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을 배웁시다(제직훈련 II) (01.21.2024) 주일예베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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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순종을 배웁시다(제직훈련 II) (01.21.2024) 주일예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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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01회 작성일 Jan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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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월 21일
본문: 히브리서 5: 7-10
제목: 순종을 배웁시다(제직훈련 11)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지구는 질서 정연한 법칙에 의하여 운행됩니다. 해 아래 있는 피조물인 이 세상에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지배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제각각 고유한 질서에 의해 자라고 피어나고 열매를 맺습니다. 농사를 짓는 흙도, 밟고 다니는 땅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생겼습니다. 수만 년 동안 바위가 깨져서 돌이 되고, 돌이 부서져서 모래가 되고, 모래가 흙이 되어 식물이 자라게 하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질서는 순리이자 공생이고, 상생이자 어우러짐입니다. 여기에 평화와 안정과 기쁨과 복락이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창조 질서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죄와 고난, 불행과 비참은 여기에서 비롯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반역에 동참하는 것이고, 저주와 사망이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한평생 살면서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의 권위에 순복하여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자라서는 학교 선생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장성해서는 조직생활에서 상관에게 복종합니다. 그리고 국가의 질서에 따라 법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권세와 권위에 복종하여 질서를 세우고 유지해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 과거 역사를 살펴 보면 인간의 반항과 저항이 세상에 매우 중요한 가치들을 실현하는데 기여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당한 권위와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저항과 항거가 있었기에 노예, 어린이, 여성, 노동자들이 해방과 권리를 찾게 되고, 민중이 민주 사회의 주인이 되는 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한 고투와 희생을 하였기에 오늘날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유를 누리며 행복과 안녕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개신교를 뜻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말도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중세 시대 교황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종교 개혁자들의 저항과 분투가 후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반항과 저항의 정신이 인간 사회와 문명에 많은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가고 있는 불순종은 이와 다른 이야기입니다. 만약 반항과 저항이 갈수록 심해져서 마땅히 지켜야할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세상이 되겠습니까? 무법한 가정, 무법한 사회, 그리고 무법한 국가가  된다면 개개인의 생명과 행복과 안전 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노아시대가 그랬습니다. 네피림이라 불릴 만큼 장대한 체구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르는 무법사회가 되었습니다.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의와 공의 조차 상실해 버렸습니다. 강포함이 그득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홍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독재정치이라도 차라리 무정부 상태 보다는 낫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질서와 무법 상태는 파괴와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명과 복을 약속하는 순종의 습관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까? 순종은 화평과 기쁨, 평강, 그리고 갈수록 복 되며 생명이 충만해집니다. 반면에 불순종은 불평과 원망과 다툼과 갈등, 그리고 저주와 죽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직훈련을 위한 두 번째 메시지로 “순종을 배웁시다”는 제목으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1. 순종의 어려운 이유

문제는 복종의 훈련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확실하고 쉬운 길이 있다고 해도 듣지 않아요. 이 길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검증되었기에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해도 믿지 않아요. 자기 고집대로 합니다. 성경은 이런 문제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문제를 더 심층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엡 2:1-3)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 모두 예수 믿기 전, 허물과 죄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죽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때는 이 세상의 풍조와 풍속을 좇아서 살았습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단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악한 영들의 역사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이것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한계요 절망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구원이 없고, 하나님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 순종의 길

이렇게 불순종 가운데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것은 첫 아담이 불순종으로 실패했던 그 자리에서 나중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첫째 아담은 철저하게 실패하여 사망이 왕 노릇하게 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완벽하게 성공하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복원시키고, 간격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생명이 왕노릇 하는 차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를 새로운 성품으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 안에 불순종의 마음이 사라지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고, 또 순종하고자 할 때 순종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육체의 일을 좇아가지 않고 성령을 좇아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문제는 우리 안에 아직도 옛 성품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순복하기 까지 우리 안에는 갈등이 계속됩니다. 죄를 좋아하는 육체의 소원과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성령의 소원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 두 소욕은 함께 공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죄의 소욕에 져서 비참하게 되든지, 성령의 능력으로 승리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은 내 안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듣고, 잘 따라가라는 뜻입니다. 적극적으로, 성령님과 밀착해서, 성령님과 하나가 되어서, 성령을 좇으란 뜻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은 기쁨과 찬양과 감사로 채워지게 되고, 그 때 온전한 순종의 단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3. 순종의 모범이신 예수

