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주의를 탈피하라 (02.18.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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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형식주의를 탈피하라 (02.18.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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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39회 작성일 Feb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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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2월 18일
본문: 갈라디아서 6: 11-13
제목: 형식주의를 탈피하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가 지난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보면 신앙의 내용과 그 내용을 담는 형식 사이에는 항상 긴장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하여서 성도들이 많아지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체계적인 조직과 질서를 강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규율과 규칙, 그리고 의식과 절차를 세워서 어떤 틀(형식)을 갖춥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통제가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일처리가 편리하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게 됩니다.

아이로니한 것은 이렇게 체계적인 조직과 질서를 강화시킬 수록 부흥의 불길이 죽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성령을 의존하였는데 서서히 조직과 체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체계적인 조직이 쓸모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체계적인 조직이 뒤따르지 않으면 무질서로 인한 혼란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내용과 그것을 담는 형식 사이에 긴장이 있습니다. 어느 쪽도 무시할 수 없어요.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없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형식이 그럴 듯하게 보여도 그 내용이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값비싼 보석을 살 때 아주 아름다운 박스에 포장해서 줍니다. 이것이 보석의 가치를 더 잘 드러내 줍니다. 그래서 값비싼 보석을 색종이로 조잡하게 포장해서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포장을 멋있게 잘했어도 그 속에 보석이 빠져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모든 활동에서 어느 정도의 형식이 필요하고, 또 때로는 형식에 의해서 내용이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는 집에서 기도할 수도 있으나 굳이 교회당에 나와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은 집에서 기도할 때에도 함께 하시며 우리 기도를 받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에 나와 연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더 생생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몸이 피곤하거나 아플 때 침대에 누워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받아주십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그 형식이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형식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내용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내용이 있기에 형식이 필요한 것이지 형식 때문에 내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아무리 멋있고 감동적인 예배형식을 갖춰었다고 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나 사랑이 없다면 그 예배는 헛된 예배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내용이 빠진 채로 형식만 남게 될 때 형식주의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중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전에 많은 신앙 선배들이 이 함정에 빠졌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덫에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전체 주제가 무엇입니까? 율법과 은혜가 아닙니까?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고, 은혜는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은 계속 행위를 강조해왔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으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형식과 계명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영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인격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편지를 끝내기 전에 다시 한 번 이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슨 말입니까? 서두부터 지금 여기까지는 사도 바울이 구술하면 그 곁에서 대필자가 받아 적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부분만 사도 바울의 손으로 직접 쓴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도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학자는 사도 바울의 시력이 좋지 않아서 큼직하게 썼을 것이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언더라인을 하는 것과 같이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크게 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마지막 부분이 너무나도 중요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친히 자필로 쓰면서 소문자가 아닌 큰 대문자로 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요약해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율법주의자들처럼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외식과 위선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1. 형식주의의 위험을 조심하라

우리가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면 먼저 그 위험성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신앙의 겉모양을 갖추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겉모습에 진실한 신앙인 양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봉사하니까 믿음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종교 활동을 잘 하면 신앙이 좋을거라고 본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 직분까지 받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뭐가 중요합니까? 내가 진정 거듭나서 내면 세계에 변화가 일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서 정말 자신의 죄성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내 마음에 진정으로 영접하여 그분께 자기 삶을 맡겨 드렸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없이 남들처럼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활동하니까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일어난 변화입니다. 그것이 미세한 변화일지라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면 분명히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열망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나오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성도들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또 믿음이 좋은 성도를 보면 나도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점점 그 삶에 인격의 변화가 나타나며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형식주의에 빠지면 무화과 나무에 잎이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것과 같아요.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삶에 진정한 변화가 나타나지 않아요. 내면이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그들은 마음을 드리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런 척만 했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제사는 드리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1:1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제사는 여전히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하나님 말씀을 저버리고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너희가 무수히 제사를 지내며 성전을 들락거리지만 나는 너희가 바치는 피의 제사에 싫증이 났다. 너희는 성전 뜰만 밟고 다닐 뿐이지 내게 마음을 주지 않는구나’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신앙의 형식만 남고, 하나님 말씀 보다 사람의 유전을 좇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흠을 잡아내려고 늘 틈을 엿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자들이 걸려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그냥 음식을 먹는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에 따라서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결례를 철저히 지켰습니다. 당연히 엄격한 이 율법주의자들 눈에는 제자들의 행위가 부정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께 따져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대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느냐”(막 7:4).

