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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고뇌하는 인간 (09.10.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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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26회 작성일 Sep 1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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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9월 10일
본문: 로마서 7: 14-25
제목: 고뇌하는 인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의 고민은 구원 받은 이후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고, 특히 자기 자신의 모순과 갈등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가장 큰 갈등을 느끼는 부분은 아마도 예수를 믿은 이후에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 자신이 참되고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기쁨과 평강이 늘 가득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순된 모습에 깊은 좌절과 함께 고뇌에 빠집니다. 과연 내가 올바르게 진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내가 겪고 있는 내적 갈등과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가야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이 됩니다. 이 문제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직결되는데, 이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구약에 있었던 사건을 살펴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시기를 가나안 땅에 살던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허리가 휜 노인들과 아무것도 분간을 못하는 젖 먹는 유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진멸’이란 단어는 무찔러 모조리 죽여 없앤다는 의미인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그래서 초기 기독교 시대에 이단자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의 신으로써 무자비하고 진노하시는 신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즉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과는 다른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일곱 족속을 이렇게 철저히 죽이라고 명령하셨는가? 이 명령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드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 신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서로 다른 하나님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그 시대로 돌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시는 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을 요구하셨는지를 영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은 세상을 상징한다면, 가나안 땅은 천국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천국을 의미하는데, 천국, 즉 하나님 나라는 마냥 놀고 먹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치열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점을 먼저 이해하기 위해 천국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천국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불신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그 영혼에 천국이 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는 천국이 임하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영혼에 복음이 들어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 영혼에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또 질적인 면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루어질 때, 그만큼 천국은 더욱 깊은 차원으로 임하게 되어 천국의 충만함과 부요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마음에 이미 천국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완전하신 통치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옛사람, 옛성품이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과 성령님에 의해 온전한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더욱 온전히 이루어져  천국이  충만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임한 우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일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워야할 가나안 원주민이 있듯이, 예수를 믿는 우리 마음속에도 싸워 정복해야할 원주민 야만인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싸워야할 대상 가나안 일곱 족속들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아직 정복되지 않은, 육신적 옛사람을 의미합니다.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교만, 이기심, 등등 수많은 적들이 우리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때로는 영적 갈등과 고뇌로 인해 우리에게 엄청난 좌절감과 패배감을 맛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화평과 평안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은 언제 찾아오느냐? 가나안 땅의 일곱 부족들을 완전히 정복했을 때 진정한 샬롬이 찾아왔던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있는 대적들을 온전히 몰아내 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이루어지기 까지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 옛사람의 성품들을 정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안에 벌어지는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장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여기에 고뇌에 찬 탄식과 처절한 절망의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우리를 안식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8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구원 받은 이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승리가 있을 것을 말씀해 줍니다. 

1. 인간의 모순

오늘 말씀은 로마서 가운데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부분입니다.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서로 견해가 맞서고 있습니다. 하나는 본문에서 등장하는 '나'란 존재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라는 존재가 사도 바울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 싯점이 어느 때인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인가? 만난 후인가? 아니면 다메섹 도상에서 소경으로 있었던 며칠 동안인가? 여기에 대하여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많은 성경학자들의 해석이 있지만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깨우친 후에 겪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연장선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은 이후에 겪을 수 있는 영적 실존 상태라고 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죄에 대한 통렬한 자각과 양심의 찔림과 뉘우침 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면서도 실행할 능력이 없음에 대한 좌절과 절망감에 탄식하는 사람이기에 그렇다면 틀림없이 구원 받은 신자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 법을 어긴 것이 들통이 나서 감옥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후회하며 반성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음 아파하며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구원 받은 신자들이 하나님 말씀 대로 살지 못함에 대해 늘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합니다. 한 번 여러분 자신을 검증해 보십시오. 엉망진창으로 살면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당신은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에 죄책감으로 눌려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텐데..’ 전전긍긍한다면 적어도  구원 받은 신자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믿는 자들만이 갖는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7장 9절에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율법을 새롭게 자각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롬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제 계명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절에서는 내가 행해야할 선이 무엇이고, 행치 말아야 할 악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21절에서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이 마음속에 일게 되며, 22절에서는 마침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는 자리에 까지 나가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특징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알면 알수록, 선을 행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율법을 즐거워하면 즐거워할수록, 우리 속에서 이율배반적인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원하는 대로 선을 행치 못하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15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상태에 대해서 바울이 고백하기를 ‘내 안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7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라는 거대한 실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거기서 벗어나고자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18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우리에게 원하지만 능력이 없어 선을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모순이 있습니다.

