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제직훈련 III) (01.28.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제직훈련 III) (01.28.2024)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263회 작성일 Jan 29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월 28일
본문: 빌립보서 4: 1-3
제목: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제직훈련을 위해서 첫 번째 시간에는 섬김의 훈련에 대해서, 두 번째 시간에는 복종의 훈련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세 번째 시간에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제목으로 우리가 교회를 섬기며 사역을 할 때에 어떤 자세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편지를 보낸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6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세워진 배경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난 사도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에서 전도 활동을 하다가 성령께서 더 이상 북상하는 것을 저지 당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도착하게 된 곳이 에게 해를 접한 항구 도시 드로아였습니다. 이곳에 머물던 중 밤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한 마게도냐 사람이 나타나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말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행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에게 해 건너 편 마게도냐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 처음 도착하였던 성이 빌립보 성입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 방식은 안식일에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숙식을 해결할 수도 있고, 그곳 정보를 얻기 쉬웠을 것입니다. 특히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었습니다. 자기 동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고, 또 거기에는 경건한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에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논증하여 설득하기 쉬웠습니다. 사실 복음에 열렬히 반응을 보였던 무리들이 바로 이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통 유대인 가장 10명이면 회당을 세우는데 빌립보 성에는 아직 회당이 세워지지 않았던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사람들이 빨래하는 강가로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때 주께서 자주장사하는 ‘루디아’라는 여성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녀는 바울의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여 온 집이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이로써 ‘루디아’의 집에 유럽에서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렇듯 루디아 여성의 리더십 아래 교회가 시작되었기에 아마도 모성애가 강한 교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성애적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 영적,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에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그들은 여러 차례 물질적 후원을 하면서 그의 복음 사업에 동참했습니다. (빌 4: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이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각별한지 본문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한 사람 한 사람 영적으로 낳아 기른 자식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삶으로 자신이 모범을 보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찾아가 위로하고 권면하면서 키워낸 교회입니다. 그래서 한 가족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리운 가족처럼 빌립보 성도들이 잘 지내는지 늘 안부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 했습니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 기쁨이 솟구쳤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면류관이었습니다. 그만큼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입니다.

1. 교회의 하나됨 

그런데 좋은 교회라고 해서 어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선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빌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또 유대주의자들인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고 있었습니다. (빌 3:2-3)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여기서 ‘개들,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은 거짓 교사들로서 유대주의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구원을 받을 때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모세 율법 대로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에는 (빌 3:18)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앙 고백한 사람들이지만 (빌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실상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 있었고, 교회에 어려움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라”는 말은 “주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로마 군인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로마시대가 배경인 전쟁 영화를 보면 군사들이 자신의 키만한 방패를 들고 대열에 맞춰 서서 적군과 싸웁니다. 반드시 각자 자기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적군이 사납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뒤로 물러서게 되면 곧 진영이 깨져서 전투에서 패배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굳게 서라”는 말은 그와 같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교회도 외부의 공격이 있습니다. 대적들이 교회를 흔들려고 하는데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빌립보 교회만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 이후의 모든 교회들을 공격합니다. 교회가 굳게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단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사단은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굳게 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합니다. 핍박하거나 대적하기도 하고, 진리가 아닌 것이나 진리와 유사한 것을 가르칩니다. 이 모든 공작은 성도들이 하나 되지 못하도록 내부에 분열을 일으켜 무너뜨리려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이런 사단의 공작에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서로 싸우다가 무너졌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께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대제사장적 기도를하셨습니다. (요 17: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신 이후로 응답되었습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엡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교회는 예수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하나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께서 이미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각 지체가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한 팀이 되었습니다.

