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 (09.24.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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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 (09.24.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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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99회 작성일 Sep 25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9월 24일
본문: 로마서 8: 10-17
제목: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
설교자: 이강웅 목사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고민이고 갈등은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충동을 받은 육체의 소욕입니다. 이 죄의 욕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여전히 내 안에 죄의 소욕, 육체의 욕심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또 실제로 죄에 넘어져서 괴로워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솔깃한 제안에 현혹되기 싶습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이제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뭔가 내 삶과 생활을 붙잡아주는 규칙과 규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율법의 틀이 있어야 죄에 넘어지지 않지, 그냥 은혜의 복음만 가지고 신앙생활하기에는 너무 막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신앙의 행위를 강조하게 되고, 이로 인해 공로의식을 갖게 됩니다. 주일성수하고, 술 담배하지 않고, 새벽기도하고, 헌금생활 잘하고…이것들이 어느새 자기 의가 되어 교만해 져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라새인들이 빠진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도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이방인 너희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제대로 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리가 이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겠다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갈 3: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기만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문제 해결의 열쇠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도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율법의 틀, 율법의 규례, 율법의 법도가 아니라, 성령의 힘, 성령의 도우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진술합니다. 특히 1,2절에서 영적생활에서 승리의 출발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세력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우리는 과거에 죄를 범하고 그 댓가로 사망의 세력 아래 살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죄의 소욕과 정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안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 절망하여 스스로 파멸에 이르도록 송사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통치 영역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줍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게 합니다. 그 결과 생명과 평안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결은 성령님의 도우심에 있습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

10,1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님은 죽어 무덤에 누워있는 예수님까지 살려내신 부활의 영입니다. 바로 이 부활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죽은 자도 살려 내신 영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시겠습니까? 이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속적으로 활동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찌꺼기들을 점진적으로 몰아내어 우리를 거룩한 자들로 빚어 주십니다. 이처럼 고귀한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 놀라운 보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비밀병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성령이 최고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 많은 사람 부러워 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앞에서 열등감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성령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선물을 받았으면 잘 활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령은 지혜와 능력의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부족할 때에 성령께 간구해야 합니다. 능력이 부족 할 때에 성령께 매달려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서 죄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서 믿음의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시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시겠습니까? 누군들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어떤 심각한 죄인도 살려낼 수 있습니다. 어떤 완악한 죄인도 구원해 낼 수 있습니다. 어떤 불치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이렇게 놀라운 삶을 살게 됩니다.

2. 죄를 죽이는 삶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과분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 받았습니다. 성령 받아서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빚진 자들입니다. 빚도 보통 큰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값으로 대신 지불된, 예수님의 생명을 빚진 셈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큰 빚을 진 자들인데 함부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면 우리가 어찌 다시 과거의 죄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내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에 우리는 쉽사리 죄에 빠질 수 없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에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우리의 위치와 신분은 왔다갔다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남용해서, 이제 구원이 확실하니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처럼, 죄를 짓고 살아도 결국 천국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을 게을리해도 되는 것처럼 오해를 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일함과 편안함을 좇아서 넓은 길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매일 영으로써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반드시 죄와 싸워야 합니다.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만약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죄의 소욕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힘 있는 인생,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까? 13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성령의 권세로 죄의 소욕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마치 레이져 광선과 같아서 모든 죄의 암세포들을 지져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은 강력한 살충제와 같아서 모든 허탄한 생각의 바퀴벌레들을 박멸시킬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17절에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자연히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능력이 강력해질 때에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적인 노력으로 혈과 육의 씨름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겠습니다. 시편 119: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하였습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엡6:17).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의 칼을 갈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리한 칼이 될 때에 어떤 사단 마귀도 감히 우리를 덤빌 수 없을 것입니다. 사단 마귀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것입니다.

3. 확인해야 할 진리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밝아야 하는 까닭은 진리에 무지하면 주어진 복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복을 약속해 주셨는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사단의 궤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사단의 농락거리가 될 뿐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며 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통치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감격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적 용어로 “성령과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부부가 되면 하나가 되어서 어디를 가든지 함께 동행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제 우리는 성령님과 하나가 되어서 어디를 하든지 함께 합니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두렵지 않습니다. 죄의 소욕에 시달리지 않게 됩니다.

시편 23: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서 나를 모든 위험과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7절에 우리가 기도하면 “모든 지각이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요,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옛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일년 한 차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들고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가 시온소 위에 뿌렸습니다.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부를 수 없어서 엘샤다이(전능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직접 가까이 나아가 가장 친근한 단어 Daddy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릅니까? 홍길동의 가장 큰 슬픔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자가 아니라 양자입니다. 양자는 정식으로 아들로 입양 된 것을 말합니다. 로마시대에 양자는 양부모의 재산을 상속 받는 아들로서 완전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후사들입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결론:

수영을 배울 때에 강사가 어떻게 말합니까? “힘을 빼세요. 힘 빼요!” 우리는 힘을 빼면 물에 빠져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온 몸에 힘을 주어 물속에 안 빠지려고 발버둥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빨리 물속에 빠지게 됩니다. 힘을 빼고 물의 부력에 몸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물에 빠지고 잘 뜹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 자신의 의지와 꾀와 지혜를 내려놓고, 성령께서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의탁할 때에, 우리의 인생을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축복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유혹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것은 내 힘 때문에, 내 의지 때문에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 때문에, 성령의 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죄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서 죄의 소욕을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적 승리를 거두는 새로운 한 주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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