우리가 순종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순종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쉽게 십자가를 지셨을 거라고 추측합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셨기에 자신이 겪어야 할 끔찍한 형벌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 죽음을 직면하여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셨습니다. (막 14:33-34)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별로 고통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심히 놀라시며 슬픔에 직면하셨습니다. 자신의 심적 고통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털어놓습니다. “내 마음이 극도로 슬퍼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지금 하나님이 뜻에 순복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할 것이냐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이 기로의 길에서 전심을 다해 씨름하시면서 결국 하나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꺾어 아버지께 순종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 5:7-9)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그 분 또한 우리처럼 배워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갖추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여느 아기처럼 육체적으로 성장하고, 지적, 영적으로 배우며 성장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겪으시며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비록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처럼 시험도 받으시며 더욱 성숙해져 갔습니다. 마치 근육을 단련시킬 때 더 튼튼하게 발달되는 것처럼 그분의 순종도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그가 아들이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그렇습니다. 메시아이신 주님 예수께서도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실 필요가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 어떤 분들은 나는 이미 어린시절의 인생이 아니기에 순종의 습관을 터득하기에 너무 때가 늦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물론 성인이 되어 습관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두시고야 말 것입니다.

4. 고난의 학교

하나님이 우리를 순종의 사람 되도록 훈련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의 하나가 고난입니다. 시편 119:67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우리의 불순종과 반항을 교정하고 우리를 순종의 자리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고난이 면제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순종의 레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거친 광야를 걸어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질병의 광야를 건너갑니다. 실패의 광야를 건너갑니다. 인간관계의 광야를 건너갑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뇌와 아픔의 광야를 건널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받았습니다. 광야는 어떤 훈련의 장소이었을까요?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 40년은 그들에게 테스트, 훈련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세대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늙고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불순종해서 다 죽었습니다. 때로는 우상을 섬기다가 그들은 징계를 받고, 불뱀에 물려서 죽기도 하고, 때로는 교만해서 고라의 일당은 모세를 대적하다가 땅이 그 입을 열어서 그 일당을 삼켰습니다. 또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모세를 대적하다가 문둥병자가 되기도 하고, 또 수많은 사람이 원망과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않는지 그것을 시험하는 곳으로 광야를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테스트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순종할 만한 상관에게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까다로운 상관일지라도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가 나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내게 무례히 대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순종하라고 사도 베드로는 권면합니다. 원망과 불평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테스트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훈련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로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하기 위해 광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40년 동안 생존했습니까? 하늘로 부터 만나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만나’가 상징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생의 광야로 인도하여 철저히 낮추시며 시험하십니다. 이런 연단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청종하고, 그 말씀을 존귀히 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과 그 뒤를 이은 다윗을 비교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차이나게 한 것일까요? 사울은 고난의 연단 없이 왕이 되었고, 다윗은 고난의 훈련을 거쳐서 왕이 되었다는 차이입니다.

다윗은 열일곱 살 부터 시작해서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는 서른 살까지 사울의 눈을 피해 도피생활을 했습니다. 사울의 군사들을 피해 산위로, 골짜기로, 굴속에서 밤을 지세며, 숨소리까지 죽이고 오들오들 떨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없이는 얼마나 미미하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온몸으로 철두철미하게 체험했습니다. 그 때는 이루 말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웠겠지만, 바로 그 고난으로 인해 다윗은 자신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이런 고난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의 근원이 되신다” “하나님만이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론으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십삼 년 동안 날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자신의 몸으로 체득한, 골수에 사무친 진리였습니다. 바로 이런 연단과 훈련을 거쳤기에 그는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다윗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다윗이 우리 보다 머리가 나빠서 십삼 년 동안이나 몸으로 때워야 했던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우리보다 더 미련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어서 사십년 동안 황량한 광야에서 목자로 살면서 바닥 생활을 경험해야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셉이 우리보다 죄가 많아서 총리가 되기 전 십삼 년 동안이나 종살이와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몸으로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평생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이런 고난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이 어떤 상태였다는 것을 평생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그것도 평생 잊지 않도록 철저히 배웠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늘 입에 불평과 원망을 달고 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평생 성장과 성숙을 하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어린아이같이 투정 부립니다. 불평이 많습니다. 몸은 어른인데 정신과 인격은 어린아이 수준입니다. 본인은 문제 제기하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만족스럽게 여길지 몰라도 완전히 헛똑똑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순종의 기회로 삼는 자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누구 밑에 가면 순종을 잘하고, 누구 밑에 가면 순종을 안 하는 식으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누구 앞에서나 순종의 정신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신앙에 대해 말씀하실 때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참된 순종은 참된 신앙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 보이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그 권세 앞에서 감격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어른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고난이 오거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시고, 내가 이 고난 속에 배워야 할 순종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묻고 기도하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힘을 내어 다시 순종의 훈련을 계속하십시다. 때가 되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풍성히 맺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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