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는가 (01.07.2024)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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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는가 (01.07.2024)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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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30회 작성일 Jan 08 2024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4년 1월 7일
본문: 요한계시록 4: 1-11
제목: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는가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요한계시록 편지가 보내졌던 최초 수신자 초대 교회 공동체는 몹시도 견디기 힘든 혹한기를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칼날 앞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사람들의 오락거리로 전락해 짐승의 밥으로 사라집니다. 간신히 살아남은 신자들은 투옥되거나 사도 요한처럼 유배되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배교자들은 속출하고 공동체를 배반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은 정서는 무엇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상실감, 패배감, 두려움, 배신감, 분노, 슬픔, 버림 받은 느낌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처럼 실의에 빠져 주님께 등이라고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해 사도 요한이 유배지에서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그들의 두려움과 절망감을 한 번에 산산조각 내버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다시 믿음을 지키며 살 용기와 소망을 불어 넣어준 능력이 어디서 나옵니까? 무슨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로마 황제가 급사하고, 기독교가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어요.

변한 것이 있다면 한 가지 사도 요한에게 하늘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해 하늘 높은 보좌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계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사도 요한은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감격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태를 보았습니다. (계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빈 보좌가 아니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셨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위엄과 권세를 보이셨다는 표현이고, 또 그분이 지금 집무를 실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왕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은 로마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 학문, 종교, 건축할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로마를 향했고, 또 로마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습니다. 그리고 로마 중심에는 로마 황제가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하며 찬양과 경배의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로마 황제 권력자가 자신을 ‘주’라고 부르며 섬길 것을 강요합니다. 거기에 동참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철저하게 응징했습니다. 세상이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황제의 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목격한 장면은 로마 황제가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생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과는 전혀 비견할 수 없는 분이 왕으로써 온 천하를 친히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였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새롭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년 벽두 부터 터져 나온 뉴스를 보십시오. 일본에 일어난 강진으로 많은 사상자를 났고, 가자 지구와 우크라이나에서 계속되는 전쟁, 그리고 이란에 일어난 테러로 인해 온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우리 형편이 더 나아졌습니까? 우리 자신이 새마음, 새사람으로 달라졌습니까? 해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새해라고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2024년 한 해 동안 우리가 어디에서 살 힘과 용기를 얻고, 소망을 얻겠습니까?  그것은 초대 교회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가장 보편적인 길은 예배입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며 자기 존재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처럼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예배를 드리는 것 보다 더 위대한 경험은 없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첫주일 예배 시간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왜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 받기 원합니다.

1. 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될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합당하다는 영어로 ‘worthy’인데 ‘worthiness’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 대접 받을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worth-ship' 즉, worship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으로 인해 피조물인 우리가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엄한 자연을 보면 감탄을 하지요. 그랜드 캐년에 가보셨나요? 광야를 몇시간 달리다가 갑자기 땅이 꺼지고 눈앞에 그 장엄한 세계가 펼쳐질 때 절로 입이 벌어지며 탄성이 나온다. 와-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또 아름다운 꽃을 보거나 나무를 볼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을 합니다. 우리는 또한 훌륭한 인격과 아름다운 미덕을 보면 감동이 되어 칭찬을 합니다. 어쨌든 건강한 사람들은 장엄한 광경을 보거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면 반하게 되고, 진실이나 선을 보면 기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정서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거든요.

그런데 아름다운 자연을 보거나 아름다운 사건을 보고도 탄성을 터뜨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찬양하며 예배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만큼 깊게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런데 사도 요한에게 열려졌던 신령한 눈이 우리에게도 열려진다면 우리의 예배는 분명히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절을 보세요. “앉은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벽옥은 하늘빛을 가리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여줍니다. 붉은 빛 홍보석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죄인의 죄를 속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습니다. 녹보석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표시하는데 여기서는 영원한 생명이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줍니다.

이어서 5절은 온 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과 권세, 온 우주에 가득한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한 하나님 보좌의 장엄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나님의 장엄과 위엄, 권위와 능력과 심판을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성령님이 일곱이란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일곱이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도들의 고통과 비참, 억울함과 눈물을 다 알고 계십니다.

