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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 (10.08.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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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61회 작성일 Oct 09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10월 8일
본문: 로마서 8: 26-27
제목: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성령님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과감히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그가 175세에 숨을 거두기 까지 100년의 세월을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이었지만,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런 소망이 있었기에 자신의 조카 롯과 갈등이 있었을 때 관대함으로 그에게 양보했습니다. 롯이 위험에 빠졌을 때는 적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 당할 소돔 성을 두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중보하였습니다.

물론 두려움에 빠져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한 적도 있었고, 그것도 두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다림이 길어지자 아예 자신의 종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심지어 사라의 조언을 받아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길에서 포기하거나 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의 정상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는 수식어와 ‘하나님의 벗’ 이라는 놀라운 별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약 2:23).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이 모든 것을 아브라함의 공으로 돌리지 아니한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믿음의 행위에 촛점을 맞추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고, 키워 주시며,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습니다. 그를 인도하셨고, 그를 위해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그의 삶에 함께 하셨고,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이루신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워 하거나, 낙심하여 믿음에서 후퇴할 때마다 하나님은 직접 그에게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고, 이전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믿음으로 잘 감당했을 뿐입니다. 그를 믿음의 정상에 서게 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게 해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이 진리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세우기 까지 멈추지 않고 열심으로 역사하신다는 진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죄의 문제는 인간의 차원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난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세상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부정해도 소용없습니다. 결국 누구나 죄의 삯인 사망을 맞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인생 위에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이 왕노릇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죄의 법 아래 놓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습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에 대한 나의 죽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어 이제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다시 살아서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공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열심이나 헌신으로 공헌한 것이 일절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는 실존적 고뇌와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에도 현실에서는 그 완전한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합니다. 번번히 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절망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를 지을 수 없는 영역으로 옮겨졌고, 또 죄를 지어서도 안되는데 신분인데 현실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상황과 같다는 사실을 이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니 마땅히 샬롬을 완전히 누려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가나안 원주민 일곱 부족들과 싸워야 하는 현실과 마주쳤습니다. 만약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면 옆구리에 가시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샬롬을 누리려면 그들을 진멸하기 까지 끝까지 싸워 쫓아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죄와의 싸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그날에 우리의 몸까지 완전히 구속해 주시기 까지는 우리는 죄와 잘 싸워 이겨야 합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죄를 죽이는 싸움은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의와 희락과 평강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지 없는지가 달린 관건입니다. 죄와 잘 싸워 승리하면 우리 마음에 샬롬이 이루어질 것이고, 잘 싸우지 못해 패배하면 두 눈이 뽑힌 채 끌려다니며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삼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망하지 않도록 끝까지 책임을 져 주십니다. 그분의 열심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8장 1절과 2절에서 우리는 위대한 선언을 듣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확신하고, 이 믿음을 가지고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몰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했던 일곱 부족들이 만만치 않았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죄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가공할 만한 세력으로써 교묘하게 끈질기게 저항합니다. 더구나 우리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와의 싸움에서 크게 괴로움을 겪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조그만 머리통 속에 얼마나 많은 근심과 걱정이 담아져 있는지 모릅니다. 또 우리의 무지, 세속적인 생각, 이기주의, 언행불일치, 공허한 마음과 실망, 성격적인 결함이나 약점들, 이 모두가 우리의 연약함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거룩한 성도이면서도 죄에 무력한 약한 자입니다.

