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01. 08. 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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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01. 08. 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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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9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1월 8일
*제목: 심히 두렵고 답답할 때 (창세기강해 야곱의 귀향편 1)
*본문: 창세기 32: 1-12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창세기 32:1-12

서론: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장애물과 역경의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절실하게 필요를 느끼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이나 힘입니다. 내게 그럴 힘이나 능력이 없다고 느낄 경우에 낙심하거나 좌절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힘을 추구하며 힘을 비축하려고 합니다. 특히 요즘같이 혼란스럽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무한경쟁시대에 생존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도대체 뭘 믿고,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가 당황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 집안 배경, 그리고 육체적 건강과 미모를 자신의 힘으로 삼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힘은 실로 막강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돈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있어도 건강을 상실하면 죽음 앞에서 벌벌 떨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성실을 믿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착한 심성과 강인한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노라고 자신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밤이 맞도록 거친 파도와 싸우며 최선을 다해 고기를 잡던 성실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뒤에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충성스럽게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훌륭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과 의리가 얼마나 강렬했든지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습니다. “주님!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때도 베드로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 결국 베드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의 맹세와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단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새벽 동이 터 오고 닭이 울 때 그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습니다. “내가 어찌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어찌 그처럼 비겁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이 아무리 인간성이 훌륭하고, 의리가 있고, 성실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선한 양심과 의지와 성실도 한계가 있습니다. 권력도, 실력도, 기술도, 재능도, 안정된 직장도, 배경 좋은 집안도,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건강조차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조금만 예상치 못한 일을 만나게 되면 우리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양심과 상식은 그 바닥을 다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21: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따르고 신뢰할만한 가장 확실한 우리 인생의 보루요, 반석이 되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믿을 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을 믿고 맡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크고 작은 일을 겪으면서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크고 강해지고 견고해 집니다.
 
야곱의 인생에 있어서 삶의 전환점이 되고,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장자권을 둘러싼 에서와의 갈등과 이로 인해 하란으로 도피하는 사건입니다. 둘째는 하란으로 도망 중 벧엘에서 한밤중 꿈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닥다리 환상의 사건, 그리고 세 번째는 얍복 나루에서 밤새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사건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는 세 번째 얍복 나루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 쪽으로 여전히 자신의 힘과 노력,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하며 살았던 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라며 어떤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는 자기 의지가 강하며 처세술이 능한 자입니다. 형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자답게 그는 속이는 자, 빼앗는 자, 훼방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얻게 되었을까요? 그가 믿음의 족장으로 우뚝 서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도 우리처럼 굴곡이 심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니 우리 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언제나 믿음이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 신앙인답지 못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도 그의 믿음은 점점 강해졌고, 견고해졌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인생에서도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처한 것처럼 심히 두렵고 답답한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어떻게 인생 문제를 대처하며 풀어가야 할 것인지를 배우기 원합니다.

1. 마하나임(1-2절)

야곱은 20년이라는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열 한명의 아들과 두 아내, 많은 재산을 거느리고 귀향하게 됩니다. 어쩌면 고생 끝에 마침내 성공하였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한껏 부푼 마음으로 고향을 향하는데 고향이 가까울 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커져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겠지만 에서와의 불화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고향에 가까이 다가갈 수록 불안감이 점점 커졌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죄책감과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괜스레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렇듯 죄의 씨앗은 오래갑니다. 어느 순간에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8:1에서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미리 야곱을 영적으로 준비시켜 주십니다. 외삼촌 라반과 헤어져서 고향을 향해 길을 가다가 하나님의 천사들의 무리를 보게 됩니다. 1절과 2절입니다.“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20년 전 에서를 피해서 도망치다가 벧엘에서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사닥다리 위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이 아니라 길에서 직접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천사들을 만났습니다. ‘마하나임’은 ‘군대’ 또는 ‘진영’이라는 뜻인데, 특히 ‘두 진영’이란 뜻이니까 두 무리나 되는 천사들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하나님의 천사들을 볼 수 있었을까요? 천사는 영이라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열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소에 못 보던 하나님의 군사들이 두 부대나 온 것을 보았습니다. 1절의 표현에 따르면, 야곱이 그들을 찾아서 본 게 아니라 천사들이 야곱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때에 천사들이 야곱을 만났을까요? 그것은 앞으로 야곱에게 닥칠 위험을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야곱은 잠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큰 위기에 닥칠 그를 지켜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 군대가 출동하여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야곱을 안심시키시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는, 아니 바로 몇 시간 후의 일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미리 체험하게 하셔서 우리를 준비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잘 간직하고 있으면 어려운 곤경 속에서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물론 걱정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은혜 없이 어려움을 맞이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평소에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코비드 상황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대면 예배로 드리던지, 아니면 온라인 예배로 드리더라도 계속해서 우리가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도하지만 또 할 수만 있으면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늘 사모하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쉽게 넘어지지 않게 되고, 그것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2. 에서를 만날 준비 (3-6절)

