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 받는 어머니의 믿음 (05.12.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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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칭찬 받는 어머니의 믿음 (05.12.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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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140회 작성일 May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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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5월 12일
본문: 마가복음 7:24-30
제목: 칭찬 받는 어머니의 믿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오늘 본문에는 너무나도 감당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어린 딸이 갑자기 더러운 귀신에 들려서 고통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고쳐 보려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였겠습니까? 천신만고 끝에 예수님께 나아갔건만 예수님으로부터 심한 모멸감을 주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 절망과 분노와 상처로 말미암아 낙담과 슬픔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이대로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너무나도 지혜롭게, 담대하게, 현명하게 잘 대처하였습니다. 결국은 예수님도 그 여인의 믿음과 인격에 깊이 감동을 받으시고, 그녀의 인생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시며 그 믿음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말씀을 통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과연 어떻게 이 현실을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야만 하는가? 또한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자세로 나아오는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가? 이 시간에 우리 모두 칭찬 받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두로 지경에 이르러 한 집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두로는 당시 뵈니게(페니키아) 지역, 즉 갈릴리의 북서쪽으로 4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지금의 레바논 지역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로의 위치가 어디인가가 아니라, 여기는 이방인 지역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보기에 부정한 지역이었기에 가기를 피하는 곳이었는데 예수님은 그곳에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찾아왔어요. 그리고 그 발아래 엎드려 제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이 여인에 대해 26절에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밝힙니다. 중동 지역에는 헬라 문화가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었고, 많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곳에 이주해서 살았습니다. 특히 뵈니게(페니키아) 지방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은 헬라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이 여인처럼, 헬라인이면서 수로보니게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약 이 여인이 헬라인이었다면 당시에 개화된 여성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집안의 아녀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수로보니게에 해당되는 페니키아 지방은 항구도시 시돈과 두로가 위치한 지역으로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여인도 어린 딸이 귀신 들린 문제만 아니라면 아무 부족함이 없이, 아무 아쉬울 것 없이, 여가활동을 즐기며, 유유자적한 귀부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상류층 여인들과 어울려서 쇼핑도 다니고, 골프도 치러 다니고, 황토찜질방에 이르기까지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여인이면 돈도 많겠다, 자녀들 교육에 또 얼마나 신경을 써서 도왔겠습니까? 방학 때면 발레, 고전 무용, 피아노, 미술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것은 다 시켜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찾아온 사람에게 딸 자랑을 합니다. “쟤 좀 보세요. 제가 우리 딸이예요. 참 예쁘죠”하며 스스로 감격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던 딸이 무슨 이유에선지 어느 날 부턴가 더러운 귀신에 들려 눈동자가 돌아가고,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하며, 괴성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도 몰라보고 달려들어서 물어뜯고, 때리며,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 난리를 피웠습니다. 이런 딸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어요? 여인은 딸 문제로 인해서 항상 마음이 어둡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에게 있어서 이 자녀들의 문제는 가장 예민하고, 감당하기 힘든 아킬레스건과도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자식문제로 인해 말 못할 아픔과 고민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마 이 여인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당한 상황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향해 달려 나와 그 발 아래 엎드려 간절히 간구한 것입니다. “주여! 저의 딸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처럼 딱하고 안타까운 사연을 가지고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세상에! 어떻게 그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긍휼이 충만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처럼 거룩하고 고결하신 예수님의 입에서 어떻게 ‘개’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연약한 여자에게! 더구나 딸이 귀신들려서 그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 불쌍한 어머니에게!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매우 부정적이고 험한 표현을 쓰셨을까요?

당시 유대사회에서 ‘개’는 유대 주변 이방 족속을 표현하는 말로 돼지와 함께 ‘더러운 동물’의 대명사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는 항상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적대적 개념이고, 그것이 한 개인에게 쓰였을 때에는 매우 혐오스럽고 경계해야 할 존재임을 나타냈습니다.(삼하 16:9, 시 22:16, 빌 3:2 참조) 중요한 것은 이런 혐오스럽고, 더럽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인 ‘개’를 예수님이 직접 이들 모녀를 향해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도저히 이해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 여인에게 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런데 여인은 이때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28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아! 이 얼마나 겸손하고도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이 여인의 예기치 않는 대답에 예수님께서도 너무나 큰 감동을 받으시고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인간의 중심을 친히 아시는 예수님은 좀처럼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 마음 속에 있는 사악함을 아시기에 칭찬도 많이 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너무나 큰 감동을 받으시고, 즉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여인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토록 예수님께서 큰 감동을 받으시고, 즉시 여인의 딸을 치료해 주신 것일까요? 우리는 이 여인으로부터 칭찬 받는 믿음의 세 가지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겸손한 믿음이 칭찬 받습니다 