여러분, 그들의 판단의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비판은 하나님의 말씀 계명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규칙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응답에 나선 주께서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고 하시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막 7:6-7) 라고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형식과 모양에 있어서는 꼼꼼히 잘도 따집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무시해 버립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속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탐욕과 탐심이 가득합니다. 정욕에 불타고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심이 있어요. 자신의 출세와 이권에 관련된 일이라면 사람을 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체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면적으로 종교적 모습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변화된 내면이 중요합니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는데 하나는 형식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내면을 강조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겉에 나타나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내면을 강조합니다. 겉에 나타나는 행위만을 바꾸는 종교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내 속사람을 통두리째 변화시키는 내면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쉽습니다. 규칙과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 행위를 대신합니다. 잘하면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어쩌면 인정해 주고 존경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 마지막은 멸망뿐입니다. 영적 파멸입니다. 형식주의를 조심하십시오. 그 위험을 깨닫고 피하십시오. 우리 이전에도 수많은 신앙인들이 여기에 빠졌습니다.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집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들어도 감동이 없습니까? 세상적인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좋게 느껴집니까? 깨우쳐 주시는 성령의 음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3. 종교적 가면을 벗으십시오

형식주의자가 되면 필연적으로 외식과 위선이 따라오게 됩니다. 외식이란 단어는 연극 배우들에게 쓰이던 용어입니다. 한 배우가 여러 가지 배역과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무대에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가리켜 외식주의자, 위선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식과 위선이라는 것은 실제의 자기가 아닌 다른 나로 거짓으로 포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적 가면을 쓰는 것입니다. 종교적 가면을 쓰게 되면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보다 병세로 말하면 중증입니다. 좀처럼 여기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가면을 쓰고 행세를 하다보니 그게 자신의 본모습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바라새인들은 사람에게 좋게 보이기 위해 길거리에 서서 기도를 길게 합니다. 경건하게 보이려고 금식하면서 금식하고 있다는 티를 냅니다. 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면서 구제를 합니다. 이런 신앙적 행위로 자신이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식과 위선은 보는 사람들에게는 혐오감을 안겨 줍니다.

고아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와서 광고용 사진 찍는 일이라고 합니다. 뭐 조금 가지고 와서 전달식을 하며 사진을 찍습니다.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것도 서러운데 억지로 밝게 웃으며 사진을 찍을 때 가장 비참하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할례를 받도록 유혹하는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입니까? 아니면 교인들을 사랑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결국 자기 자랑을 위해서였습니다. (갈 6: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들에게서 두 가지 잘못된 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대로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지만 정작 그들은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다른 한가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영광을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따르는 자들이 몇 명이다’ ‘내 편이 몇 명이다’ 이렇게 자기 자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열심을 가장하며 잘 믿는 것처럼 자랑하지만 결국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적 가면을 쓴 교회 지도자들의 위선과 외식 때문에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가면을 쓰고, 이중적인 위선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는 커녕 욕을 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전도의 문을 막아버립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밖에서는 그럴듯한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내숭떠는 부모들의 위선 때문에 자녀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성령께서 종교적 가면을 자각하여 벗어버리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3.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라

그런데 우리가 형식주의와 종교적 위선에서 탈피하려면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의 은혜에 있고, 교회의 사명은 이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형식주의 신앙인들은 이 십자가를 전파하기 싫어합니다.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회피합니까? 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하면 핍박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또 십자가는 인간의 어떤 선행이나 노력을 무위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매달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듣는 사람의 심기가 매우 불편합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도덕적 선이나 노력, 그리고 양심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자들을 또한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헌신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봉사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목장모임에 사람들과 얽히는 것이 싫습니다. 주일예배 한 번 드리고 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물질을 바쳐야 합니다. 내 정성과 마음과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싼 약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도 아까워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에 시간과 재물을 바치기를 아까워합니다. 이미 형식주의적 신앙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주님을 좇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주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뒤를 좇으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영적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9:24-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결론: 파리 루블 박물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인데도 미술에 문외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큼 크고 화려한 작품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신비한 미소에 있다고 합니다. 슬픈 사람이 보면 우는 것처럼 보이고, 기쁜 사람이 보면 웃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활짝 웃지 않고 살짝 미소를 짓는 것으로 그린 이유가 치아관리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작품의 위대함을 음미해 보려면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지금은 늘 관람객들이 많아서 그럴 기회가 없겠지만 가까이에서 보고, 멀리서 보고, 아래서 올려다 보고, 위에서 내려다 보고, 왼쪽에서, 오른 쪽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과 노력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보든지 모나리자의 눈은 정확히 쳐다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친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숨은 봉사, 사랑의 수고를 다 알고 계십니다. 억울한 소리를 들었습니까? 염려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다 아십니다. 답답한 일을 만났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를 알고 계시며 도와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오직 하나님의 눈만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 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느니라”(눅 12:3)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탈피하십시오. 그 위험성을 인식하십시오. 종교적 위선을 조심하십시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리지 말고, 힘껏 본질적인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마시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가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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