둘째로, 한 지붕 안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두 개의 소원, 혹은 성향, 혹은 법이 우리 안에 공존하는 모순입니다.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비로소 바울은 한 가지 법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바울이 득도를 했습니다. 그 득도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과 악이 자기 속에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을 그렇게 구분합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저 나라는 좋은 나라, 저 나라는 나쁜 나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단시대적 상황에 의해 특히 이런 흑백논리가 강합니다. 저희들이 어려서 자랄 때 그런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미국은 좋은 나라, 소련은 나쁜 나라. 북한은 붉은 이리떼,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국가. 그러나 나중에 커서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미국에도 나쁜 사람이 많이 있고, 소련에도 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북한에도 붉은 이리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인민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착하고 선한줄 알았는데 시커먼 죄 문제가 숨겨져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두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도 착한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내 안에 무서운 미움과 증오심, 혈기와 정욕, 거짓과 위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에 스스로도 놀라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악한 사람이었던가? 그러면 어린아이들은 순수하고 착합니까? 저 해맑은 미소 속에 무슨 악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도 얼마나 영악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하나님도 섬기고, 죄도 범하는 이중생활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우리 안에 죄에게 길을 열어주는 육신의 연약함, 즉 복병이 숨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고백입니다. 공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공존하고 있는 모순입니다.

그래서 셋째로, 우리에게 악한 소욕에 굴복하여 패배를 맛보는 모순이 있습니다. 

(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마음이 원하는 바와는 달리 죄를 범하게 되는 모순입니다. 여기서 ‘죄의 법’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죄가 사로잡는 힘이 강렬하여 항거할 수 없을 만큼 ‘법’ ‘법칙’처럼 역사하여 나를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누가 이깁니까? 죄가 이깁니다.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강한지 나를 꽁꽁 묶어서 악의 수렁으로 밀쳐 넣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우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가 얼마나 끈질지고 집요한지 모릅니다. 옛날 시골에서 모 심을 때 보면 자꾸 거머리가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습니다. 그 거머리를 아무리 잡아 뜯어도 또 달라붙고 또 달라 붙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그렇게 강합니다. 우리는 이 거머리와 같은 죄성과 싸워 봅니다. 그런데 번번히 실패합니다.

2. 갈등과 고뇌

이상의 세 가지 모순, 이율배반, 갈등, 패배는 바울에게 고뇌와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바울에게(5:1) 이런 모순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예수와 함께 옛사람이 죽어 더 이상 죄의 종이 될 수 없는 바울에게(6:6) 어떻게 이율배반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사람이 된 바울에게(7:6) 어떻게 이런 패배를 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런 모습은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다시 하나님과 원수 된 자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모순과 갈등이 너무 크게 드러난 나머지 여기서 느끼는 절망감을 표현하는 감정적 묘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탕자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고 결심하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 앞에서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버지는 어떻게 그를 대했습니까? 오히려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풉니다. 아들은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요청하지만 아버지는 품꾼의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이 되었지만 육체를 입고 사는 고로 가끔 죄에 빠지는 패배를 맛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이나 위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의인이면서 죄인이요, 죄인이면서 의인인 이중적 실존 상태에 놓여 있어서 우리는 어찌할 줄 몰라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지만 죄로 무너질 때에 우리는 비통스럽고 크게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탄식합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바울은 번번이 죄에 넘어지는 자신을 바라볼 때에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인가? 자신이 얼마나 죄의 소욕 앞에 연약한 자인가? 유혹 앞에 무력한 존재인가? 처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의지가 없습니다. 내 안에는 거룩하게 살 힘도 경건하게 살아갈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아본다면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가? 나는 얼마나 탐욕스런 죄인인가? 나는 얼마나 거짓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끝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비극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보고자 애를 써 보았지만 안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절망한 나머지 다시 세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3. 승리의 길

그런데 바울은 이 절망의 순간에 누구를 바라보았습니까? 다같이 25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절망의 순간에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돌아가실 수 밖에 없었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죄의 세력에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 아래 팔려가는 우리를 사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그 댓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더럽고 뿌리 깊은 죄성을 도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돌아가신 것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죄성을 근절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어떤 악한 죄성도 뿌리뽑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 받을 때만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십자가 은혜가 매일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단번에 영원히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오늘을 사는 것이기에 오늘도  죄와의 싸움이 있고, 죄로 부터 구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을 이루시고,  구원 이후에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를 붙들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오호라” 탄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감사하리로다”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자신에 대한 탄식이 깊을수록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더 감격적입니다. “오호라”가 처절할수록 “감사하리로다”가 더 감격적입니다. 자신에 대한 절망이 강할수록 예수님께 대한 열망이 더 강렬해집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자신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거쳐서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과 성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발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굳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 마음속에 왜 평안이 없고, 각가지 불신자들이 겪는 동일한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많은 경우에 그 원인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온전히 몰아내지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원망과 불평의 쓴 뿌리 때문에 얼마나 자주 괴로움을 겪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탐욕 때문에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쓰러집니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교만 때문에 사람들의 시험거리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과 시기심 때문에 얼마나 자주 주위에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을 괴롭게 만듭니까?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는 헛된 명예욕 때문에 얼마나 허황되고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까? 모두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아직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눈에 연기처럼 되어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왜 교회들이 세상에서 치욕과 멸시와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까요? 그 원인은 바로 마음속에 있는 정복되지 않은 적들 때문입니다. 탐심으로 인한 교회 세습으로 사회의 지탄 대상이 됩니다.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얼마나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명예욕 때문에 치욕을 당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1,2절에서 “모든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벗어 버리고 예수님을 더욱더 꽉 붙드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내려놓고 온전히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간순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십자가 밑에 나의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고, 주님의 품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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