8절에서는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찬송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누가 감히 이 영광과 거룩의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11절에서는 이십 사 장로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 세상 만물의 창조주되시고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 권세자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데 하물며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경의를 표하는 것이 너무 너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절대 의와 선과 지혜와 은혜와 사랑이 있습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예뻐도 도덕적으로 깨끗치 못하면 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는 완벽한 진, 선, 미로 이루어져 있어요. 완벽하고 절대적입니다. (딤전 1: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때문입니다.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종으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까닭은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지으셨어요. 물론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스스로 충만하시는 분이시기에 외부로부터 그 어떤 도움이 필요하시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서 감사와 찬양과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일방적으로 주기만 해서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에요.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마음으로 쌍방간에 사랑이 교환될 때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는 거에요.

비극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그분의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신부를 생명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심정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저버리고 다른 남자의 품을 찾는 고멜의 추한 모습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은 세상이 주는 부와 쾌락과 일락이 좋아서 좋아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 예배를 명하신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세요.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 우리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친히 임재하시는 거예요.

참된 예배를 체험한 사람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예배에 생명을 겁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계속 하나님 얼굴을 바라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깨어지는 심장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다.

왜 우리는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예배드립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예배자의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절대 진리이시고, 절대 아름다움(美)이시며, 절대 선(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표현할 때 ‘영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 피조물이 취할 자세는 당연히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자의 자세에 대해 알려면 구약에서 히브리 단어 ‘샤챠(shachah)’와 신약에서 헬라단어 ‘프로스쿠네오(proskuneo)’를 알아두는 것이 좋습니다. 히브리 단어 ‘샤챠(shachah)’는 ‘절하다’는 뜻입니다. 헬라단어 ‘프로스쿠네오(proskuneo)’는 손이나 발등상에 키스를 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근동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왕이 보좌에 앉아 있고, 그 앞에 신하나 외국사신이 와서 왕에게 알현을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몸을 땅에 완전히 엎드리고 왕의 발등상이나 손등에 입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을 상상하시면 하나님 앞에 예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도록 우리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예배의 자리에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시 2:11-1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쁨과 두려움, 혹은 즐거움과 경외함,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된 감정인데도 예배자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선 피조물로서 당연히 경외심에 압도 될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분의 영광을 보고 감격과 감사, 기쁨과 희열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예배하는데 지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과 예배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한 번 사랑에 빠진 청년의 마음을 상상해 보세요. 그녀 때문에 인생이 달라 보이고 세상이 달라보입니다. 그녀 옆에만 있으면 행복해요. 그녀가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 한 번만 아니예요. 사랑의 열병에 끙끙 앓는 사람은 만날 때마다 말합니다. 금방 헤어지고도 전화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편지에도 씁니다. 그걸 고역이라고 생각합니까? 힘들어 죽겠다고 말합니까? 아니예요.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그렇게 못할까요? 하나님은 그것보다 몇천배 몇만배 몇억배 더 아름다우시고, 더 고귀하시고, 더 장엄하시고, 더 놀라운 분이신데...알면 알 수록,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새롭습니다. 갈 수록 더 놀라게 됩니다. 갈 수록 더 경이롭습니다. 이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분을 우리는 예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행하는 독재자나 변덕 부리는 이교신들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결론:
학생의 주업은 공부입니다. 직장인에게는 직장 일이 주업입니다. 주업에 집중해야지 다른 것에 한 눈 팔아 주업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학생이던지 직장인이든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배가 가장 중요한 주업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업인 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우리 교회가 첫 번째 교회 목표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로 정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 문득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심을 확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 부르짖어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이례적으로 자각하게 되는 순간을 갖습니다. 그분의 거룩과 영광 앞에서 압도되는 순간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예배 의전에 서투르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설교가 다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뭔지 모르지만 뭔가 우리 마음을 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마음 준비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이 담겨진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예배라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잠언서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잠 23:26).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신명기 6장 4절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인격이 담겨있는 예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고,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깊은 곳까지 통찰하십니다. 그래서 마음을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여러분은 예배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니까? 그분으로 인해 기뻐하십니까? 그분을 즐거워하며 찬송하십니까? 감격적으로 감사 기도가 터져 나옵니까? 오직 하나님께만 몰입하여 내 영혼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경험이 있습니까?

2024년에 매주일 예배 드릴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영혼에 불을 지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전율과 희열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 가운데 이런 감정과 느낌이 뒤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은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부족하다면 예배의 자세를 다시 점검합시다. 우리 내면을 살펴봅시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시다. 그분의 자비와 긍휼하심에 호소합시다. 우리에게 예배의 영을 부어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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