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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03.10.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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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59회 작성일 Mar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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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3월 10일
본문: 마가복음 5:1-21
제목: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지금까지 세계 역사상 우리는 가장 발달된 기술문명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만큼 생활이 편리해 졌습니다. 그리고 경제의 발전과 사회 복지제도의 향상으로 인해서 삶의 질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만큼 만족도과 행복도가 높아져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렇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성히 누리고 있는데 정신적으로는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일까요?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원인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인터넷의 발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얼마전 미국 상위 1%의 부자들의 부가 중산층 인구 전체의 부를 초가했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뉴스가 우리 현실에 그리 피부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인터넷과 SNS,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 상류층이나 연예인들의 사치스러운 삶의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고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지며 불행하다고 느끼게 하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매스 미디어와 인터넷이 발달하기 이전에는 상류층과 저소득층이 서로 접할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오프라인에서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습니다. 상류층 사람들은 보통 자기들끼리 모여 살기 때문에 저소득층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저들이 잘 산다 정도로만 알지 실제로 그들의 사는 모습을 접하고 충격을 받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반감이나 상대적 박탈감을 덜 느끼게 됩니다. 주변에는 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그런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온라인은 이런 벽을 무너뜨려 버렸습니다. SNS는 고소득층, 특히 연예인들이나 프로 운동선수들의 화려한 라이프 스타일을 편집하지 않은 채로 자기가 직접 공유하게 만들어서 상류층과 저소득층을 눈앞에 마주 보게 만들었습니다.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 러시아 혁명군이 황궁에 들이닥친 다음에 궁전이 엄청나게 호화로운 것을 보고 넋이 나갔다고 하지 않습니까. SNS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드라마, 영화, 뉴스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보여 줬습니다. 그건 있어도 극히 드문 경우라 여기고, 또 가공 된 이야기 판타지일 거라는 핑계라도 있어서 충격이 덜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TV 드라마나 영화가 젊은 이들의 허영심을 부추겨서 문제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SNS이 아주 날것으로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우월함과 없는 자들의 열등함을 확연히 느끼도록 합니다. 그것을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으로 무장해제가 되었습니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허영심에 빠져 그대로 모방합니다. 나머지는 자신이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라는 사실에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특히 MZ 세대라 부르는 젊은 세대는 아예 내일을 준비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기 위해 삽니다. 맛집이나 유명한 카페에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긴 줄 뒤에 섭니다. 내가 여기 왔다는 사진 한 장 찍기 위해서 입니다. 진짜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세상의 허탄한 것과 허영에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치장한 모습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속이며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군대 귀신에 지핀 거라사인 광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하신 그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도대체 너는 누구냐?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살아왔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이름의 존재입니까? 여러분은 지난날 어떤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힘과 노력을 더 믿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위치, 성공, 부를 더 의지하였습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소망을 두었습니까?

세상은 악한 영들의 역사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크게 혼미해 있습니다. 마귀의 역사로 영적 흑암 속에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고 삽니다. 복음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비춰야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후 4:3-4)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를 올바르게 아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외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추는 것처럼 우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때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가 술술 풀려지듯이 우리의 헝클어진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비로소 술술 풀려지게 됩니다. 진리의 빛이 비취고, 어두움의 세력이 패퇴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 내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내 아픔을 해결해 주시고,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회피하지 말고,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도 울려 퍼져서 악한 영들과 세상의 거짓과 허영과 탐욕의 덫에서 벗어나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참된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거라사인의 광인

오늘 본문에는 귀신의 종이 되어 고통 당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무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무덤지기가 아닌 이상 무덤 사이에 거처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무덤은 음산하고 무서운 곳인 만큼 죽어서 가는 곳입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죽어서 무덤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살아서는 될 수 있는대로 무덤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예 무덤을 거처로 삼고, 거기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의 문제는 바로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군대 귀신입니다. 그만큼 절망적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하나님의 영,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영(living being)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7).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밝고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귀신의 영에 사로 잡히게 되면 어둡고 음란하고 더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줄 압니다. 그러나 귀신에 들리게 되면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자제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비상식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아무에게나 덤빕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제어하기 위해서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 두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을 깨뜨리며 날뛰는 그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돌로 자기 몸을 상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족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귀신은 근본적으로 미움의 영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귀신은 이처럼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주변에 다른 사람들까지 괴롭히고, 마침내는 온 세상을 파멸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이 그 속셈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도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하여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은 끊임없이 음란하고, 폭력적이고, 부패한 문화를 퍼뜨림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더럽히고, 분열시키고,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사단의 세력에 사로잡혀 귀신과 동행하며, 귀신의 조종을 받으며, 원치 않게 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2. 그리스도의 권세

