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강의는 때가 저물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넘어가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하였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의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제안처럼 보입니다. 지금 식사시간이 다 되었고, 이곳은 음식을 사 먹일 식당도 없으니, 돌려보내어 각자 해결하도록 합시다! 얼마나 현명하고 합리적인 제안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37절)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헬라원어에 보면 “너희가”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가”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시대의 양무리들을 책임지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5천명이 훨씬 넘는 그 시대의 민중들의 문제는 당시 권력층 헤롯이나 빌라도 등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등 제도권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앞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책임질 사람들은 바로 너희다” “이 시대 양무리들을 감당할 목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이 시대 양들의 아픔과 슬픔과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사람들은 바로 너희 제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갈길 몰라 방황하며 죄악의 독초를 뜯어 먹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현대 사회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풍조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정신과 영혼은 점점 황량한 빈들처럼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도시 문화는 그렇게 현란하고 화려한데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이 말씀처럼 이 시대는 갈수록 도덕적으로 황량한 빈들이요, 영적으로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과연 양떼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 각자를 지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이 시대를 책임져라!” “너희가 이 시대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향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촉구하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 양무리를 향한 책임의식, 주인정신, 목자의 심정! 이것이 바로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2. 작은 헌신, 큰 기적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자 가장 먼저 5천명의 무리들을 먹이기에 필요한 돈의 액수를 계산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대답은 그들에게 2백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없기 때문에 무리들을 먹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없는 2백 데나리온만 생각할 때, 도저히 무리들을 먹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결국 “먹일 수 없다" 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3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은 무리들을 먹이는데 있어서, 없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찾아보지도 않고, 자기들에게 없는 것, 자기들이 할 수 없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별 볼일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을 먼저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돌아가서 있는 것을 찾아보았을 때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병이어! 물론 이것은 5천명이라는 거대한 무리 앞에서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분의 식사량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 앞으로 들고 나아갔을 때 어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41-44절까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들고 나온 오병이어를 하찮게 보시고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오병이어를 귀하게 영접하시고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꼬투리로 5천명의 무리들을 먹이시는 기적의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오병이어를 적극적으로 주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적은 헌신이 큰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3. 생명의 떡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단순히 예수께서 조그만 떡 다섯 덩어리와 절인 두 마리 물고기(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이 되는 많은 무리들을 먹이셨다는 기적만을 강조하기 쉽습니다. 즉 예수님을 언제든지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도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 쯤으로 부각시키는 것으로 그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47-4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또 6:53-54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오병이어의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기적의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속죄양이 되심을 내포하고 있는 표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사건을 통해 그분의 살과 그분의 피가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 곧 영생을 주는 하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그분의 몸과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씻어 주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하심과 충만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곤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광 가운데 넘치도록 풍성하고 부요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상속 받은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후 4:8-9)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좇는 세상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에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는 우리는 때로 예수 믿는 자라는 사실을 감추거나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줄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그 떡을 나누어 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이 생명의 떡으로 배부른 자들입니다. 이제 세상에 이를 나누어 주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에게 떼어 주셨듯이, 이를 위해 한 알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듯이, 우리도 이 생명을 전할 때 수많은 영혼들을 열매로 거두어들이는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또 나누어 주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날짜: 2024년 5월 19일
본문: 마가복음 6:31-44
제목: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
설교자: 이강웅 목사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복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자신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을 공급하는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약속의 복은 훗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복에 대한 것입니다. 이 약속된 복을 우리 인생에게 충만히 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루살렘 어느 봄날 유월절기를 다 마친 후 집을 향해 돌아가는 민중을 향해서 예수께서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충만함에 이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치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부요하고 풍성한 삶이 됩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배’란 인간의 기본적 본능의 욕구와 욕망의 근원지를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것이 모든 탐욕과 욕심, 그리고 정욕의 원천이 되어서 우리 삶을 휘어잡아갑니다. 우리를 죄의 충동에 사로잡혀 죄를 짓도록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믿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배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생수의 원천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일생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생수를 공급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공급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 사함과 용서, 평안과 소망, 기쁨과 활력을 계속 채워주시겠다는 거예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 사람의 영혼을 촉촉이 적셔 주시겠다는 거예요.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받을 뿐만 아니라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 영혼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의와 생명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그래서 고통 가운데서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평화 평화로다 하늘에서 내려오네’하고 찬양을 할 수 있어요. 이제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수 있어요. 이웃을 돕고 섬길 힘이 있어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마치 댐에 물이 차서 마침내 수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물이 쏟아져 내립니다. 그래서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공급합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차고 넘치니까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광야에서 베풀어진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부어질 영생의 충만함을 예고하는 사건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릴 충만한 은혜와 복의 근원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게 한 것입니다.
