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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직장생활 (09.03.2023) 이강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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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66회 작성일 Sep 04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9월 3일
본문: 골로새서 3: 22-4: 1
제목: 그리스도인의 직장생활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내일 노동절(Labor Day)을 앞두고 3일 연휴가 되었습니다. 금요일까지 휴가를 내어 4일 연휴를 즐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모처럼 연휴를 맞이해서 충분한 휴식으로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휴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리듬을 찾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이 안식을 취하심으로 우리에게 휴식의 중요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창 2:1)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안식이란 일을 그치다, 멈추다, 휴식하다는 뜻입니다. 2장 1-3절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다’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한 번 있었던 단순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서 중요한 패턴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 째 날에 휴식을 취하는 삶의 리듬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일과 휴식을 통해서 삶의 리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있습니다. 한 때 야구선수로 아주 유명했던 박찬호 선수입니다. 그는 인터뷰 때 지나친 훈련으로 인해서 자신의 전성기가 빨리 막을 내렸다는 회한을 털어놓은 바가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 선수들 대부분이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부상을 부르거나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경기 성적이 부진하거나 몸이 조금 아플 때 무작정 훈련량으로 극복하려는 게 오히려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서 멈추는 게 중요하다. 나도 오버하다가 (허리) 부상이 커졌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신이 문제를 악화시킨 원인이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해 조금 아프면 훈련을 더 많이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이 더 늦어지고 부상을 더 키우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이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일평생 일 밖에 모르다가 드디어 가게를 팔고 은퇴의 삶을 즐기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병에 걸려 고생하거나 세상 떠났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일과 휴식 사이에 균형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냉혹스럽게도 때로는 과로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일년 365일 내내 직장 일과 집안 일에 매여 휴식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괴 휴식 사이에 균형을 잡는 것이 어디까지나 우리의 이상적 희망사항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 없이 끌려가는 현실 앞에 우리는 일과 휴식 사이에 균형을 찾기에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먼저 숙고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삶을 진정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삶을 누가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인지,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을 명확히 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삶의 주님이 되시기에, 그분이 우리 삶의 구심점이 되시며, 그분 중심으로 우리 삶이 재편성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시는 영역은 가정과 직장과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 경제적 문제와 건강, 그리고 추구하는 꿈과 소원 모든 영역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 직장생활을 하게 될 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또 다른 차원에서 직장 일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직장 일을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 일과 하나님 나라의 일이 서로 연결됩니다. 즉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하고 기도드릴 때 영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의 현실에 임하게 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교회 안에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달라는 것 아닙니다. 우리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종으로서 어떤 자세로 주인을 섬길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에는 수백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오래된 관습이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행해졌습니다. 대부분 약탈에 의한 것과 전쟁 포로, 또는 노예의 부모로부터 난 자, 국가의 반역죄를 지은 자들이 노예가 됩니다. 그 당시 로마제국 안에는 자유인과 노예의 바울이 1:5였으며, 로마시의 경우는 1:3 정도였다고 합니다. 자유인보다 노예가 3배 많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좋은 주인을 만나 그리 학대를 받지 않고, 비교적 인격적 대접을 받는 노예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예는 인격적 대우를 받지 못했으며 심할 경우에는 파리 목숨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자 많은 노예와 상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래서 초대 교회는 상전과 종의 관계가 현실적 문제로 부각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노예제도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이를 용인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악한 제도에 대해 반대하지 않고 묵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노예제도를 부정한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반역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피를 부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폭력적이고 불의한 시대에 사셨고, 실제로 자신이 폭력으로 얼룩진 불의한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불의한 권력과 폭력적인 제도를 없이하는데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줄 압니다.

사실 사회 개혁이 먼저냐, 영혼 구원이 먼저냐는 질문에 한마디로  답변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법과 체제와 가존 질서를 뒤엎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노아의 시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세상이 악해서 노아 한 사람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 아내, 세 아들과 그들의 아내들 8명만 구원하시고, 나머지는 다 홍수로 쓸어버리셨습니다. 심판을 받아 모든 악한 것들이 다 쓸려 간 후 구원 받은 노아의 가족들로 세상이 다시 시작했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후 세상이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천국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금방 다시 악해졌습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아무리 사회가 바뀌고, 제도와 체제가 바뀌어도 또 다시 악해지는 것입니다. 잠깐 좋아질 수 있지만 다시 악해집니다. 그게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죽음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백성, 새로운 나라,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복음과 함께 이 땅에 도래했고, 이제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 복음과 함께 전 세계를 향해 전파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존질서를 뒤집어 엎는, 피를 부르는 혁명 보다 온 세상에 복음이 편만히 전파되고,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일에 그의 관심과 소원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야말로 사실 로마가 자랑하고 있던 모든 기존 질서를 확실히 전복시킬 만한 혁명적인 운동이었습니다. 무력과 폭력으로 뒤집어 엎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특성상 그 속에 새로운 질서를 태동할 수 밖에 없는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질서 아래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이제는 남을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억압과 폭력과 착취와 불화가 존재하는 기존 권력 구조 속에서 이타적이고, 사랑으로 화합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인과 종이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고, 그리스도 몸의 한 지체가 되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 지위와 위치가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모두 평등하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형제 자매로 한 가족이 되어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이들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는 계급과 신분사회였던 로마제국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주는 가장 큰 축복은 자유입니다. 본래 죄의 종이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로 부터의 자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선한 열매를 맺어가는 자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직장에서 누리게 되는 세 가지 자유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자유입니다.

