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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서로 책임을 지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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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230회 작성일 Feb 05 2024

본문


본문: 갈라디아서 6:1-5

서론: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귐과 교제를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고, 이를 통해서 만족과 기쁨 충만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왜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대로 그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신 후에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창조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작품으로 완전하기 때문에 만드신 후에 하나님 보시기에 무척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혼자서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표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에서 하나가 되십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사랑으로 완전한 하나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 영광을 돌리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만나야 하나 됨의 가치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로 이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출발입니다. 이게 커지면 가족으로, 가족에서 집단으로, 집단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민족으로, 나라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출현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공동체를 만들어 주셨습니까?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처럼 서로 사랑 만들기를 해보라는 것입니다. 아끼고 섬기고 도와주는 데서 점점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됨에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으로 충만한 생을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공동체로 불러주신 목적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물질만능주의와 무한경쟁주의 시대인 오늘날 이런 공동체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로 미워하고 헐뜯고 깎아 내리고 넘어뜨려서 나 혼자 살겠다고 합니다. 상대방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자기 권리만을 주장합니다. 자기 이익만을 챙기 위해 다툽니다. 싸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 중입니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대의명분을 내세워도 그 이면에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어요. 자기 가족, 자기 편, 자기 민족, 자기 나라 이익을 놓고 싸웁니다. 그리고 상대에게 혹시 당할까 봐, 손해 볼까 봐 서로 경계하며 삽니다.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요. 가족을 만나도 속 깊은 이야기 못합니다. 친구에게도 말 못할 슬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외롭습니다. 그래서 술집이 번창합니다. 여기에 가면 싫건 떠들 수 있거든요. 무슨 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거든요. 그렇다고 외로움이 해결됩니까? 돌아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허전하고 괴로운지 몰라요.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습니까? 무엇이 근본 문제입니까? 성경은 죄가 근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고 자기중심적이 되게 하여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꾸 깨집니다. 다투게 합니다. 그러다 힘이 부족하면 끼리끼리 뭉쳐서 집단 이기주의를 형성시킵니다. 이것이 확대되면 민족 이기주의가 됩니다.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겁니다. 민족 이기주의는 민족 간의 분쟁을 일으켜 결국 전쟁으로 돌입합니다. 과거 세계 1차, 2차 대전이 그렇고,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파괴된 관계, 단절된 사귐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혔던 교제가 회복됩니다.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랑이 회복됩니다. 상처가 치유됩니다. 화합하여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를 우리 각자에게 적용시켜서 실현시키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가 출현입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의 교회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것은 서로 책임 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도와주며 붙잡아 주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목장은 이런 목적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인가?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서로 바로잡아 주는 관계입니다. 서로 짐을 나눠지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남의 일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1. 서로 바로잡아 주는 관계(1절)

모든 인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체 지체 한 사람이 범죄해서 하나님 자녀답지 못하게 살 때 어떻게 해야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먼저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서로 형제, 자매인 것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가족이란 함께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말 안듣는 자식이 집을 나갔을 때 “아, 그 놈 그렇게 속을 썩히던 참 잘됐다. 아 시원하다.” 이런 부모 있을 수 있겠어요? 정상적 부모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을 듣지 않는 자식이지만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온 가족이 염려하고 애타합니다. 이곳 저곳 찾으러 다닙니다. 왜냐하면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인 우리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족이기에 서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만일 한 형제가 잘못되어 갈 때 ‘나 몰라라’ 방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라" 범죄가 드러나면 어떻게 해야 된다구요? 바로 잡아주라고 말합니다.

바로잡는다는 용어는 원래 의학적으로 원상복구시켜 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령 운동하다가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뼈가 산산조각이 났다면 수술을 해야 하겠지만 다행히 부러지기만 했을 경우에는 뼈를 다시 맞추고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킵니다. 그러면 그 뼈가 한 두달 후에 다시 붙습니다. ‘바로잡다’는 단어가 바로 그 뜻입니다. 교정해서 다시 원래 자리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잡으라’는 말씀이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바로 잡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옆에 형제가 잘못되었을 때, 내 남편과 아내가 잘못된 죄를 지었을 때, 욕하고 비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원상태로 회복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극도의 개인주의 시대입니다. 프라버시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며 관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족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도 팔짱을 끼고 구경합니다. ‘자기 문제니까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다 자랐는데 이제 간섭하지 않겠어요.’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를 바로 잡아주라는 것입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찾아왔을 때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처럼 그들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신령한 너희가” 왜 신령한 사람이 바로잡아야 합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몸이 아플 때 불친절하지만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친절하지만 돌팔이 의사를 찾아가겠습니까? 아무리 친절해도 돌팔이 의사를 찾아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요? 병을 적절하게 다룰 만큼 준비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먼저 신령해야 다른 사람의 문제를 바로잡아줄 수 있습니다. 화가 복받치면 그만 이성을 상실해 버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독선과 편견에 가득찬 사람은 도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자 할 때 우리 자신이 먼저 신령해야 그들을 바로 잡아 줄 수 있어요.

남편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십니까? 자녀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십니까? 직장 동료의 문제를 해결하기 원하십니까? 먼저 자신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자신이 신령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신령하다고 하면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뭔가 비정상적인 사람을 연상하기 싶습니다. 방언을 줄줄 한다든지, 큰소리로 유창하게 기도를 잘한다던지, 안수했더니 병이 낫다든지, 기도하더니 쪽집게처럼 문제를 콕 집어낸다든지, 이런 사람을 신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사람을 신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은 5장에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좇아 살면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삶속에서 맺어가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생활 속에서 나타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온유한 심령으로”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 줄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 주님의 마음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마 11: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여유있는 마음입니다. 이 온유는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자비로우시며 오래참으십니다.

