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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영광과 고난 (10.01.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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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56회 작성일 Oct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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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10월 1일
본문: 로마서 8: 17-25
제목: 영광과 고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사람들은 흔히 복과 고난이란 함께 양립할 수 없고, 서로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복이 있으면 고난이 없고, 고난이 있으면 복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증 집회에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옛날에는 가난했는데 비즈니스가 번창하여 이렇게 부자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물론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간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이라면 동시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을 똑같이 강조해야 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비록 병이 낫지 않아도, 오히려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 더 많이 봉사하며 신실하게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도 자랑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점점 듣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과 축복만을 듣기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논리는 복 속에 고난이 있고, 고난 속에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또 (막 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잘 믿으면 이 땅에서도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의 약속을 받지만,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먼저 고난을 겪으셨고,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렇듯 기독교의 신앙에는 고난과 고통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고난에 대한 이런 이해가 있었기에 사도들은 직접 고난을 당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께 위험이 피해 가도록, 그래서 편안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행 4:29). 사도들은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투옥되기 일쑤였고, 굶주림과 헐벗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고난이 없어지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받는 박해를 기뻐했습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히브리서 11장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그중에는 믿음으로 적들을 무찌른 기드온, 삼손, 다윗과 같은 용장들이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에 맞기도 하고, 결박을 당하거나 톱으로 켜이기도 하며 순교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고난을 당한 것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에서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줄 아는 것이 신앙의 안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영광과 고난이 함께 간다는 것을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그날까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과 고난이 함께 갈 것입니다.

1. 영광에 이르는 디딤돌, 고난 

예수님과 제자들이 살았던 시대는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양자제도가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이저 율리시즈는 누님의 아들인 19살 조카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서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그가 훗날 로마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 자신도 양자였지만 또 티베리우스라는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황제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폭군 네로왕도 양자로 입양이 되어서 황제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벤허가 누명을 쓰고 배의 노를 젓는 노예생활을 하게 됩니다. 손과 발이 묶인 채로 배 밑창에서 노를 젓다가 전쟁에 돌입합니다. 배가 파선하자 벤허는 그 배에서 빠져나와 로마의 장군을 구하게 되고, 그 장군의 양자가 되어 함께 로마에 입성합니다. 장군은 벤허에게 반지를 끼워 줌으로써 아들로서 모든 권한과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노예라고 할지라도 양자가 될 수 있어서 한순간에 인생역전을 맞이할 수도 있는 시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로마서 8장 14절-15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노예임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전에 마귀의 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친밀하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움이 우리에게 있지만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피할 수 없는 고난도 함께 합니다. 고난은 말 그대로 괴로움과 어려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고난을 피하고 싶지만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자녀이면 상속자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18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의 고난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집니다. 이 고난이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염려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터널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고난의 폭풍우가 지나면 반드시 찬란한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은 짧고 영광은 깁니다. 고난은 잠시요 영광은 영원합니다.

‘생각건대’ 바울은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 받을 기간은 기껏 해야 5, 60년입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릴 것은 수 천, 수 만 년, 아니 영원토록입니다. 그런데 고난 없이는 영광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행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에게서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입니다. 뜨거운 한증막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견디는 까닭은 몸에 노폐물을 제거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 1:6-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불순물이 섞인 금을 어떻게 정련합니까? 강력한 풀무불에 집어 넣습니다. 다 녹여서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한 후에 순금을 얻습니다. 우리 믿음이라는 금 속에는 매우 많은 불순물이 끼어 있습니다. 이 불순물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금을 정련하듯이 연단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71절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욥기 23:10절에서도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영광에 이르는 디딤돌입니다.

2. 고난을 이기게 하는 소망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의 과정을 보면 먼저 히브리 사람들의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의 수효가 날로 더욱 번성해 가자 이를 두려워해 더욱 혹독한 일로 그들을 괴롭힙니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굽게 하고, 여러 가지 고된 농사일로 그들을 잔인하게 혹사시켰습니다. 그 고역이 너무나 혹독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를 호렙산에서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보내십니다.