성경은 노동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렇다고 노동 그 자체에 우리의 최종 목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인간의 어떤 행위나 그 행위 자체에 최종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우리의 근본적 존재 목적과 일치될 때 비로소 그 행위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삶의 목적,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인간은 무엇을 위해서 산다고 가르칩니까?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그 다음이 무엇이죠? “무엇을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노동은 '무엇을 하든지'에 포함이 됩니다. 즉 노동 그 자체도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더 이상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상전을 기쁘게 하려고 눈가림을 하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성실히 직장생활하게 됩니다. 22절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종은 주인의 명령과 지시에 당연히 순종해야 하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후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단지 감시를 당하고 있거나 어떤 보상을 바라기에 눈가림으로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의식하며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성실히 일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 일에 대해 최종적으로 판단하시고 판결을 내리실 분은 상전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 상관이나 동료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직장생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2. 전심을 다해 일하는 것으로의 자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생활로 부터 자유케 하는 것이 출애굽 역사입니다. 그런데 출애굽하는 것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죄로 부터 자유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죄로 부터 자유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은 죄와 악습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으로부터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더 이상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직장 일에 헌신함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전심을 다해서 일하는 것으로의 자유입니다.
23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그 당시 종들은 음식준비, 청소일, 농사 짓거나 가축을 돌보는 일,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 그리고 온갖 허드렛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종으로 죽습니다. 인격적 대접을 기대할 것이 없고 어떤 보상도 바랄 수 없습니다. 종의 신분이기에 마지못해서 억지로 일을 감당합니다. 원치 않은 일이어서 고역입니다. 심지어 학대를 받으며 중노동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하는 척하면서 시간만 보내기 쉽습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특히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 미국 땅에서 우리 이민 1세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그만큼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고, 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일할 의욕이 나지 않고 자존심까지 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러려고 미국에 왔나하고 자괴감이 듭니다. 일한 대가로 주어진 보상도 적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떤 의미와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마지 못해 일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말고 주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종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날 기회도,일한 댓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 기업(inheritance)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종은 영원하고 진정한 상급이 약속 되어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장차 천국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24절입니다.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직장 일을 단순히 밥벌이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전심으로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이로써 상급이 있습니다. 

3. 세상의 보상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이 세상은 죄와 악과 부정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래서 실력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인간관계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물론 정직하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찌 보면 팔자요 운수라고 할 정도로 세상일은 복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세상에서 권모술수와 돈이 더 잘 통할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직장은 직장이고, 믿음은 믿음이다. 직장인이면 직장인, 집사면 집사 서로 상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직장 생활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해야 하는 이유는 이에 대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종이든지 주인이든지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 지라도 올바르게 행하는 자에게는 유업의 상을 받습니다.(3:24) 심판 때에 하나님은 편견이나 차별없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가혹하고 무자비한 상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게으르고 신뢰할 수 없는 종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관대하며 사랑을 베푸는 상전에게 보상하시는 하나님은 정직과 성실로 일하는 종에게 또한 칭찬하며 보상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상에서 주어지는 보상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불평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급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을 상급을 소망하는 자는 세상의 보상으로 부터 자유합니다.

결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노예의 삶을 살던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자유케 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노예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비록 신분은 노예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입니다.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노예는 감시와 지시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억지와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자유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합니다. 그래서 신분이 노예이어도 자유인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자유인이면서도 노예처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게 되면 더 이상 노예처럼 살지 않습니다. 주인을 의식하며 눈가림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자유인으로 하나님 일을 하는 것처럼 일합니다. 그래서 노예로서 하는 일이어도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누가 가장 느끼게 될까요? 동료와 주인입니다. 그토록 불평스럽게 일하던 노예가 은혜를 받더니 그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어요. 불순종하고 패역한 종이 이제는 유순한 양처럼 변화되었습니다. 맡긴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대하듯 주인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주인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리고 주인은 관대하고 너그러워집니다. 종의 인권과 복지에 힘쓰는 주인의 모습을 보고서 종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렇게 해서 믿게 된 주인과 노예들이 한 교회에서 형제여, 자매여 하며 하나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로마사회에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고후 5:16)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한 까닭은 복음이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유인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주신 책임을 자발적으로 지는 것입니다. 누가 감시하고 관리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자원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맡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눈가림으로 일하는 것으로 부터 자유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이 전심으로 직장 일에 헌신하는 것으로의 자유가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이 세상으로 부터 받는 일시적 보상에 연연하지 않는 자유가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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