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믿음이 없느냐 (03.03.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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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어찌 믿음이 없느냐 (03.03.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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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81회 작성일 Mar 04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3월 3일
본문: 마가복음 4: 35-41
제목:어찌 믿음이 없느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제가 손님을 모실 때 가끔 카멜 다운타운으로 갑니다. 그곳은 도시의 획일화된 빌딩건물에 식상한 분들에게 옛날 목수들이 건물 하나 하나 독특하게 지어서 쉽사리 싫증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그곳에는 화랑이 많아서 공짜로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름다운 작품을 바라보면서 감탄하지만 더욱 놀라게 만드는 것은 거기에 붙여진 가격표 때문입니다. 아직 속물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보통 가격이 수천 수만 달러가 기본입니다. 사실 대가가 그린 그림은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과 땀으로 만들어진, 어찌 보면 자신의 분신과도 같아요. 그래서 얼마나 소중히 다룹니까? 세기적 작품은 도둑이 들까봐 엄중하게 경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본래 우리도 하나님의 고귀한 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 아주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고대 사회에서 형상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그대로 본떠 만든 주형물이나 조상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초상화를 그리면 실제 인물을 그대로 본떠서 그렸기에 실물과 똑같이 취급합니다. 독재국가에서는 독재자의 초상화를 깎듯이 모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우리 인생을 만드셨어요. 동물이나 식물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만들지 않았어요. 존귀하신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특징 중에 한 가지는 통치권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시고, 그래서 만유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그 통치하는 권한을 우리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우리를 자연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쓸 그 시대에는 이런 사상과 생각이 대단히 혁명적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오직 왕만이 신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여겼습니다. 일반 서민이나 농민들은 얼마든지 짓밟아버려도 괜찮은, 아주 무가치한 존재로 알았어요. 이집트에서 바로는 태양의 아들로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 예배의 대상이 될 만큼 절대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온 백성이 바로 이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 국고 성을 높이 쌓고, 농사를 짓고, 한평생 고생고생하고 살다가 허무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노예습니다. 참으로 아니꼽고 더럽고 치사한 삶이었지만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감히 항거할 수 없었어요. 노예들은 인간으로서 어떤 존엄성이나 존경 받을 만한 가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한 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창세기를 기술하면서 이런 거짓된 사상과 종교를 단호히 배격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왕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거예요. 극소수 몇 사람에게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런 존귀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단의 노예가 아니라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존귀한 존재라는 진리를 우리는 까맣게 잊고 삽니다. 복음을 믿어 자유인이 되었지만 정작 아직도 노예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물론 영적 무지 속에 사는 세상 사람들은 응당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자신이 자율권을 가진 자유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노예처럼 환경에 지배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세상 풍습과 유행을 따라서 오늘은 이것이 좋아서 따라가고, 내일은 저것이 좋아서 좇아갑니다. 자기 주체성이 없는 것이지요. 세상이 주는 가치관과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의 가치를 돈이나 재물, 교육, 외모, 직업, 사회적 지위 등등 성공여부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게 바로 출애굽하지 못한 노예정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게의 경우 가진 사람, 잘 난 사람, 강한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요. 그러다가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을 만나며 무시하거나 사정없이 밟아버립니다. 이렇게 조건과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하는 모습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이런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그때 환경과 여건에 따라 우왕좌왕하고 있어요. 바다에서 광풍을 만나서 곧 죽을 것 같은 상태가 되자 믿음 없는 자처럼 행동합니다. 두려운 나머지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하고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세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하게 되자 이번에는 경외함에 사로잡힙니다. 41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제자들이 이 두 마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기적을 일어나는 현장에서는 외경심은 가지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다가 현실적 어려움이나 긴박한 일이 일어나면 그만 두려운 나머지 요동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때마다 압도 되었어요. 그런데 그 말씀과 사건을 접하면서도‘도대체 이 분은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가?!’하는데 출발하여 더 깊은 사색을 통해서 예수님께 대한 새로운 각성과 인식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더 깊어져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문을 열고 거대한 세상으로 나가면 자신이 한없이 왜소하게 느껴집니다. 믿음대로 말씀대로 살겠다는 자신감이 사라져버립니다. 특히 이해관계에 걸린 문제에서 쉽사리 믿음의 길을 포기해 버리고, 세상적인 판단과 선택을 해버립니다. 인생의 환란과 시련을 만나면 사정없이 흔들리고 맙니다.

