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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라 (02.25.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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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72회 작성일 Feb 26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2월 25일
본문: 갈라디아서 6: 14-18
제목: 십자가를 자랑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사람은 누구나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입으로 자랑하지 않을지라도 은근히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학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모를 자랑합니다. 사람마다 한두가지 자랑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첫 손주를 본 사람, 골프를 친지 얼마 안 되는 사람, 처음 개를 키우는 사람은 모임에 가면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손주 자랑, 개 자랑, 골프 치는 자랑을 한없이 늘어놓기 때문에 일단 화제를 그 쪽으로 옮겨가면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은연중에 성경지식, 새벽기도, 헌금과 봉사로 은연 중 자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자랑거리가 딱 한 가지 밖에 없는데 그것은 ‘십자가’라고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냥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이중부정으로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빼면 내게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정말 자랑거리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도 바울이 가장 힘겹게 싸운 영적 장애물은 아마 자기 안에 있는 교만이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왜요? 그는 너무나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빌립보서 3장 5-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 3:5-6)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 당시에 누구나 선망하던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이었습니다. 학문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람이었고,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라고 할 만큼 자기 민족의 유대교에 열심이었습니다.

이렇게 출중했던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 회심한 이후에도 기독교 역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는 신약성경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그중에는 기독교 신앙의 초석이 될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신비한 영적 체험도 했습니다. 삼천층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쓰던 손수건을 가지고 병자들에게 갖다 대기만 해도  병이 나았습니다. 유두고라는 청년은 창문에 기대어 앉아 밤늦게 까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2층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사도 바울이 안수하여 기도했더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또 로마를 향해 가던 배가 파산해서 어느 섬에 도착했는데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집어 넣으려다가 불뱀이 나와서 사도 바울을 물었습니다. 이를 본 원주민들은 이제 곧 그가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는 전혀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정도 경력과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꿈속에 천국을 다녀왔다고 해도 이곳 저곳 다니면서 간증집회를 하는 세상인데 난리가 났겠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나, 신앙적인 면에서 보나 남에게 뒤질 것이 없을 만큼 자랑거리가 많은 그가 왜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비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쩌다 로마 사형수로 몰려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과 예정대로 되어 진 일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말씀하면서 ‘성경대로’를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약속하신 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결코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과 창세전에 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의 대속제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장면을 시시각각 전달해 주면서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악의를 가지고 죽이려고 모의했던 대제사장과 장로들, 스승을 배신하여 은 삼십이 팔아넘겼던 가룟유다, 무죄한 줄 알지만 자신의 정치생명을 안전하게 지키고자 십자가 처형을 내렸던 빌라도,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그저 담담히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장엄한 구원 계획 속에 이루어진 일이란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한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법 없는 자들, 로마병사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 사도 바울은 얼마나 감동하고 감격했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십자가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게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그는 전파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는 이유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1.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먼저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다” 이 말은 ‘내가 세상과 결별했다’는 뜻입니다.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세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됩니다만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은 하등의 잘못이 없습니다. 만약 이 지구가 잘못되었다면 더 이상 지구에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어떤 이론이나 철학 체계, 조직적인 시스템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배후에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조직과 체제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영적 세력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세상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이 악한 영들의 역사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들에 의해 조정 당하고, 그들의 가르침과 이론에 의해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완전히 물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물질적이고 쾌락적입니다. 상품을 팔기 위한 세상 광고와 선전이 ‘내가 그 옷을 입으면 더 멋있게 보일 것이다. 내가 그 차를 타면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다’ ‘그 상품을 구매하기만 해도 나는 행복하게 될 것이다’고 속삭입니다. 철저히 물질적이고 황금만능주의입니다. 그리고 즉흥적이고 찰라적입니다.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무조건 OK입니다.

이런 광고를 어릴 적부터 늘 보고 자란 사람들이 커서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이익과 쾌락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 영혼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파괴하고, 이웃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 길이 멸망의 길인줄 알면서도 그 길로 계속 달려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 배후에 어둠의 권세가 잘못된 가치 체계와 영향력을 가지고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사단의 궤계를 날카롭게 간파하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일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있어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에 소박 당해 묶여서는 안됩니다. 디엘 무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배가 뜨려면 바닷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배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배가 떠서 항해하려면 당연히 바닷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배 안으로 물이 밀려 들어온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자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속박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요? 불교의 가르침을 좇아 세상을 떠나 산속에서 무소유로 살아야할까요? 많은 고행과 함께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할까요?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속세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 시도해 보았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열심히 신앙생활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광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못 박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더 이상 묶이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왜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십자가만이 우리를 세상의 속박으로 부터 자유케 하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는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한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두 번째 이유는 십자가만이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행하거나, 하지 않았거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직 새로 지음을 받았는냐’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까? 종교가 우리를 새롭게 합니까? 도덕이 새롭게 합니까? 율법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종교, 율법으로 새롭게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진단하기를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래서 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에 정통한 성경학자요 교수입니다.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다 지켜 보았어요. 그런데 영생의 확신이 없습니다. 평생을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고자 노력했지만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갔는데 사람의 이목이 두려워서 밤중에 찾아갔어요.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핵심을 찌릅니다. ‘너는 영적으로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적인 행위로 변화될 수 없어.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깜짝 놀란 니고데모가 ‘그럼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까?”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다시 태어나는 것인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가다가 다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저들의 반복되는 불신앙에 대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갑자기 광야에 불뱀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불뱀에 물려 맹렬한 독으로 인해 죽어갑니다. 모세가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치료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구리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아 놓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누구든지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살리라”