야곱은 에서에게 사람들을 미리 보내어 소식을 전달합니다. 야곱은 어떻게 해서든 에서의 심정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쓰고 있습니다.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5절)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오랜만에 만나는 쌍둥이 형제라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서로 얼싸안으며 반가워할 것 같은데 왜 야곱은 무서워서 설설 기는 것처럼 나올까요? 아주 깎듯한 예우를 갖추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적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처럼 자기 사자를 보내는 이유는 에서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하게 자기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며 에서의 이해를 구합니다. 이제 자기도 에서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될 만큼 재산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서 에서의 불필요한 의심과 염려를 없애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심부름꾼들이 무엇라고 합니까? 6절.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에서는 왜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무려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온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먼 길인데, 그리고 굳이 400명씩이나 몰고 올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실제로 에서가 야곱을 공격하여 복수하려는 것인지, 그 동기에 대해서 명확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거 일을 생각해 보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상황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전에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야곱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축복까지 가로챘습니다. 이런 야곱이 얼마나 미운지, 이를 갈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날 야곱 또한 죽는 날이 될 것이라고 칼을 갈았던 에서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란 땅으로 도망쳤던 것입니다.

그리고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과연 에서는 과거 일을 용서해 주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에서가 무력 시위를 벌이는 이면에 야곱에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야곱에게 그는 자신의 힘과 성공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서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쌍둥이 동생 야곱이었으니까요. 서로 경쟁 관계에서 자기는 늘 야곱에게 당하기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야곱에게 군사 400명과 함께 나타남으로써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야곱의 기를 확실히 꺾어 놓겠다는 의중일 것입니다.
 
3. 기도 (7-12절)

에서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7절과 8절입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즉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오던 길에 하나님의 천사들의 군대를 만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심한 두려움에 빠집니다. 야곱은 이제 ‘난 이제 정말 죽었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환영하러 오는 것인지 진짜 싸우러 오는 것인지 정확하지도 않은데, 미리 제 발이 저려 자신을 치러 온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꾀를 냅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종들과 양들과 소들과 약대들을 둘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피해서 반이라도 건져보겠다 생각합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야곱의 본 모습 그대로 입니다.
 
에서는 일종의 무력시위로 400명을 이끌고 오는데, 야곱은 그 소식만을 듣고서 아주 예민하고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의 마음 속에 에서와의 관계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일에 지나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과 관련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처가 다 나았으면 남에게 보여주어도 괜찮고, 남이 건드려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라면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싫고, 누가 그 일을 건들기도 전에 폭발해 버리는  과민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에서가 400명과 함께 온다는 소식에 야곱은 일종의 비상사태를 선포합니다. 사실 야곱은 비상사태를 넘어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머릿속에 벌써 에서가 쳐들어와 자기 가족들을 죽이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풍습에는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상대방 집안의 씨를 말리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야곱은 그런 경우를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무엇을 하러 오는지 확인도 안 된 상태에서 자기의 극단적 생각으로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온다는 소식 앞에서 야곱이 신앙의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핵심입니다. 아무리 지난 20여년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지켜 주시며 복을 내리셨지만, 막상 에서와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스스로 형편없는 존재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가 노리는 부분입니다. 문제가 닥치기도 전에 먼저 두려움으로 인해 신앙이 무너지고, 패배의식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이 마귀의 공격 지점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건보다 중요한 것이 해석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을 두루 살피고 돌아왔던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그들은 사내 대장부고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불신앙을 드러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가 올라가면 하나님이 취하게 하실 것이다’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만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고서 의기양양했던 야곱이 이제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인지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두려운 순간에 야곱은 두 떼를 나누며 자기의 방식으로 대처하였지만 그것만으로 안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과의 갈라지는 분기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이런 방법 저런 방식으로 문제에 대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저들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전전긍긍하다가 자포자기하거나, 끝까지 버텨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굳게 먹거나, 아니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찾아다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기에 다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부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실 이 정도의 두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가 잘 안 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 때문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해 보려고 이리저리 시도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는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야곱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9절.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하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야곱은 다시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회복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에 따라 이곳까지 왔으니 이 일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담대한 기도입니까?
 
둘째로,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20년 전에 이곳을 지나갔을 때에는 지팡이 한 개 밖에 없던 자기가, 지금은 두 떼나 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된 것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것들이 사실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겸손히 자기 힘과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자기 안에 있는 두려움과 고민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갈등과 고민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전에 이처럼 진실하고 간절하면서도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이 기도 안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지금 닥친 문제를 있는 그대로 아뢰는 솔직한 고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부터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입니다. 야곱과 같은 기도를 드리면 모든 위선과 거짓과 교만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야곱은 이 기도를 통해 승리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결론: 보안을 중요시 하는 중요한 건물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습니다. 은행의 금고는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문으로 2중, 3중 보안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자물쇠나 금고도 거기에 맞는 열쇠가 있으면 열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푸는 열쇠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 열쇠를 누가 쥐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문제해결의 열쇠를 우리가 건네받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 13:5-6)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장래에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터, 그리고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해 있습니다. 우주만물에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빛 가운데나 어둠 가운데나, 천상이나 지옥이라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어요.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기에 기도합니다. 고난의 때에 더욱 기도에 힘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분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응답은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또 아낌없이 베푸심으로 우리를 감격케 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끝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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