현재 우리 눈 앞에 벌어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과연 우리도 여유 있게 넉넉한 마음으로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오직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만 가능합니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경고합니다.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네가 기억해야 될 것 있는데 네가 다른 사람을 도와주면서 그 악에 오염되지 말아라. 형제를 바로잡아주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의 소문에 근거해서 말을 지어 옮기거나 비방하고 험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했지 “소문을 듣거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범하기 쉬운 또 다른 죄는 잘못한 상대방에 대해서 우월감이나 정죄하는 마음입니다. 범죄한 이웃을 바라볼 때  내가 더 도덕적이고 더 깨끗한 자인 것처럼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운 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로 마귀의 정죄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잡는다는 말의 의미는 처벌하는데 목적이 아니라 잘못을 교정하여 회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서로에 대하여 책임 지는 관계란 잘못을 범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는 관계입니다. 온유한 심정으로 겸손하게 형제를 잘되도록 회복시켜 주는 관계입니다.

2. 서로 짐을 나눠지는 관계(2절)

서로에 대하여 책임 지는 관계란 두 번째로 서로 짐을 나눠지는 관계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법은 무거운 짐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 지는 나라입니다.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은 먼저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연약한 자들의 짐을 대신 져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난의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합니다. 이웃의 가난의 짐, 질병의 짐, 절망 가운데 빠진 자들의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슬픔에 빠진 자들에게 소망을 주고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의 짐을 지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죄값을 대신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메어 주신 짐은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마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분명히 멍에는 묶임과 붙잡힘, 수고와 고통을 의미하는데 주님이 메어 주신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이 메어 주신 멍에의 비결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다른 성도의 멍에를 기꺼이 지면 주님이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고, 힘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위로와 용기를 주시고, 성령을 부어 주시기 때문에 실제로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짐을 대신 져 주다가 내가 더 복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선다싱이란 인도 출생의 전도자가 있습니다. 이 분이 북부 히말라야 지경으로 전도를 갔는데 눈이 많이 왔습니다. 눈이 온 산과 마을을 다 덮었는데,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길을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추위와 싸워가며 길을 가고 있는데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세찬 바람과 추위에 지친 나머지 그만 쓰러져 얼어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죽어가면서 살려 달라는 것을 보고, 함께 동행하던 사람이 말합니다. ‘이 추위에서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우리가 살 수 있는데, 만일 이 사람을 살리겠다고 시간을 지체하면 우리도 죽습니다. 그러니 내버려두고 어서 갑시다.’ 그러나 선다싱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사람을 들쳐 업으니까 그 사람은 앞서 떠났습니다.

선다씽은 한 사람을 업고 가야 하니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눈 길을 헤치며 가는데 길 위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바로 앞서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급하게 먼저 갔지만 날씨가 너무 춥고, 피로에 지쳐서 쓰러져 그대로 얼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등에 업고 길을 가던 선다씽은 그 추위에서도 땀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 열기로 업혀갔던 사람도 살아나게 되어 두 사람은 죽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남을 살리고 도우려던 사람은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귀한 일을 하였지만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달려 가던 사람은 얼어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닌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마땅히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짐을 나눠 짊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즉 서로 사랑하라는 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목장 모임의 모습은 서로 짐을 나누어 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3. 남의 일에 불필요한 참견을 하지 않는 관계(3-5절)

세 번째 마지막으로 서로에 대하여 책임을 져 주는 관계란 불필요한 참견과 간섭을 하지 않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한국인은 참견을 많이 하는 민족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두는데 길을 가던 제삼자가 가는 길을 멈추고 훈수를 합니다. 물론 참견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 단일 민족이라서 유독 심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실상은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참견이란 본질적으로 너보다는 내가 옳다는 자신감과 그래서 참견할 자격이 있다는 권위의식 등과 관련이 있습니다. ‘너는 틀렸다. 너는 나보다 한 수 아래에 있다. 그래서 한 마디 조언할 수 있다.’ 물론 참견 안에도 관심과 사랑이 있어서 언제나 무조건 다 나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을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도와주는 참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참견과 간섭은 상대방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짐을 나눌려는 마음이 결핍된 가운데 상대방에게 한 수를 가르치려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면에 우월감이 감춰져 있고, 상대방이 잘 안된 것에 쾌감을 느끼는 아주 고약한 면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갈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를 살피게 되면 남에게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죄 지은 자를 함부로 비난하기를 멈춰야 합니다.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대게의 경우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도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근원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마땅히 할 바를 다 하라고 명합니다. (갈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아마 여기에서 약간 혼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조금 전 2절에서는 ‘서로 짐을 지라’고 말하고서 이제 5절에서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하니 혼란스럽습니다. 그런데 쓰인 원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2절에서 말하는 짐이란 “baros" 아주 무거운 짐을 말합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말합니다. 그러나 5절에서 말하는 짐이란 "phortion"으로 등에 메는 백팩정도의 짐을 말합니다. 이 짐은 모든 사람이 각각 져야할 본분과 사명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내 할 일을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자기 일을 챙겨서 남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을 열심히 살피면 자기에게만 자랑할 것이 많고 남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교만할 수 없습니다. (갈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자신을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결론:
우리 모두 약한 자입니다.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죄의 질병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로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간섭이나 참견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이것은 참으로 깊은 지혜가 필요로 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가족과의 관계에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비취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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