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섬김입니다 (01.14.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01.14.2024)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353회 작성일 Jan 15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월 14일
본문: 요한복음 13: 1-17
제목: 사랑은 섬김입니다(제직훈련 I)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제자들입니다. 제자이기에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닮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학생은 스승으로 부터 지식을 전달 받으면 족합니다. 그런데 제자는 스승에게 자신을 위탁하여 맡깁니다. 그래서 스승의 인격과 삶의 모든 것을 물려 받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까? 두 가지입니다. 복종과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복종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 말씀과 그 권위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유익되거나 손해 보지 않을 것 같으면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타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관되게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섬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일생동안 연습하면서 살아가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길이 섬김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싸움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 싸움이 아닙니다. 얼마나 내려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신앙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인정 받고,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마음이 있기에 서로 경쟁하고, 노력해서 성공하고, 그리고 발전하게 됩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기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법니다. 돈을 벌어서 높은 집을 짓고, 높은 빌딩을 세워서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높아지려는 인간의 욕구 때문입니다. 높은 학위를 얻어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명예를 구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 높아지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것 또한 권좌에 올라 높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높아질 수록 사람들이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며 대접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라고 대접을 받을 수록 자신이 굉장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고, 목이 뻣뻣해지고, 의기양양해 집니다. 어느덧 교만의 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 교만의 문제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비견하고자 하였던 사단의 타락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답고 지혜롭게 창조된 사단이 스스로 자신을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서려 했던 결과로 그는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꾐을 받은 인간은 저마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싸우게 되고, 갈등과 분쟁, 더 나아가서는 전쟁을 일으키고, 세상을 온통 소란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 됨이 세상적인 소유와 인기, 명예, 그리고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에게도 권능을 행하실 때 많은 무리들이 찾아왔습니다. 배고픈 무리에게 떡 먹일 때, 모든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내쫓았을 때 폭발적인 인기가 뒤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옹위하여 왕으로 삼으려고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철저하게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탄생하기를 로마제국의 변방 팔레스타인 땅에서 한 마구간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대접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셨기에 늘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 가셨고, 마지막에는 가장 낮은 자리, 결국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까지 일관되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삼일후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더 섬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섬김의 길을 갈 수 있는지 함께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예수님은 섬김의 모범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드디어 예루살렘 성에 입성했습니다.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며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제자들이 아주 신바람이 났습니다. 한마디로 주름잡고, 휩쓸고, 다녔어요. “거기 줄 서세요, 줄 서요. 왜 새치기해요. 빨리 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해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열광하니까 우쭐하였겠지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끼리 서로 경쟁심이 발동했어요. 서로 누가 큰 자인지 다투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고단한 하루를 보낸 후 저녁이 되었습니다. 모두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후각을 자극하면서 시장기가 발동합니다. 하루 종일 수고한 피로감이 일순간에 몰려오면서 몸이 나른해 집니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을 시중 들기 원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시중을 받으며 음식을 즐기기 원합니다.

바로 이런 순간 예수님은 식사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습니다. 수건을 취하여 허리에 두르십니다. 대야에 물을 담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습니다. (요 13:4-5)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옛날 팔레스타인의 길은 포장되지 않은 먼지투성이의 길입니다. 비가 오지 않은 건기시즌에는 흙먼지가 푸석푸석하게 날리는 길입니다. 비가 오는 우기시즌에는 진흙 뻘이 되어 질퍽거립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샌달 종류의 신을 신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걸으면 발은 먼지나 진흙으로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 입구에는 큰 물 항아리를 비치해서 언제든지 발을 씻도록 준비해 둡니다.