1. 목자의 심정
마가복음 6장 7-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둘씩 짝 지어 전도여행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30절에 전도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기들의 행한 일들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가 귀신에 명하여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명하매 귀신이 ‘꿱’하고 나가던데요.” “예수님,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메시지를 전하니,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던데요. 정말 놀라운 역사였어요.”
제자들은 서로서로 자기가 체험한 믿음의 역사를 보고 하느라고 침을 튀기며 자랑을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힘을 다해 전도사역을 감당하고 돌아온 제자들이 기특해서 휴식시간을 주기 원했습니다.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31절)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처럼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람들을 방해받지 않고 알차게 휴식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할 지점을 미리 예상하고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도움을 받고자 서로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리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세상에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먼. 어떻게 쉴 틈을 주지 않지? 밥 먹을 틈도 없잖아. 이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야” 이렇게 말은 못하고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염치없이 몰려온 무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우리 다같이 34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제자들은 염치없이 또 찾아온 무리들을 심히 부담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심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직전 6장 17-29절을 보시면 세례 요한의 의로운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고관대작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의붓딸 살로메가 춤을 추어서 모든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한지라 헤롯 왕이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고 장담합니다. 살로메가 그녀의 어미 헤로디아에게 ‘무엇을 구할까요’하고 묻자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고 끔찍한 요청을 하도록 합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안티파스과 헤로디아의 부정한 결합에 대해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헤롯왕은 그 요구에 내키지 않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통을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합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자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 시대가 얼마나 불의한 시대인가, 헤롯왕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음란하고 잔인한 자였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감연히 불의를 책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세례 요한이 갑작스럽게 무력한 죽임을 당하자 사람들은 그만 절망했습니다. 아무런 위로와 도움이 되어줄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로마정부는 탐욕스럽게 세금을 거두어 들이며 탄압하니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살만큼 삶이 고통스럽습니다.
이럴 때 그 당시 영적인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민중의 편이 되어서 함께 고통을 분담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아주 차갑고 비정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양들의 목자가 되어야 할 지도자들이 양들의 본이 되지 못하고, 양들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착취하고 빼앗습니다. 양들은 고통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고, 힘들어도 어디 가서 변변한 위로와 사랑의 말 한마디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한 목자 되신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상처받은 그들을 위로해 주시고, 병든 그들의 육신을 치료해 주시며,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아주셨습니다. 또한 은혜로운 말씀의 꼴을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양들은 누가 자신을 참으로 사랑해주는 목자인가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 맞춥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줄 목자를 찾아, 언제든지, 어디든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는 오라고 초청한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5천명이 훨씬 넘는 무리들이, 그것도 달려서 구름떼와 같이 많이 몰려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무리들의 이런 내적 갈급함을 보셨기 때문에 아무리 피곤하고 스케줄이 이미 있었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먼저 그들을 도와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교만해서 좀처럼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영혼이 울부짖고 고통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정문제, 성격문제, 관계문제, 경제문제, 장래문제로 말 못할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우주만한 문제를 안고 고통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기만의 슬프고 아픈 인생 문제를 안고, 심히 고통스러워하며 사는 것을 봅니다. 한마디로 목자 없는 양처럼 그 영혼이 유리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들을 바라볼 때 우리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을 향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님처럼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씀, 생명과 진리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상하고 찢긴 그들의 심령을 싸매고 치료해 주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을 불쌍히 여기사 말씀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강의는 때가 저물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넘어가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말하였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의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제안처럼 보입니다. 지금 식사시간이 다 되었고, 이곳은 음식을 사 먹일 식당도 없으니, 돌려보내어 각자 해결하도록 합시다! 얼마나 현명하고 합리적인 제안입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37절)