그러면 이 거라사인의 광인을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8절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사람들처럼 쇠사슬과 쇠고랑 등 무서운 기구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의 세력, 곧 사단의 세력과 싸우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은 심하게 반발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 내시는 장면이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명하여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고 명하면 즉각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경우만 귀신이 안 나가고, 예수님께 제발 가만 놔두라고 사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이 귀신이 보통 귀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어떤 조치를 취하셨습니까? 9절입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물으신 것은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해서 물어 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사정을 하던 귀신이 도저히 안되겠는지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나의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귀신의 세력도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길 수 없습니다. 밝은 빛 앞에 모든 것들이 샅샅히 다 드러나듯이,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그 어떤 간교하고 교활한 마귀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그 정체가 백일하에 다 폭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한일서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근본적으로 어두움의 영입니다. 그 어두움의 영이 제 아무리 강력하고 무섭게 보여도 빛 앞에서는 꼼짝하지 못합니다.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후10:4).

사람은 누구의 권세 아래 있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집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더 이상 흑암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권세 아래 있게 됩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구원은 바로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더 이상 마귀의 권세가 미치지 못합니다. 사랑의 왕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악한 자가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습니다.

더구나 더 놀라운 축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잊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이상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엄청난 권세가 있습니다. 그분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에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권세를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한 영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세를 행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 오늘날 그 어떤 마귀 사단의 세력이라 할지라도 능히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군대 귀신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탐욕귀신, 안일귀신, 정욕귀신, 음란귀신, 시기심귀신, 교만귀신, 열등감귀신, 도박귀신, 알콜귀신, 마약귀신, 절망귀신들을 능히 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보혈의 권세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인간성 회복

15-18절까지는 거라사인 광인이 제 정신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나옵니다. 이제 단정히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환해진 얼굴로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날뛰던 광인이 지금 본래의 형상을 되찾은 그의 모습은 마치 야수가 마법에서 풀린 왕자처럼 아주 밝고 늠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귀신 들려서 짐승처럼 살던 한 광인의 참 모습을 되찾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와 전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물으신 것은 자신이 본래 어떤 자였는데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질문입니다. 거라사인 광인은 귀신 들려서 자아를 상실하였습니다. 귀신이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에 그는 주체성을 상실하였습니다. 그가 무덤 사이에서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귀신이 그 속에서 역사하기 때문이지 본래 그의 모습이 절대 아닙니다. 귀신의 세력 때문에 원치 않게 괴성을 지르며 강포하고 흉칙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의 참된 자아를 분명히 보셨을 것입니다. 어서 속히 귀신의 속박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거룩한 영적 소원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회복시키시고자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왕같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위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으로 영화로운 존재입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에 살고 있던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난 후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이름을 잃어 버렸습니다. 행복을 줄 것처럼 유혹하는, 돈과 명예, 권력, 쾌락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사단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단의 마귀적인 인격적 영향을 받게 되었고,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아분열적이며, 파괴적이고, 더럽고, 저질이며 연약하고, 천박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귀한 목숨을 대속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인생들은 과거 어떤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었든지 상관없이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거룩한 하나님 백성”,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 등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 아래서 참된 자아를 잃고서, 비참한 사람을 살 수 밖에 없던 우리 인생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을 찾게 해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립니다.

결론:
주님은 지금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어두운 곳에서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악한 영의 세력에 사로잡혀 세상의 방탕에 방임하여 온갖 더러운 욕망에 이끌려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쇠고랑에 차이고, 쇠사슬에 묶여서 이성 없는 짐승처럼 날뛰지 않습니까?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어서 돌로 자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께 나오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 현재 나의 이름을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은 나를 구하기 위해 귀신의 세력과 싸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악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고 참된 자아를 찾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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