2. 하나됨이 깨지는 이유

하나됨을 힘써 지키기 위해서 지금 빌립보 교회에 필요한 일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2절,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사도 바울이 교회에게 공적으로 보낸 편지를 회중 앞에서 읽고 있습니다. 1장,2장, 3장을 읽고, 이제 4장을 읽는데 갑자기 두 이름이 나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이 두 자매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그것도 칭찬이 아니라 권면하는 내용이었을 때 그 둘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당황스럽고 큰 부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모를 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그만큼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이름을 언급하며 ‘권한다’는 말도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책임을 더욱 느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유오디아는 순두개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순두개는 유오디아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이 두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초신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복음에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라고 했습니다(3절). 교회를 잘 섬기고 있던 자매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진리에 있어서 오류에 빠졌거나 다른 견해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주 안에서 열심과 선한 동기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있었지만 문제는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 되지 못해서 교회에 갈등과 다툼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이 좋다는 분들 가운데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며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열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시험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실 텐데 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참으로 믿음이 좋다면 갈등과 다툼 중일지라도 화해가 일어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가는 곳마다 충돌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것은 옛사람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모든 일의 중심에 있기에 상대를 용납하거나 양보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뜻마저도 꺾고 자기 방식대로 하고자 하는 것이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아직 내 자아가 펄펄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21장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의 통치로 온 백성이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섬겨야 할 터인데 각자 자기 생각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 점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만 그렇고, 믿는 신앙인들은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내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겠습니까?

요즘 세상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세상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취향대로, 자기 개성대로 사는 것이 소신 있고, 줏대 있는 당당한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것은 죄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일어나는 분열과 다툼도 각자 자기 방식대로 해야 한다고 고집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교회가 잘 되자고 싸우는 것이지 교회가 잘못되라고 싸우는 것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방식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데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주재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6) 라고 권면합니다. 이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래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의 낮추심은 성육신 사건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자신을 낮추되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은 어느 시대든지 본인이 원하시는 대로 오실 수 있었고, 또 어떻게 죽으실 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편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를 위해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예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어내 삶을 주관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높이셨다’는 뜻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높일 수 없는 최고의 자리로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호칭하며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주 심오하고 중요하지만 자칫 우리는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와 모임 속에서도 그리스도가 실제 주가 되어 다스리고 통치하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면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몰리게 됩니다. 대신 우리들의 생각과 의견에 따라 모든 일이 진행됩니다. 모임 중에도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무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말하고, 또 말한 것이 받아드려지지 않으면 기분 나쁘고, 심지어 화를 내고 싸웁니다. 교회 안의 주인은 주님이신데도 실질적으로 모든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막상 우리 자신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두게와 순두게는 교회의 구심점을 이루고 있었던 여자 집사님들이었습니다. 두 분 다 열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지나쳐 서로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투할 정도로 경쟁관계로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다툼으로 빌립보 교회는 분열의 위기가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한 마음을 갖으라고 말합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이것은 교회 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룰 때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 신앙으로 풀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이제 그 분의 주권 영역에 든 사람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그 주권 아래 다스림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다툽니까? 자기주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 다 예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분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종으로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뜻을 추구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 싸움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합니까? 왜 성경을 배웁니까? 주의 뜻에 순복하여 같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 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싸움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섬기느냐, 얼마나 자기 뜻을 버리고 주의 뜻에 복종하느냐, 얼마나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 됨을 지키느냐? 여기에 우리가 진정으로 싸워야 할 싸움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개를 향한 개인 권면에 이어 교회 공동체에게도 권면합니다. 3절,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흔히 교회에 유오디아와 순두게 같은 사람이 있으면 두 파로 갈라집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실망을 한 나머지 교회 일에 거리를 두거나 외면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를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도와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도우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람바노(sullambano)’는 ‘함께 붙들다’ ‘원조하다’ ‘돕다’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도와주라는 것은 그들을 편들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외면하지 말고 붙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서로 갈등하는 데에는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 싶은, 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겨주라는 것입니다. 형제로서 마땅한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관대한 마음으로 너그러히 받아드리며 용납하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년을 맞이하여 오늘 세 번째 제직훈련을 위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나의 면류관’이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면류관이란 주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 간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는 “이기는 자의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와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1장 27절에서는 천국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2024년 올해도 주 안에서 한 마음으로 주님을 잘 섬기며 성도들을 서로 사랑하는 삶을 통해서 온 세상에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임을 증거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광의 면류관을 얻는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