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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홀로 남았을 때 (01.29.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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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2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1월 29일
*제목: 홀로 남았을 때 (창세기강해 야곱의 귀향편 2)
*본문: 창세기 32: 13-24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창세기 32:13-24

서론: 1975년에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스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고상문씨가 노르웨이 여행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속아서 납북되었다는 뉴스입니다. 남편이 납치될 당시 그의 아내는 결혼한지 1년을 넘긴 새댁으로서 임신 중이었습니다. 언젠가는 남편이 석방되어 돌아올 것을 꿈꾸며 태어난 딸을 키우며 20년을 하루 같이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북한의 한 소식통을 통해서 자신의 남편이 북한에서 결혼하여 아들딸 낳고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배신감과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슬프고 극단적인 스토리이지만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이민자의 삶은 기본적으로 외롭습니다. 한 때 북적북적하던 가족도 자녀들이 장성하여 뿔뿔이 흩어지면 집 안이 적막합니다. 연로하여 병원에 들락거리다 병석에 누워 보십시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다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면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그후의 삶은 극도의 외로움과 싸워가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은 언제나 홀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평소에는 주변에 사람이 많고, 도움이 될 것 같은 사람이 많아도, 진짜 위기의 순간이 오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위기의 강은 홀로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위기 앞에 설 때 외로움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그 외로움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우리가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불안정하고, 허약한 나를 대면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둘러싸여 있을 때는 내가 누구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홀로 설 때 비로소 나의 참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야곱을 코너로 몰아넣어 홀로 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연줄을 끊어지게 하고, 그가 의지하던 것들이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야곱은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힘껏 노력하며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팥죽으로 형의 장자권을 사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어요. 그리고 하란 땅 외삼촌 라반에게 도망갑니다. 가는 길에 베델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꿈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 받는 꿈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새로 거듭나는 사건과도 같았습니다.

이것으로 야곱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20년 동안 혹독한 연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자기 보다 한 수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두 딸을 이용해서 야곱을 실컷 부려 먹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양 떼와 염소 떼를 위해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서는 추위를 당하며 도적을 지키기 위해서 눈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습니다. 이러는 중에도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습니다. 이제는 속이는 자가 아니라 속는 자가 된 것입니다. 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셔서 야곱도 큰 재산을 모으고 고향 길을 향하여 갑니다.

그런데 이후 야곱의 행적을 보면 여전히 그의 성품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받았어도 여전히 변화 되지 않은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대신에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와 경험을 더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이 홀로 남도록 막다른 길로 몰아붙이셨습니다. 홀로 남았을 때 비로서 자신에 대해 정직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가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우리는 보통 때에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삽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홀로 남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분 말씀을 경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얍복 나루는 야곱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인생 터닝 포인트 입니다.

우리는 홀로 남겨지는 날이 찾아올 때 외로움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잘못된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이 든든히 서는 기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과 인격과 삶을 새롭게 다듬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다 더 나은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서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1. 화해를 위한 제스처

고향이 가까워질 수록 점점 야곱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까맣게 잊었던, 아니 잊고 살았던 형 에서와의 불화 관계였습니다. 형 에서의 존재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조금씩 조금씩 더 커졌습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문제를 해결해 오던 방식대로 먼저 형 에서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서 화해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갔던 심부름꾼들이 황급히 돌아와서 전하기를 형 에서가 부하 사백명을 거느리고 주인 어른을 만나려고 이리로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입니다. 야곱에게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소식이었어요. 야곱은 만약을 대비하여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꾀를 냅니다.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종들과 양들과 소들과 약대들을 둘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쪽을 치면 다른 한 쪽은 피해서 반이라도 건져보겠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해 보려고 이리저리 시도하기에 급급하다 보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행길에서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의 ‘마하나임’에서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붙잡는 기도의 줄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야곱은 또 다른 화해의 전략을 세웁니다. 그것은 예물을 미리 보내어 에서의 마음을 풀려는 것입니다. 과연 야곱 답습니다. 그런데 그가 택한 예물은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암염소가 200마리, 숫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숫양이 20마리, 젖 나는 약대 30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가 20마리, 새끼 나귀가 10마리 입니다(13-15절). 야곱의 화해를 위한 예물은 전체의 숫자가 무려 550 여 마리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빈털털이로 하란 땅으로 도망쳤던 야곱이 이렇게 많은 예물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야곱이 아주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잘했다는 것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는 많은 예물을 희생하면서 보낼 만큼 야곱은 형 에서와의 화해를 절실히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막대한 분량을 아낌없이 예물로 보낸 것에 대해서 무작정 비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화해의 필요성에 대해 야곱은 절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각오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화해의 예물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이 불화한 관계를 해소하려면 우리에게도 희생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우리가 큰 희생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심으로 완전히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롬 3:25; 5:10). 그 결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원수 되었던 관계는 십자가로 소멸되었습니다(엡 2:3, 16).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 되심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요일 2:2). 에베소서는 이것을 두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중간의 막힌 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허물어졌다고 선언합니다(엡 2:14). 전에는 원수처럼 취급되었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한 몸을 이루는 화목의 새로운 관계가 된 것입니다(엡 2:13; 15).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로 직책을 주셨습니다(고후 5:18-20).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그런데 화목하게 하는 직책은 대접받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화목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자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마 16:24).