하나님 말씀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순종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구리뱀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는 것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깁니다. ‘지금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마당에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본다고 낫겠어?’하고 불신합니다. 놋뱀을 쳐다 보지 않아 독이 퍼져 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를 찾다가 죽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이 너무 단순하고 쉬워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죽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씀을 거부하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다 이해되지 않았어도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순종했던지, 마지못해 순종했던지, 어쨋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쳐다본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미련한 짓 같지만 ‘하나님 말씀이니까 한 번 해보자’고 한 사람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달아 올려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달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를 의미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 인생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어떻게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되지 않습니다. 예배 드리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경공부로 되지 않습니다. 철야기도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을 믿기만 하면 구원이 임하게 되고, 새로워질 것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까? 십자가만이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3.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 평강과 긍휼을 누리게 한다

십자가는 우리를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왜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는가? 십자가만이 우리에게 참 평안과 긍휼을 주기 때문입니다. (갈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예수를 믿은 후 우리에게 달라진 변화가 많습니다만 그중에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우리 마음에 평안이 생긴 것입니다. 왠지 모르게 든든한 것입니다. 심지어 내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과 번개와 함께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상하게 마음이 요동하지 않고 평안합니다. 이것이 확연히 달라진 부분입니다. 이전에는 근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괜히 불안하고, 조금만 잘못되면 큰일 난 것처럼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세상이 주는 평안도 있습니다. 가령 사회적 내 지위가 확고해지고, 사업이 탄탄하기 굴러가고, 내 몸이 건강할 때 사람들은 평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들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확고하던 지위가 흔들리고, 든든하게 생각되던 사업이 잘 안되고, 몸에 이상이 찾아올 때 평안은 사라지고 그 대신 불안이 엄습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오는 평안은 세상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란 중에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그래서 참 평안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십자가는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오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길이기도 합니다. 세상 종교는 신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긍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우상 앞에서 제사상을 차리고, 그 앞에 절하며 빕니다. 신의 자비와 긍휼을 얻기 위해서 온갖 고행과 노력을 다 합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별 짓을 다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450인 바알선지자들 사이에 생명을 건 내기가 벌어졌습니다. “어느 신이 참된 신인지 내기를 해보자”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 신 바알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응답해 달라고 빕니다.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응답하소서” 춤추고 뛰고 노래하면서 발광을 해도 안되니까 나중에는 자신을 자해하여 피를 흘리며 응답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우상이 어떻게 응답합니까? 이것이 세상 종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결과를 십자가에서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이 허물 많은 죄인도 의인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평안과 긍휼을 누리게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세 가지 자랑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를 세상으로 부터 자유하게 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내가 못박히고, 나는 세상에 대해 못박혔습니다. 더 이상 세상은 나를 속박하지 못합니다. 자유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가 변화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긍휼을 누리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 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것들을 자랑거리고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자랑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빌 3: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 대신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다른 모든 것들은 이에 비하면 배설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렇기에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였습니다. 즉, 넘치는 수고에 이어 여러 번의 옥에 갇히고, 죽기에 이르는 매를 맞고, 배의 파선으로 인한 일주야의 죽음의 위기를 겪었고, 그밖에도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 주림과 목마름의 위험, 춥고 헐벗은 위험 등을 겪어야 했습니다.(고후 11:23-27)

오늘날 예수 믿고 성공하고, 예수 믿고 출세하고, 예수 믿고 부자되고, 예수 믿고 건강해진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도 이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17절에서 말하기를 “이제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멸시,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손해, 예수 믿기 때문에 당했던 십자가, 십자가 복음 때문에 당했던 상처들이 세월이 지남과 더불어 흔적으로 사도 바울 몸에 남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억울해서 한 밤을 지새우며 울어본 적 있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주님은 "아무개야, 너는 내 아들 예수의 흔적 있느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답변하시렵니까?

우리 모두 십자가를 자랑으로 삼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의 흔적이 있는 신앙인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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