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03.17.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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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03.17.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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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22회 작성일 Mar 18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3월 17일
본문: 마가복음 5: 25-34
제목: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늘날 현대인들이 갖는 모든 문제의 원인에는 과도히 자기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다는데 있다고 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가 우리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현 우리가 겪는 사회적 문제와 모든 인생들의 불안감이 어디서 오는가, 공허와 허무감에 사로잡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는 근본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이것과 관련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두통약과 신경안정제, 불면증 약을 복용하고, 심지어 술과 마약까지 손을 대는 것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언제나 me, me, me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합니다. 자기가 복 받아야 하고, 자기가 형통해야 하고, 자기가 성공해야 하고, 자기가 건강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하는 동기이자 목적입니다. 우리가 이것 외에 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나친 자기몰입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침체와 낙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사는 언제나 부수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생각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인간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십시오. 인간으로 부터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시는지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 최종적 목적이 우리를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에 까지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밝힙니다. 이를 위해서 삼위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우리를 위해 구원의 일을 행사하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셨는데 이는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6절)고 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게 하여 구원하여 주셨는데 이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절).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하여 주셨는데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14절)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개입하십니다. 우리를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으로 일하십니다. (엡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와 작정이 있기에 자연히 우리 인간의 생각과 의지와는 충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미치지 못하고, 이를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순복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경에 명확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교만이 이에 순종하고 순복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롬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늘상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구원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린 것이라면 100퍼센트 우리는 실패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의지와 열심를 가지고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며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나타나는 여러가지 고난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작정된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의 많은 고난과 연단을 거쳐서 점차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이에 순복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영광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선하심을 믿기에 그분의 주권과 섭리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믿기에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정상적으로 발휘될 때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강제하시거나 강요하시며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과 신앙, 우리의 선택과 결단 등을 통해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한 여성이 비록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지만 주님은 이를 얕보거나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를 격려하시며 더 큰 믿음의 담력을 가지도록 도와주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인생의 비참

오늘 본문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께 와서 자기 딸이 중한 병에 걸려 죽게 되었으니 가서 안수하여 달라는 간청에 그곳을 향해 가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사건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무리 가운데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통 받던 여인입니다. 혈루증이란 하혈하는 일종의 부인병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율법(레위기 15장)에 근거하여 부정하게 보는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접촉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도 나올 수 없었습니다. 여인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왔는지, 결혼한 이후에 이 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 결혼 후에 이 병으로 인해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고, 결국 남편으로 부터 소박 당하여 쫓겨났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아주 비참하게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극단적 선택의 충동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 마음속으로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왜 내 팔자는 이토록 기구한가? 나도 다른 여인들처럼 외모도 아름답게 가꾸어 남편의 사랑도 받고 싶고, 아이들도 낳아 키우며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

여인에게 있어서 아름다워지고 싶어하는 욕구와 행복한 가정을 갖고자 하는 갈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여인도 어찌하든지 병을 나아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되찾기 위해 유명한 병원은 다 찾아가 보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아마도 이전에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의원들을 찾아가 각종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다 썼지만 그 어떤 처방도 효험이 없었고, 도리어 병은 더 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속히 병을 나아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되찾고자 했던 소원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2. 겨자씨만한 믿음

그러던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자들을 고치시며 심지어 귀신들도 쫓겨 나간다는 소문입니다. 그분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메시아일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여인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비추었습니다. 왠지 그분께 나아가면 자신의 문제도 해결될 것같았습니다. 메시아라면 자신의 불치의 병을 능히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가버나움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에 그녀는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길거리에 나갔습니다. 저기 예수님이 큰 무리에 에워싸여 가십니다. 중한 병으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온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좇아갑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아무도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 무리 가운데 들어갔습니다.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살짝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여인의 믿음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 주고 있습니까? 28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반면에 5장 23절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보여준 믿음은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내 딸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셔야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내가 예수님께 나아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낫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사실 그녀는 예수님에게 특별 면담을 요청할 만한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제 재물도, 돈도, 연줄도, 집안 배경도, 사회적 지위도 없었습니다. 병도 부정하다는 유출병이라서 사람들 앞에 드러내놓고 도움을 청하기조차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청할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내가 그분께 나아가면 되지, 그분에게 특별 안수기도 받지 못한다면 내가 그분의 옷을 만지면 되지, 참으로 소박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능력의 근원이 되시고,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그분께 살짝 터치만 해도 그 분의 능력이 나에게 치유로 역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3. 믿음의 결과

그래서 그녀는 필사적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병이 조금씩 호전된 것이 아니라, 단번에 싹 나아 버렸습니다. 아예 병의 근원 자체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100% 완전히 치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아마도 그녀는 온몸에 소돔이 돋는 것처럼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너무도 기쁘고 감사해서 감격에 벅찼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또 다시 살짝 빠져 나가고자 하였습니다.

사실 그녀에게 일어난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녀에게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제자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아시고, 무리 가운데 그녀를 찾으십니다. 물론 여인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시선을 피하지 못한 그녀는 두려워하여 떨며 나왔습니다.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다 아뢰었습니다.