성령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여기있습니다. 연약한 우리 육신에 성령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으로 덧입혀 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과 공허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필요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과 부족이 오히려 성령의 역사하시는 조건이 됩니다. 한 번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계속 도우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령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깨닫고, 우리 믿음이 견고해 지며 담대함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질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쉽고, 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롭게 거듭났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동안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버리지 못한 채로 연약한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서 돕는 자, 보혜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보혜사는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돕는다는 것은 ‘함께 담당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함께 동등하게 담당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설교자 챨스 스펄전은 이런 성령의 도우심에 대해 재미 있는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노 젓는 법을 가르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노를 저어 보라고 시킵니다. 아들은 어설프게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노를 저어보지만 자기 키보다 더 큰 노를 주체하지 못해서 쩔쩔 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들 곁에 와서 아들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고, 노 젓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 뒤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아들의 작은 손 위에 자기의 큰 손을 얹고, 노 젓기를 시작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노를 젓는 대로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노 젓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노를 함께 저어 주는 아버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고,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를 저을 때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마음에 성령을 모셨다고 해서 우리의 연약함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있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그 분의 도움을 따르려고 할 때에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은 연약한 우리를 돕기 위해 오셨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 머물게 하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육체에 가시가 있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복음 사역이 방해 받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이었습니다. 우리가 더 멋있고, 더 훌륭하고, 더 능력이 있어야 더 크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부족함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여 도우심을 구하기 때문에 성령님이 역사하여 온전케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2.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는 성령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 주일에 로마서 8장 본문에서 신자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자녀이면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그 다음에 등장하는 탄식에 대해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맥아리 없는 탄식이 아닙니다. 한심해서 나오는 한숨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망과 갈망이 담긴 탄식입니다.

먼저 온 피조세계가 썩어짐에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열망하면서 지금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탄식하고 있습니다.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몸이 언제 온전히 구속될 것인가, 그 구원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성령님도 탄식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어야 할 것을 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면서 탄식합니다.

왜 모두가 탄식하고 있습니까? 아직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와 그 나라가 이 땅에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을 갈망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소망하는 세상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게 뒹구는 세상입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가 없는 세상입니다. 칼을 쳐서 농기구를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상입니다. 정의가 강물같이, 공의가 마르지 않는 시내같이 흐르는 세상입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세상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겨 주는 새로운 질서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세상입니다.

아직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갈망하며 깊은 탄식과 신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망이 가득한 탄식이 아니라 소망이 있는 탄식입니다. 소망을 잉태하고 해산하는 탄식입니다.

3.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 영적 무능력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탄식과 고민과 열망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져가 우리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

가끔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하는 말을 듣습니다. 새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분이라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대표 기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인 바울이 그렇게 말한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의 편지에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기도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26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데는 분명히 다른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누가 기도할 줄 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기도에 정통한 사도 바울이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가 어찌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은 우리 목회자들에게 더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공적으로 기도를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기도한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한 전문가입니다. 그래서 종종 “목사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겠습니까?”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와 부패의 결과로 비천하고, 비루한지, 그리고 궁핍함의 깊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진실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두움의 실체에 대해서도 더더욱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잘못된 판단에 기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높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28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일을 성취하실 지를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생각들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분을 믿고 따르며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르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혼의 깊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빙산일각(氷山一角)이라는 한자 숙어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얼음덩어리가 바닷속에 잠겨 있고, 그 일부만 바다 위로 올라와 있는 모습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위로 올라온 일부 얼음만 봐서는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아래 물속에 어마어마하게 큰 얼음이 잠겨 있는 것입니다. 이 용어는 주로 부정이나 범죄에 관한 문제를 분석하면서 많이 인용합니다. 얼핏 보기로는 아주 작은 일 같지만 알고 보니 아주 큰 범죄가 숨어 있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 실상 매우 적은 부분만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빙산의 일부분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의식 세계 만을 보고서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나머지 부분, 무의식 세계는 보지 못할 뿐더러 그 부분이 얼마나 거친 세계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 세계는 격정과 욕망, 본능과 충동이 가득 한 거친 세계입니다. 넓고 크고 거친 원시림 속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맹수가 숨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기도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과연 누가 우리 영혼 전체를 하나님 앞에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 성령님 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우리 영혼의 의식세계 뿐만 아니라 잠재의식 세계에도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27절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으로 도우시는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할 때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 주십니다.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끔 무조건적으로 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몰라서 내 뜻대로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친히 우리를 위해 탄식하는 기도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또한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불완전한 기도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결론:

지금 온 세상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고, 우리 자신도 탄식하고, 성령 하나님도 탄식합니다. 우리 홀로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하나님도 우리의 탄식에 함께 동참하여 탄식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이요, 우리의 힘과 위로의 원천이 아니겠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낙심하여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영광의 그 날을 바로 보고 있습니다. 그 날이 하루하루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날에 이르기 까지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 짊어지시고, 탄식과 함께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감사와 찬양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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