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선포하라 (1월 1일 2023년)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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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희망을 선포하라 (1월 1일 2023년)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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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51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1월 1일
*제목: 희망을 선포하라
*본문: 예레미야 31: 31-34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예레미야 31: 31-34

서론: 세계사의 격동 현장에 늘 함께했던 마가렛 하긴스라는 미국 출신 여기자가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녀를 보고 남자 기자들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대담함을 바탕으로 위험하고 중요한 많은 순간들을 사람들에게 기사로 전해서 미국 최고의 언론 출판상인 퓰리처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그 상을 안겨 준 것이 바로 한국전쟁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터 곳곳을 누볐는데 인천상륙작전에도 직접 참가해 몇 시간 동안 군인들과 함께 빗발치는 폭탄과 기관총을 견뎌낸 덕분에 아주 긴장감 넘치는 기사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하 40도에 이르는 강추위와 폭설 속에서 연합군과 중공군이 맞붙게 된 전투를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맛보지 못한 추위와 눈 앞에 놓인 죽음의 공포에 떨며 피로가 가득 쌓인 병사들이 꽁꽁 언 통조림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마침 그녀 옆에는 키가 무척 큰 한 병사가 지친 표정으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서 있었습니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없이 그저 순간순간을 견디고 있는 병사의 표정을 보고, 그녀는 그가 지금 어떠한 심정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당신은 제일 먼저 무엇을 요구하고 싶습니까?”

병사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잠시 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아직 희망이 살아 있다면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의 불길이 꺼진다면 더 이상 살 의욕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절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참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오늘 예배후 우리는 떡국을 먹게 될 것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떡국을 먹는다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이 점점 부담스럽고, 두렵기 조차 합니다. 우리만 그런 느낌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광해군이 출제한 과거시험 중에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문제가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데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이에 대해 이명한이란 분이 ‘인생은 부싯돌이 불처럼 짧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10년의 세월이 어느 날인들 아깝지 않겠습니까마는, 유독 섣달 그믐날에 슬픔을 느낍니다. 그것은 하루 사이에 묵은 해와 새해가 바뀌니, 사람들이 날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로 따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날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사실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고, 그 해가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늙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새해 첫날에 첫주일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무슨 희망을 품고 있습니까?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겠지만  대부분 새해라고 해서 무슨 특별한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두렵기 조차 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2023년 새해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1. 불행의 원인

다른 선지서들도 마찬가지지만 예레미야서를 대충 읽어보면 매우 암울한 색조를 띠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끔 희망의 햇살이 간간히 비취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관한 멧세지가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부르심에서 이미 예고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렘 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의 사역과 멧세지는 먼저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 파괴적이어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언약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 바알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백성으로 걸어가야 할 유일한 길 “토라”(가르침, 율법)을 떠나 다른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중한 병을 앓고 있는 백성에게 거짓된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예수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를 구호삼아 외치며 사람들에게 건강과 번영의 축복만을 약속하는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짓된 평화를 선포하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은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들 모두 자신들의 부패한 삶을 합리화시키며 하나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서운 심판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르심을 받고 사역하던 예레미야의 멧세지는 당연히 죄에 대한 심판 선언과 죄로 인한 재앙과 위협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건설하며 심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사역으로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값싼 은혜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이 값싼 은혜일까요? 2차 대전 때 히틀러에 의해 처형당한 독일 목회자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설교하는 것이며, 교회의 권징을 시행하지 않으면서 세례를 베푸는 것이며, 죄를 고백함이 없이 성찬에 참예하는 것이며, 개별적으로 죄를 고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도가 없는 은혜이며,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며, 살아계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본회퍼는 죄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회개를 통과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눈이 뜨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많이 듣고서 이미 배부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에 대한 갈증과 목마름은 그 어느 때 보다 더 심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없는 가운데 싸구려 은혜로 스스로 속여 왔던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죄에 대한 적절한 정의를 내린다면 죄는 하나님을 향해 대항하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주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반항과 도피, 하나님께 대들거나, 아니면 그 하나님이 싫어서 멀리 멀리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드는 행위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먼 곳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2. 옛 언약의 파기