이런 여인을 향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34절) 얼마나 자애롭고 따뜻한 말씀입니까? 은혜로운 이 말씀에 여인은 감격과 감사로 울컥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쏟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물론 여인의 병을 고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소박하고도 단순한 믿음을, 그래서 아주 적극적이고 창조적이었던 믿음을 깊이 인정하시고 칭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베푸시는데 있어서 우리에게서 다른 것을 보시지 않습니다. 사회적 지위, 학력이나 외모, 재산 유무를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4. 믿음의 도전

우리는 어떤 점에서 영웅적인 신앙생활을 꿈꿉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신앙의 용사처럼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능력이 나타나고, 역경을 거뜬히 뛰어넘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현재 내 모습을 돌아보면 그리 신통치 못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뛰어 넘기는커녕 문제에 빠질 때마다 허우적거립니다. 고난 속에서 기뻐하기 보다는 자기연민에 빠지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동일한 죄를 반복해서 짓습니다. 그런 내 모습이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과연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라도 신앙생활을 계속 영위해 갈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근본적으로 새롭게 다시 출발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살며시 빠져나가려는 여인을 다시 부르시는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숙고해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은 여인을 찾으셨던 것일까요?

  1) 예수께서 여인을 불러내신 이유는 혈루증을 고침 받은 여인이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는 공식 선언을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유출병은 부정하다는 율법으로 인해 그녀는 공적 자리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종교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육체의 고통도 물론 힘들지만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그녀가 부정하다고 취급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 또한 아브라함의 후예이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하고 축복하십니다.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음식이 상하면 먹을 수 없습니다. 미련없이 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죄는 우리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부정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죄가 우리를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합니다. 단 한 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부정하다고 정죄 받지 않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패배하고 죄에 무너졌다고 해도 우리는 더 이상 정죄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지배하는 은혜의 영역에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2) 예수님은 병고침을 받기 위해 살며시 찾아왔다가 고침을 받은 후 슬며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두 번째 이유는 그녀가 더 이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단절된 가운데 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수치스러운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으로부터 고립되어 소외된 채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무리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옷을 만졌더니 내 불치 병이 온전히 고침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다’ 이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사귐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주의자의 기준에 의하면,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부정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은 이미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엡 2:11-13, 19-20)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뽑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유대인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방인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통잇돌이 되십니다.”

이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과 축복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 속에 축복 받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하고, 초라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여 비참한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복을 기억하고 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영광스럽고 부요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유업을 받을 자들입니다. 

  3) 예수님이 여인을 그냥 보내지 않고 찾으신 세 번째 이유는 그녀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분의 임재와 능력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고, 죄의 용서를 확신하게 하여 하나님을 단 마음으로 섬기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 심령 속 깊숙히 파고 들어 새 삶의 용기와 기쁨을 안겨 주고, 새로운 감격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 여인도 이 축복의 말씀을 듣고서 이제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의 고난이 와도 용기 있게 헤쳐가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우리 인생을 소중히 여기셔서 꺾지 아니 하시고, 끄지 아니하십니다.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렇게 우리 주님은 자비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여인의 병든 몸을 고쳐 주시며 축복해 주신 것처럼 우리 인생을 고쳐 주시고 복되게 하십니다.

  4) 예수께서 가신던 길을 멈추시고 여인을 부르신 네 번째 이유는 그녀의 믿음의 행위가 지닌 가치를 확인해 주시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믿음은 그저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스치면 낫겠다라는 지극히 소박하고도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통해서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마 17:20)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성경지식만 자랑했지,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곁에 모시고 다녔지만 광풍 앞에서도 두려워 벌벌 떠는 믿음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2년이나 혈루증을 앓아 온 이 여인은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믿음을 배우도록 그 여인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설령 성경공부를 많이 하고, 기도생활에 열심이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 가지가 부족한 자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와 주님과 터치를 할 때 주님의 무한하신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주입이 됩니다.
믿음은 그래서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처럼 작아서 보잘 것 없지만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이시고, 만유의 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결론:
그런데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인에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던 그 현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며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았을 것이고,  악수하였을 것이고, 집으로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아니 적어도 예수님의 옷에 스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일으키신 치유의 능력을 친히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여인처럼 자신의 문제를 안고서 절박한 심정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던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의 열쇠를 쥐고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들은 믿음으로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일까요?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아니면 고의로 기회를 붙잡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 인간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주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중심적이어서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완전한 통제와 다스림을 그분께 드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는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며 죄 속에서 그대로 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내려놓고, 전심으로 예수님을 붙들기를 거부합니다. 성령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게 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살아왔던 그대로, 죄를 즐겨왔던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했고, 그 사실을 끝까지 은폐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살던 그들은 빛을 비추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한 자신들의 마음이 편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 엄습해 오는 죄책감을 처리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누리고 있던 죄를 마음대로 누리려면, 예수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다양한 이유를 갖다 댑니다. 교회가 썩었다, 그래서 돈만 밝힌다, 사랑이 없어서 냉냉하다, 설교가 형편 없다, 교인들이 모두 위선자들이다, 교회가 사람 차별한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들을 대면서 믿기를 거부합니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사실을 담고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교회에 여러가지 문제가 많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외적인 이유들이 실상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서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 일어날 일들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 삶이 불편하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며 세상에서 즐겁게 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것을 송두리채 뒤집어 엎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하면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유행에서 빠져 나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회개가 필요한데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자신의 무한한 욕망과 욕정, 길들여지지 않은 충동에 따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또한 이 여인처럼 영적으로 절박한 상태는 아닙니까? 영적으로 볼 때 아무 쓸모가 없는 상한 갈대가 아닙니까? 어둠을 환히 비추지 못하고 꺼져가는 등불처럼 심지가 그슬려 연기만 심하게 내는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여인처럼 믿음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 주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를 둘러 보십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에도 상한 심정으로 전심을 다해 주님을 붙들고자 하는 자를 은밀한 중에 찾아오십니다. 만나주십니다. 은혜를 입혀 주십니다. 이 은혜의 주님을 믿음의 손을 내밀어 붙잡는 우리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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