예수께서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헬라원어에 보면 “너희가”라는 단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너희가”무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 시대의 양무리들을 책임지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5천명이 훨씬 넘는 그 시대의 민중들의 문제는 당시 권력층 헤롯이나 빌라도 등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등 제도권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앞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 말씀은 “이 시대를 책임질 사람들은 바로 너희다” “이 시대 양무리들을 감당할 목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이 시대 양들의 아픔과 슬픔과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줘야 할 사람들은 바로 너희 제자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는 갈길 몰라 방황하며 죄악의 독초를 뜯어 먹고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현대 사회는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풍조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누군가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그 정신과 영혼은 점점 황량한 빈들처럼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도시 문화는 그렇게 현란하고 화려한데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이 말씀처럼 이 시대는 갈수록 도덕적으로 황량한 빈들이요, 영적으로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누가 과연 양떼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 각자를 지목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너희가 이 시대를 책임져라!” “너희가 이 시대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 시대를 향한 주인의식을 갖도록 촉구하시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 시대 양무리를 향한 책임의식, 주인정신, 목자의 심정! 이것이 바로 기적의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2. 작은 헌신, 큰 기적
그런데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우리가 가서 이백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시자 가장 먼저 5천명의 무리들을 먹이기에 필요한 돈의 액수를 계산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의 대답은 그들에게 2백 데나리온이라는 거금이 없기 때문에 무리들을 먹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없는 2백 데나리온만 생각할 때, 도저히 무리들을 먹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결국 “먹일 수 없다" 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3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은 무리들을 먹이는데 있어서, 없는 이백 데나리온의 돈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있는 것,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찾아보지도 않고, 자기들에게 없는 것, 자기들이 할 수 없는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별 볼일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을 먼저 찾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돌아가서 있는 것을 찾아보았을 때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오병이어! 물론 이것은 5천명이라는 거대한 무리 앞에서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미약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분의 식사량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 앞으로 들고 나아갔을 때 어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다같이 41-44절까지를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들고 나온 오병이어를 하찮게 보시고 멸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오병이어를 귀하게 영접하시고 그것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꼬투리로 5천명의 무리들을 먹이시는 기적의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기적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오병이어를 적극적으로 주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이란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적은 헌신이 큰 기적을 가져왔습니다.
3. 생명의 떡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단순히 예수께서 조그만 떡 다섯 덩어리와 절인 두 마리 물고기(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이 되는 많은 무리들을 먹이셨다는 기적만을 강조하기 쉽습니다. 즉 예수님을 언제든지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도 먹을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 쯤으로 부각시키는 것으로 그칠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해석하고 계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6:47-4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또 6:53-54절에서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오병이어의 사건은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기적의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친히 속죄양이 되심을 내포하고 있는 표적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사건을 통해 그분의 살과 그분의 피가 우리에게 하늘의 생명, 곧 영생을 주는 하늘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부스러진 그분의 몸과 흘린 피가 우리 죄를 씻어 주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 영생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하심과 충만하심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곤핍한 나라가 아닙니다. 영광 가운데 넘치도록 풍성하고 부요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상속 받은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후 4:8-9)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눈에 보이는 화려함을 좇는 세상은 기독교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에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는 우리는 때로 예수 믿는 자라는 사실을 감추거나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생명의 떡을 나누어 줄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그 떡을 나누어 줄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이 생명의 떡으로 배부른 자들입니다. 이제 세상에 이를 나누어 주는 일에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생명의 떡이 되어 우리에게 떼어 주셨듯이, 이를 위해 한 알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듯이, 우리도 이 생명을 전할 때 수많은 영혼들을 열매로 거두어들이는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또 나누어 주는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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