그런데 구약성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특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다고 말합니다. 언약, 파기 이 두 단어는 법정에서 쓰이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보다 인격적 면이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언약 파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파괴, 훼손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언약, 즉 약속은 당사자의 인격에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지극히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상호신뢰와 성실성으로 약속은 견고해 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파기되면 가장 허망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배신했다는 말로 비통해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로 열방 중에서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구원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태두리 안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행위를 통해 이 세상 민족들이 의와 구원, 복과 평강, 길과 진리, 빛과 생명에 대해서 배우고 열망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명이자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소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은혜의 자리에서 추락했습니다. 그들은 언약 파기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들었어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언약 백성 유다의 형편을 다양한 모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먼 곳으로 가버린 탕자와 탕녀로, 신실한 남편의 품을 떠나 다른 정부를 쫓아간 불륜과 행음의 여인으로, 아니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썩어 들어가는 불치병의 환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 자신은 정작 이런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예레미야를 비롯한 몇몇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임박한 심판의 날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제국에 의해 함락될 처지에 놓입니다. 이제 곧 수많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강제로 바벨론에 끌려갈 것입니다. 남유대 다윗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페허더미가 될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가 깨지고, 그로 말미암아 언약의 축복 대신 저주가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계 정치와 군사적 정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즉 영적인 문제입니다.

3. 희망의 메시지

그런데 멸망이 심판의 최종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건설하며 심기 위해서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는”사역으로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재앙과 심판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 장차 일어날 일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평안과 안녕,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 이것은 단순히 포로생활에서 자유인이 되어 고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신실하심이 결국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할 것이다.” 복된 소식, 이것이 예레미야가 암울한 시대에 이스라엘을 향한 희망의 멧세지입니다.

그 희망의 멧시지는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렘 31: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왜 새 언약이 필요합니까? (렘 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새 언약의 반대는 옛 언약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도달하였을 때 온 마음과 정성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에게만 충성하겠다고 맺었던 언약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무참히 파기되었습니다. 더렵혀졌습니다. 따라서 그 효력이 상실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예식을 치루고, 결혼 증서에 싸인을 하여 합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쪽이 부부의 도를 버리고 불륜을 저지를 때, 비록 결혼 증서에 사인을 했지만 그 실질적 가치와 의미와 효력은 상실한 상태입니다. 결혼 서약이 더렵혀진 것입니다.

이처럼 옛 언약이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늘 신실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새 언약은 옛 언약이 용도 폐기 되어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의 깨어진 언약을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외형적으로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기는 했지만 내면적으로 그들은 여전히 죄의 노예 생활로 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죄의 노예가 되어 옛 언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으로는 그들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가령 말을 시냇가에 까지 끌고 갈 수 있으나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 하였지만, 그 자유를 부르심을 받은 대로 선한 일을 위한 자유로 사용하도록 강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자유인이 되었으나 내면적 마음과 생각이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옛 언약은 파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의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돌에 새기지 않고, 사람 마음판에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하나님을 알라고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새 언약을 새 언약답게 만드는 요소는 바로 ‘죄의 용서’입니다. 만일 죄의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죄와 형벌’이라는 두 축에서 왔다갔다하는 비참한 신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악순환의 고리는 용서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용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난 후 발생하는 죄책감과 그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료하고, 그에게 희망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시고, 깨어진 삶을 치료하시고, 아픈 상처들을 싸매십니다. 죄 많은 인생, 죽음의 형벌만이 기다리는 인생에게 “용서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4. 새 언약의 축복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옛 언약대신 새 언약으로 대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삶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고후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우리는 한 때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마음으로 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능력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가능합니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갑니다.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물론 아직 새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충만하게 성취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게 순종하게 되는 일은 아직도 앞으로 되어질 일입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 영광의 몸으로 홀연히 변화될 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때입니다. 그래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혹은 이런 것들이 없이, 걸구하고 흠이 없는 자들로”하나님 아버지 앞에 세우실 때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언약의 백성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우리가 희망을 품는 것은 우리가 새 언약의 백성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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