애굽은 항상 물을 공급할 수 있는 나일강이 흐르고, 나일강 하류 삼각지는 상류에서 실어 나르는 토사로 인해 아주 비옥한 토지입니다. 그래서 가뭄과 굶주림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물이 넉넉하여 초장이 펼쳐 지는 애굽의 고센 땅이 에덴 동산과 같습니다. 그래서 애굽을 떠날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혹독한 고역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환경이 되자 드디어 에덴 동산같이 여기던 애굽을 떠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 고난이 없다면 우리도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이 마치 천국이라도 되는 것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세상의 안락함과 편리함에 만족하며 살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폭풍이 몰려옵니다. 위협적인 파도가 엄습합니다. 직장에서 해고 되고, 자녀의 결혼 생활이 위태하고,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올 때 불현듯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고난의 날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들이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본래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온 만물이 창조 목적대로 지음을 받아서 그 존재 의의를 충분히 나타냄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처럼, 만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선하심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들에 있는 작은 꽃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거기에 섬세한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0절, 22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허무’라는 말은 의도된 목적을 이루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우리는 허무한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지음을 받을 때 본래 가졌던 그 의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를 허무한데 굴복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우주를 창조하여 인간에게 완벽한 환경을 만들어 주셨는데 지금은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7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누가 저주를 받았습니까? 땅입니다.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피조물의 잘못입니까? 아닙니다.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아담이 잘못하여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원래 창조 목적대로 존재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는데 이제 허무한데 굴복함으로써 신음한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만물이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로 예수님의 재림까지 온 만물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겪는 산고의 고통과 같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지르는 신음소리가 온 우주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사람들은 천연의 미,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자연은 미(美)가 아니라 추(醜)이다. 조화가 아니라 혼란이다. 평화가 아니라 전쟁이다. 야산에 피는 백합화가 아름답지만 꽃잎 뒤에 붙어 있는 촌충과 벌레의 모습은 얼마나 살벌한가? 뱀은 개구리를 잡아 먹고, 개구리는 벌레를 잡아 먹는다. 뱀을 노리는 독수리가 있고, 독수리 알을 노리는 또 다른 동물이 있다. 고양이가 쥐를 희롱하는 모습, 족제비가 닭을 쫓는 모습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실로 귀를 땅에 대고 들어보라. 자연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는가? 가로되 ‘나는 아프다. 나는 고통스럽다. 나를 빨리 구원하라. 너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움에 들어가기를 원하노라’고 외치지 않는가?”

이렇게 온 만물이 탄식하며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있는데 21절에 의하면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의 원인이었고, 지금도 문제의 원인이 되는 인간들이 모든 부패와 거짓과 어리석음과 죄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그곳에 만물들도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피조물들의 진정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자녀들의 구속입니다. 더 이상 썩어짐의 허무에 굴복하지 않을 몸으로의 속량입니다. 23절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 몸이 육체의 장막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덧입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옛성품이 여전히 남아 있어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또한 모순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그 영광의 날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고난 중에서 오래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소망으로 고난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

3. 복음의 처방약

그런데 하나님은 만물이 학수고대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구속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으로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영광스러운 날을 바라보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구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통해서 만물까지 회복시키십니다. 만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렇게 만물을 회복시키는 중대한 사건입니다. 물론 아직 우리는 완전한 회복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그날이 오면 그 영광스러운 자태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될 것입니다. (엡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작정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통일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소망하는 우리는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며 오래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성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용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서로에 대한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데 차가 밀립니다. 알고 보니 공사중입니다. 이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시비 걸지 않습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참습니다. 공사가 끝나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서로에 대해 용서하고 용납하며 참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그분을 작품을 만들어 가고 있는데 여기에 대고 불평하고 타박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더디다, 별로다, 만족하지 못하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25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결론: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상적인 체제를 만들려고 해도 안 됩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편리한 시대가 되어도 죄의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고난이 없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야 합니까?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는 보이는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 몸이 구속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그 날 비로소 고난으로부터 해방될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계시록 21:1-4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재림의 그날을 소망하며 참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영광스러운 날이 지금 가까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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