기독교는 현실적입니다. 우리는 상상속의 비현실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을 다룹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 또한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현실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내 삶의 정황에서 믿음이 발휘되어야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믿음이 견고하게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1. 믿는 자에게도 광풍은 찾아온다

“저 편으로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여 예수님을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런데 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나요?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 저편으로 가자하여서 이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모시고 가는데 광풍이 일어난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호수)는 길이 15마일, 폭 6마일 쯤되는 내륙의 호수입니다. 만년설이 있는 헐몬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으로 흘러 들어오고, 여기서 흘러나온 물이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들어갑니다. 갈릴리 바다의 주변은 아주 풍광이 아름답고 땅이 비옥합니다. 그래서 농산물이 풍성합니다. 예수님은 지상 사역의 기간 동안에 이곳을 중심으로 가장 많이 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는 해면 수위보다 6백 80피트가 낮은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고, 주위 대부분이 산과 절벽으로 에워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갑작스런 광풍, 또는 돌풍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비좁은 협곡 사이에 바람이 격렬하게 몰아쳐서 이 호수를 비스듬히 때려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 돌풍은 깊은 물 속까지 뒤집어 놓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또 함께 동행하는 축복을 받았는데도, 갑자기 광풍대작하는 파도로 인해 곧 죽을지도 모르는 위경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우리 성도들이 가는 길에도 풍랑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하는 길이라고 만사 형통하여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모든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면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환란 중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건져 주실 것을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어떤 환란에 봉착할지라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위태한 곤경에서 우리를 구출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어떤 풍랑이 일어날까요? 첫째로, 유혹의 풍랑이 있습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유혹의 파도가 우리를 엄습해 옵니다. 돈 욕심, 명예 욕심, 이성의 유혹이 홀연히 사로잡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길이 은밀한 곳까지 지켜 보고 있음을 깨닫고 의식한다면 혼자 있더라도 부끄러운 일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격정적인 죄의 충동의 유혹이 있습니다. 사람을 한 순간에 범죄하여 스캔들에 빠지는 것은 순간적이고,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기질과 성격으로 말미암을 때가 많습니다. 한순간의 충동적 행동으로 인해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 얼마나 세상에 많이 일어납니까? 셋째로, 걱정과 두려움의 풍랑이 덮칩니다. 사단과 세상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염려하게 만들고, 핍박으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빠지도록 위협합니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도 인생에 폭풍이 몰려오고 풍랑이 엄습해 옵니다.

2. 광픙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광풍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서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은 풍랑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 믿음이 검증되고 단련 받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적어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전직이 어부입니다. 한평생 이 바다에서 물고기 잡으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 익숙합니다. 이곳에서 잔뼈가 굵었고, 여기에 대한 지식이 있고,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도 있고 경험도 있는데도 광풍이 일어나자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전직이 어부가 아니고 목수입니다. 바다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바다에 대해 문외한이신 예수님은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곤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이 풍랑 속에서 고요함 가운데 계십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이고, 바다를 모르는 분은 편안히 자고 있어요.

왜 그랬을 거 같습니까? 제자들은 그동안 바람과 싸워본 일도 많고, 바람에 대한 지식도 있고, 풍랑에 대해서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이 광풍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과거에 이런 풍랑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경험과 자기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을 만나면 쉽사리 손을 놓고 맙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한 번 더 숙고해 보세요. 자기의 경험, 자기의 지식 안에서 용기를 내기도 하고, 절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 예외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가 현재 당면한 문제를 내 자신의 지식과 내 자신의 경험과 내 자신의 의지의 한계 안에서 풀이하고 해석하려다가 이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면 두려워하거나 절망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배 안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제자들의 눈에는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진실한 모습이 가려져 있습니다. 정말 깨어나야 할 분은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영적으로 깨어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하나님께 자신을 다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광풍이 몰아쳐도, 곧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위기 속이라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면 어떤 환란과 역경이라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좌절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광풍이 대작하는 가운데서도 평안히 잠들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이 믿음의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지금 믿음이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폭풍의 위기는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빈약하고, 그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지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 안에 갇혀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것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현실에서 발휘되어야 하는지에 무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두고서 사람들이 무서워한다고 책잡힐 일이 아닙니다. 지금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되고, 곧 뒤집힐 것 같은 “아이쿠 이제는 영락없이 죽겠구나”하는 상태인데 “왜 무서워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마땅히 신앙을 가질 만한 여러 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무서워서 벌벌 떤다면 책잡힐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입니다. 그분이 지금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믿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광풍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던 우리의 참모습이 풍랑이 일어날 때 드러납니다. 평소에는 넉넉해 보이던 믿음의 뿌리를 드러내 보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추에 올려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의 푹풍을 만날 때까지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광풍이 치니까 그 뿌리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광풍은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3. 풍랑을 잠잠케 하는 예수님

