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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09.17.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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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75회 작성일 Sep 18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9월 17일
본문: 로마서 8: 1-9
제목: 그리스도의 사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성경에서 로마서는 반지에서도 보석에 해당하는 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보석 중에 보석은 로마서 8장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로마서 8장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흔히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의 장’이고,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사람들은 말하는데 로마서 8장은 ‘성령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로마서 8장에는 1절부터 39절까지 중에서 ‘성령’과 관계되는 단어가 총 28번이나 나옵니다. 이렇게 성령님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역사가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시작부터 구원의 최후 완성까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은 절대적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으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우리 몸이 홀연히 영화롭게 변화되는 구원의 완성 그 날까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죄와의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죄는 가벼운 실수나 잘못 정도가 아닙니다. 그 실체은 가공할 만한 세력과 권세를 가지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우리를 압도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깨달아 선악을 분별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선을 행할 의지와 힘이 없습니다.  거룩하게, 경건하게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 세력에 압도 된 내 자신의 모습에 놀라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이 절망의 순간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죄의 세력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우리 삶에 실제로 적용되어 생명의 역사가 작동되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8장은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가 어떻게 죄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승리의 핵심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결코 죄와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할 때에 넉넉히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래서 로마서 8장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 다 암송하고 깊이 묵상해서 우리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될 때에 우리에게서 영생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고, 영적 승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1.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적생활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가 성령의 세력 안에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라고 가르칩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승리의 삶을 살려면 꼭 필요한 확인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가? 이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를 범하고 그 댓가로 사망의 세력권 아래 살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죄의 소욕과 정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해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는 더 이상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미 빛의 나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통치 영역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공산통치에 시달리던 북한 병사가 남한으로 귀순하여 자유 대한의 보호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과거에는 죄와 사망의 법이 천로역정에 나오는 절망 거인처럼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고 절망해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도록 송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으로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여기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서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당당하게 죄와 사망 권세를 향해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는 일제치하에서 드디어 해방되어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당당하게 주권국가로 큰소리 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고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음미해 본다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 선포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우리 수준에서, 우리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 축소하여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 속에 담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여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도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잠시 동안만 정죄함에서 해방되고, 죄를 지을 때는 다시 정죄함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정죄함와 정죄로 부터 해방, 이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반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쁨과 확신이 사라지고, 마귀의 참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죄의식과 무가치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체념과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한 그 풍성함과 부요함과 충만함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런데 구원의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실행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태, 느낌, 기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역사하신 분 또한 하나님입니다. 

3절 전반부를 보십시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우리는 이전에 육신이 연약하여 번번히 죄에 넘어졌습니다. 율법의 높은 수준에 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대로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셨습니다. 3,4절입니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께서 우리 대신 정죄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송사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제는 은혜 받은 자답게 감사합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믿는 자들이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이 은혜의 교리를 피상적으로, 머리로만 이해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뼈아픈 상처를 주고, 엄청난 죄를 짓고서도 ‘회개했으니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어. 나를 정죄하지 않으셔. 나는 이제 문제 없다’식으로 말하며 다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오리발 내밀 듯이 하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서 세상 사람들이 ‘저들은 다 사기꾼이다. 위선자다. 거짓말쟁이다’ 이렇게 말하며 분개합니다. 과연 이 놀라운 은혜의 교리가 그렇게 사용되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진리를 왜곡시키는 마귀에게 속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은혜를 믿고 주장할 뿐만이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성령님에게 순종하며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그래서 우리가 죄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둘째로,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다같이 5,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세상적인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먹고 마시고, 즐기며 누릴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합니다. 육신을 좇아 사는 삶에도 물론 잠깐의 쾌락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6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가 사망입니다. 반면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누가 보지 않기 때문에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서 온갖 종류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악하고 추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은 씨앗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씨앗들이 발아하여 결국 열매를 맺게 됩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습니다. 습관으로 굳어지면 성격이 되어 나중에는 고치고 싶어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영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7:18, 19절에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좋은 생각, 영적인 생각, 거룩한 생각을 하기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할 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꾸 말씀에 대한 반발심이 생겨서 하나님을 거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가끔 보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통 예배에서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지난 삼개월 동안 전혀 말씀의 은혜를 못 받았어요” 물론 전하는 자에게도 문제가 있겠지요.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만 문제가 아니라 듣는 자의 마음 밭도 문제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열심히 마음의 밭을 가꾸듯이 영적인 생각을 하기에 힘썼다면 교회당에 들어오는 순간 부터 감동이 밀려 들 것입니다. 찬송가 1절만 불러도 심령에 기쁨이 벅차오를 것입니다. 성경 구절만 읽어도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주로 세상적인 생각, 먹고 놀고 즐길 생각, 세상 걱정 근심, 음란한 생각만 한 사람은 그 내면이 반질반질한 길가와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해도 은혜 받지 못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보십시오. 그들은 교만과 자존심, 세상 명예심, 탐욕과 음란으로 그 속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발하고 조롱하다,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육신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창세기 6: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렇게 하라고 인간을 지은 것이 아닌데…” 그리고 탄식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창 6:7)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하나님의 탄식은 분노로 발전하였습니다. 마침내 홍수 심판으로 모든 인생들을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결코 만홀히 여김을 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기뻐하시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쓸어 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영적인 생각을 하기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은밀하게 즐기던 죄나 더러운 것들을 적극적으로 내어 버려야 합니다. 골로새서 3:1,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에 이르는 연습입니다. 경건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매일 매순간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훈련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사모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내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집 안을 청소하지 않고 가만 놔두면 금방 쓰레기장으로 변하듯이, 우리의 생각도 투쟁하지 않고, 가만히 나두면 저절로 게으르고, 악하고, 추한 쓰레기통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힘써 영적인 투쟁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3.

영적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 셋째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확증하십시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님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성령을 좇아 사는 삶이냐’는 질문에 앞서 ‘너희가 성령에 의해 거듭 났느냐?’‘성령이 너희 안에 내주하여 참 자유를 누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이 성령을 좇아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어 왕 노릇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그의 영과 분리시키는 자는 그리스도를 죽은 형상이나 시체로 만드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것과 같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들여 마음의 첫 자리에 모셔야지, 형식적으로 예수님의 껍데기만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을 분리시키는 큰 죄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분리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예배에 잘 나오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달 십일조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그 정도가 아닙니다. 물론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시는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과연 좌정하고 계시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시대에 내린 가장 무서운 심판은 “나의 영이 영원히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창6:3)”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나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지, 바닥 상태인지 매일 매순간 체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영적인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 짓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성이 바닥날 때에 우리 내면이 곤고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기도하며 성령의 기름을 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성령을 좇아 살아 가십시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면 내 안에서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각자의 은사를 불일 듯 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루하루가 날로 날로 새롭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음같이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환란과 시련으로 휘몰아쳐도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가운데서도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으로 가득찬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승리하는 삶,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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