야곱은 화해의 예물을 잘 준비하여 일차, 이차, 삼차에 걸쳐 자기보다 앞서 가게 합니다. 이것은 예물로 먼저 형 에서의 분노를 풀어주고 난 후에 만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선물을 실은 떼를 먼저 보낸 날 한 밤중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과 함께 얍복 강을 건넜어요. 그리고 가족들과 소유한 모든 것을 앞서 보내고 야곱만 홀로 얍복 나루에 남았습니다.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고독한 시간을 맞이합니다. 그는 지혜를 다 짜내서 자기에게 다가온 위기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심한 고독과 공포가 그를 엄습해 오고 있었어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홀로 있는 시간의 축복

신앙세계에서의 역설적인 진리는 인생의 위기가 때로는 최고의 축복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에게도 인생의 최고 위기가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위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가 모든 것을 다 떠나 보낸 후 홀로 남아있었을 때였습니다. 23절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며 소유를 건네고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홀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 야곱과 에서 간에 있었던 사건은 에서에게는 분노, 좌절, 복수심을 품게 한 깊은 상처의 사건이었고, 야곱 자신에게는 부끄러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에서와의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영원히 기억 속에서 묻어버린 것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야곱의 귀향 길을 가로막는 가장 중대한 사건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야곱은 지난날의 고통과 아픔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사건을 그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해결하려고 했어요. 아마 그의 형 에서를 지난 날과 똑같이 어리석고 단순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형 보다 자기가 언제나 한 수 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꾀, 모사로 능히 자기 앞에 닥친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그렇게 쉽사리 넘어갈 수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냥 덮어두거나 에서로 부터 도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아니라도 언제가는 꼭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부채입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하지 야곱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자신은 누구보다 능력 있고, 위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으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가족을 이루고 큰 부를 일궈서 자신이 뭔가 된 듯하여 우쭐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에서가 공격해 온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처럼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맞이할 때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자신의 가면이 벗겨지고,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실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모습이예요. 내 모습이 아니라고 합고 싶어요. 외면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자기 진짜 모습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게 대면하기를 두려워했던 우리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회피해 왔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아파할 줄도 몰랐고, 울 줄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변화라는 값진 선물도 없었어요. 우리가 기껏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안은 가급적이면 그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겉을 잘 포장하는 일었습니다. 때로는 속사람이 울고 있음에도, 사람들 앞에서 웃어야 했어요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아무 일 없는 듯이 행동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병든 영혼의 모습이요. 치유되고 회복되어야할 영혼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다 떠나보낸 후 야곱은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출세나 성공의 거품을 걷어낸 후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도 홀로 있는 시간이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홀로 있는 자리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앞에 서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최근에 홀로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으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참모습을 들여다 본 적이 있으십니까? 캄캄한 밤에 불안과 공포로 벌벌 떨고 있는 초라한 영혼을 보셨습니까? 수치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불쌍한 영혼을 보셨습니까? 이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놓을 때 우리 내면세계가 치유가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홀로 있는 시간이 축복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홀로 하나님 앞에 서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때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정말 두렵고 떨리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들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이 벌거벗은 듯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다고 합니다.(요 1:9) 빛은 드러내는 속성이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에 속하고,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요 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어둔 곳에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그리고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빛으로 나오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은밀한 것이 탄로 나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을 더 좋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빛 앞으로 나옵니다. 빛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속에 은밀한 부분을 다 드러나게 합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마치 X-ray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의지하고, 자신의 열심과 노력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실상 내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고 추구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한 없이 커지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없이 높아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남을 짓밟더라도 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을 부리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처럼 절박한 상황에 처하여 홀로 남겨 되었을 때 비로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외롭게 하실 때는 고통스럽지만 이를 받아 드리고 그 가운데 가난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깊어지고, 자신이 새롭게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사람들이 왜 외로움에 견디지 못해 고통스러워 할까요? 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롭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픔이나 고통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럴 때 진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에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아픔, 슬픔, 고통과 외로움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철저히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 느낌과 감정에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오늘 이 아침에 나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하고, 외로움과 씨름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오늘의 고통이 아무리 심각하고, 오늘의 방황이 아무리 어렵고, 오늘의 좌절이 아무리 눈물겹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이해하시며 떠나지 않으신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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