개로 취급 받은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Yes Lord' 이 말의 뜻은 ‘주여, 제가 개라는 말이 옳습니다’ ‘제가 바로 개입니다’ ‘제가 바로 개처럼 비천하고 자격 없는 죄인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발하거나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떡거리며 대답하였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여인은 자신이 얼마나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비천한 존재인가 겸손히 인정하였습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서 주님 앞에 함부로 나갈 권한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겸손한 자기인정!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나아가서 도움을 청할 때 이 여인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신앙적 자세가 있는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도 이 여인처럼 아쉽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서 간절히 구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주님께서 당연히 저에게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셔야 된다는 자기주장을 갖고 있습니다. 나보다 열심히 안 한 사람도 축복을 해 주셨는데 그렇다면 나에게는 더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누가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의 은혜를 받을 만큼 충성을 다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달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마음이 상한 자에게, 애통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반면에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걸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내려주면 필경 교만해 지고 끝내 스스로 화와 저주를 불러들여 파멸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천한 존재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인가? 하는 사실을 먼저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잔인한 말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기발견을 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비참하게 느껴질지라도 주님 앞에 나의 죄인 된 모습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자기 자존심이나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구원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인정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5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바로 이처럼 겸손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져야 할 자세는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자격 없는 죄인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주님께 나아가므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주님이 칭찬하는 신앙의 자세는 겸손입니다.

둘째로,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이 칭찬 받습니다

주님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여인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낙심하거나 화를 내고 일어나 돌아가던지, 아니면 거기서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믿음을 굳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던지, 이 둘 중에 하나를 취하게 하는 분기점에 다닿은 것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가장 절망적인 말씀인데 여인은 여기서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것이니라” ‘먼저라는 것은 일의 선후의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내 차례가 되지 않겠는가?’하고 사고한 것입니다. ‘아, 그러면 먼저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하고, 그 다음에는 저에게도 돌아올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부스러기를 저에게 지금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런 논리로 여인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인은 “아니, 왜 내 자존심마저 건드려요”하고 폭발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에 부적합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을 붙잡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자격이 없는 죄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개들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정도는 먹을 자격은 있지 않습니까’하며 개 같은 자신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즉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상처를 받기보다, 오히려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굳게 붙든 것입니다.

때문에 여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과감하게 주님께 나아가 부스러기의 은혜를 간구하였습니다. 단지 상 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 몇 조각을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붙들고 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기초로 간구할 때 그 기도를 기뻐 받으시고,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서 중도에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믿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상 아래 부스러기 정도가 아니라 충만한 은혜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30절을 보면 여자가 집에 들어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겸손하면서도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그 딸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내하는 믿음이 칭찬 받고 여기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셋째로, 순종하는 믿음이 칭찬 받습니다 

 29절에서 예수님이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내 딸이 나았는지 않았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하지 마시고, 직접 저희 집에 가서 귀신을 쫓아주세요.’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런 줄 알고 신뢰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30절)

예수님을 만난 후 여인은 더 이상 딸이 낫고 안낫고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딸이 귀신에 들려 있어도 이제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치유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집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것입니다. 믿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예수님의 말씀대로 문제가 해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이 칭찬 받습니다.

결론:
우리는 여인을 통해서 겸손하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믿음이 칭찬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자비로우신 주님이 왜 유독 이 여인에게 그런 모진 말씀을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이미 딸로 인해 충분히 고통 받고 있지 않는가? 이를 주님이 모르실 이가 없을 텐데 왜 모욕적인 말로 그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을까? 감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을 하시다니…과연 주님이 자비로신 분이 맞아?

우리도 때로 다급한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하며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때,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날 정도로 오랫동안 침묵하실 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본문의 여인에게처럼 우리를 너무나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시기까지 합니다. 우리를 사람을 앞에서 그냥 시궁창에 쳐 박아 버리십니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찌니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때 우리는 주님께 대해서 서운한 마음과 반발심이 생기기 쉽습니다. “도대체 누구는 자녀고, 누구는 개란 말인가?.” “왜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분이라고 하시면서 사람을 이렇게 차별 대우 하시는 건가? 이런 하나님을 내가 꼭 믿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존심이 팍 상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자신이 개처럼 취급을 당하시고 비참하게 개처럼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던,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 밖에 있던 우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놀라운 선물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멸시, 천대, 미움, 배척 가운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다윗은 시편 22편에서 사람들에게 개 취급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시 22:12-21)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한 마디로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개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은혜 밖, 축복 밖에 있던 우리를, 소망이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과 축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습니까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놀라운 일을 성취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와 사랑을 깨달으면 겸손하며 인내하고 순종하는 믿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 배우고,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우리 부모들이 큰 믿음을 소유하여서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자녀들을 생명과 축복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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