그 당시 주인이나 손님들의 발을 씻는 일은 종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유대법에 따르면 종이 유대인일 경우에는 주인이 발을 씻겨 달라고 명령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천한 일이기 때문에 함께 하나님 백성 된 유대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 상전이 유대인 종에게 발 씻기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이기 때문에 상전의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닙니다. 상전 대접을 받아야 하는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신체 중 가장 더러운 지체가 발입니다. 발 씻어주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직접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사역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 모습입니다.
1)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하늘의 보좌로 부터 일어나셨습니다.
2) 겉옷을 벗고: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3) 수건을 가져다가: ‘수건’은 종의 신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인성을 입으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셨습니다.
4)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시기를 시작: 자신을 낮추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5)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결국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후, 다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섬김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입니다. 그런데 주님이신 예수님이 대속의 죽음으로써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낮아지고 섬겨야 하겠습니까? (요 13:13-15)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우리의 주요 선생입니다. 그 분이 발 씻는 섬김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질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며 군림합니다. 높은 자가 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질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깁니다. 높은 자가 낮은 자리에 내려가 섬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천국의 질서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2. 제자는 섬기는 삶을 삽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신 순간까지도 제자들은 ‘누가 제일 크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눅 22:24)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누가 제일 크냐’하는 문제가 제기 될 때에는 언제나 같이 제기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제일 작으냐’는 문제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난점이 있어요. 우리들 대부분은 누구나 다 제일 큰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일 큰 자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누구도 제일 작은 자가 되는 걸 결코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잔치에 모인 제자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발을 씻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발을 씻기는 사람이 제일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러운 발로 악취를 풍기며 앉아 있었어요. 이 문제는 마치 아픈 곳을 찌르는 것과 같아서 아무도 이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일 작은 자로 간주되거나 취급 받기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쥐뿔만한 자존심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 베드로의 입술에서 표출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데 베드로의 차례가 왔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었던 그는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6절)하고 묻고,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8절)하고 강력히 반대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저항하는 모습으로 부터 예전에 예수 믿기 전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이 씻김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죄인이라니요? 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살았어요. 이번 일은 제가 잠깐 실수한 것이지 죄 씻음을 받아야할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닙니다’ 이렇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자신의 더러운 발을 주님 앞에 드러내 놓기 원치 않았어요. ‘이 더러운 발을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주님 앞에 내어놓다니, 그리고 주님이 내 발을 씻어 주다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지요’ 이것이 베드로의 솔직한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몇 시간 후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시는 주님에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저를 위해 죽으시다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우리 인간의 자존심이요 교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없을 뿐더러, 다른 사람이 자기를 섬기겠다고 하면 불편해 하면서 극구 사양합니다. 내 자신이 남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 드리지 못해요. 왜냐하면 섬김을 받으려면 자신의 더러운 발을 내 놔야 하거든요. 자신도 씻음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거든요.

모든 인간은 천성적으로 교만해서 자신이 죄로 더럽혀져서 깨끗함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자신을 위해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고, 그 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한다면 펄쩍 펄쩍 뜁니다. ‘내게 무슨 죄가 그리 많으냐’는 거죠.

오직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주님, 맞습니다. 저는 부정한 죄인입니다. 더러운 죄인입니다. 주님만이 저를 구해 주실 수 있습니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겸손히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받아 누리는 사람만이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 길은 인격수양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고상한 윤리정신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발 씻겨주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7절)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 드리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자신도 십자가 형틀에 거꾸로 매달려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섬기는 자리에 내려가는 자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곳에 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도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삶을 삽니다. 냄새 나는 발을 씻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합니까?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 하기 싫어하는 일, 그리고 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고 감싸 주는 일 등을 말합니다. 이것이 공동체 모임속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연약한 지체를 서로 돌봅니다.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대접 받으려 하지 않고 대접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닮는 비결입니다.

3. 섬김의 동기와 열정은 사랑입니다

유월절 만찬이 벌어질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오. 이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할 시간이 다가왔어요.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마지막 만찬입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있어요. 이 복잡한 분위기 가운데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사랑은 유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는 대속의 죽음의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자기 발 씻는 것을 거절하자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러자 베드로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칩니다. “예수님! 그렇다면 내 발 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그러자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당시 만찬이나 잔치에 초대를 받은 손님들은 집을 나서기 전에 목욕을 합니다. 따라서 잔칫집에 도착하면 오는 도중에 더러워진 발만을 씻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베드로에게 상기 시켜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이 사실을 베드로라고 모를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베드로와의 대화를 통해서 세족식 속에 감추인 심오한 영적 의미를 가르쳐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욕과도 같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씻어내는 대속의 제사입니다. 자기 백성을 섬기려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섬김의 내용은 죽음으로써 그들의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완전한 변화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는 다시 죄를 짓게 됩니다. 오염되어 불결해집니다. 그래서 더러운 발을 씻기 위해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목욕을 한 사람에게는 목욕이 필요치 않지만, 더러워진 발을 씻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고백함으로써 더럽혀진 부분을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우리가 이런 주님의 깊은 사랑을 받게 되면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으로 불타오르도록 합니다. 나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성도들을 섬기게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은 섬기는 자에게 열정을 불어 넣어주는 에너지입니다. 사랑이 섬김의 동기와 열정입니다.

가끔 섬김을 잘 섬기는 교회인데도 그 끝이 다툼이나 분열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고,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하는 숨은 동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섬기면 섬길 수록 자기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래서 결국 갈등과 다툼을 불러 옵니다. 그런데 사랑이 동기가 되어 섬기는 섬김은 예수를 닮게 합니다. 교회가 평안하고 사람들이 행복합니다. 사랑이 섬김의 동기와 열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우리는 섬김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섬기십니다. 종이 주인보다 더 대접 받을 수 없습니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우리의 진정한 신앙적인 싸움은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천국 질서에 따라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 질서를 좇아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좇아가는 제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닮아가기 원하십니까? 그분이 먼저 본을 보이신 것처럼 섬김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