제자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안전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명하시면 바람이 풍랑이 순종합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마치 우리 주님이 교회 안에만 계시고, 그래서 교회만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확실하고 역사하는 것 같은데 세상 밖으로 나가면 그만 움츠려 들어서 세상속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세상 처세술로 살고자 합니다. 마치 세상에는 주님이 다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실패가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분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 그리고 권세자들 모두가 성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고난에 봉착할 때 낙심하여 주저 앉거나 뒤로 물러 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전능하신 분을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모신다면 우리는 염려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붙잡아 주시며 나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에서 문제의 답변을 줄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현실적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영적 흑암속에서 우리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그저 환경에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습니다. 웃다가 울고, 기고만장하다가 의기소침하고, 자신만만하다가 낙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렇게 변덕스러웠던 내 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 삶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신앙세계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과 통찰력을 줍니다. 고난이 닥쳐도 고난의 이유를 알기 때문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 겉모습에 속아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환란 중에서도 반석처럼 요동하지 않고 굳게 섭니다. 왜냐면 우리는 더 이상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고후 5:7)

결론: 여러분은 폭풍우처럼 시련이 밀려 올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주님, 하필이면 왜 납니까?”“왜 저를 돌보시지 않습니까?”하고 소리쳐 외치십니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인생의 모든 환란과 시련에서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없이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을 면제해 주지 않지만 우리를 주님이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서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먹구름과 풍랑을 일시에 잠자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광풍과 풍랑이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것은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위험한 것은 인생의 시련과 역경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결핍입니다.

사람들이 평소에는 말합니다. 믿음을 가져서 뭐에 쓰느냐고. 예수 믿으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그러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무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그때 정말 절실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노아시대에 홍수가 오기 전 사람들은 다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 방주는 그 당시 가장 무시 받던 희대의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홍수가 왔을 때에 가장 요긴한 것은 바로 노아가 120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해가면서 만들고 있던 방주였습니다. 그때에 노아와 방주를 비웃던 사람들은 다 물에 잠겼습니다. 평소에 세상에서 좋아 보이던 것들도 다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노아는 그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무시 받던 노아의 방주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비가 더 많이 오면 올수록 세상은 물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깊이 잠겨 가는데 노아의 방주는 점점 더 높이높이 올라갔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역경의 순간에 그 빛을 발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그 리더쉽을 발휘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같이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시대에, 무한경쟁의 시대에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실력을 쌓아야지.’ 맞습니다.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실력이란 무엇입니까? 진정한 실력은 어떤 위기상황이 닥쳐와도 이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유연성과 적응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실력이요,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모세가 학문이 부족해서, 외국어실력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광야훈련을 시키셨겠습니까? 바울이 아는 것이 부족해서 수많은 역경과 환란의 터널을 거쳐왔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나 바울이나 많은 연단을 통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있는 믿음, 광풍 속에서도 안심할 수 있는 실제적인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실력을 쌓은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그들은 위기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룬 하나님의 종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한 실력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 길은 믿음을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위기의 때에 반드시 들어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맨날 세상 욕심, 세상 재미, 자기 계획, 그런 생각만 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노아와 같이 묵묵히 방주를 짓고 있는 자, 바울과 같이 구령의 열정으로 선교 비전에 불타서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자. 주의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자 하는 자, 그런 자에게 나타나 주시고, 확신을 주시고,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고, 그를 들어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인생의 배를 타고 가더라도, 우리는 거룩한 꿈을 꾸고, 사명감을 가지고, 마음에 믿음을 품고, 믿음의 항해를 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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