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역할 (08. 27. 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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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율법의 역할 (08. 27. 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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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43회 작성일 Aug 28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8월 27일
본문: 로마서 7: 7-13
제목: 율법의 역할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그동안 공부한 로마서를 정리해 본다면 딱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해 철저히 무능하기 때문에 자기 의로써, 율법으로써 스스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 6장, 7장에서 걸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안에 있음을 반복해서 진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5:1-2)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이제 은혜 안에 들어간 것이 확실합니다. 그의 지위는 확고하고 안전합니다. 이를 5:10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진술합니다.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리고 5장 마지막 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롬 5: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은혜는 승리할 것이고, 아무도 이를 막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또 그 분의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이를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현재 우리가 누리가 있는 모든 축복과 은혜를 파괴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다른 서신서를 보면 그가 전심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했던 문제가 바로 이 점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할례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복음을 이방사람들이 열렬히 받아 드리는 것을 보고서, 이를 시기하던 유대인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서 자기들을 추종하는 세력을 만들려고 복음을 훼손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말하기를 ‘너희가 예수를 믿는 것만을 가지고는 이류 신자 밖에 안되고, 일등 신자가 되려면 우리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저들을 바라볼 때, 저들은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고, 음식도 돼지고기, 오징어, 게장을 먹지 않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등등 아주 강도 높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주 수준 높게 경건생활하는 것으로 여겨져서 저들을 추종하기 시작하였고, 저들의 가르침을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에 대해 강하게 책망합니다. (갈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어서 3장에서도 다시 한 번 더 강하게 도전합니다. (갈 3:1-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구원 받은 성도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치 예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광야에서 죽고 말 것이다. 이제 더 늦기 전에 지도자를 뽑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노예살이를 하던 저들을 전격적으로 출애굽하게 하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 스스로 노예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오늘에 이르까지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지 아니하고 다시 율법주의적 행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는 ‘율법으로 부터 자유’라는 제목의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7장 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전에 바울은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법조문 지키듯이 하다보니 쉽게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완벽에 이르고자 시도할 수록 더욱 힘들고, 그리고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외식에 빠질 위험성이 커집니다. 자신의 좌절과 침체를 감추기 위해 더 외적 신앙 모습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내가 주일성수, 헌금생활, 기도생활, 봉사, 선행에서 남보다 더 앞서 있다는 것에서 우월감을 느끼게 되고, 상대를 판단하며 정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를 얽매든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힘과 의지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내 능력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믿음의 길을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돛단배가 바람의 힘으로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로 새롭습니다. 날마다 감격이 넘칩니다. 날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기대와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더 이상  사람들 눈치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끌려가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더불어 행복한 믿음의 길을 달려갑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은혜의 복음을 진술하면서도 이 진리의 복음에 반대하던 이들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중간 중간에 이 점에 대해 거듭 확인합니다. 오늘 본문도 저들의 반격을 예상하고서 이런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7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이렇게 반격하는 까닭은 이미 사도 바울이 7장 5절에서 율법이 죄와 같이 역사하여서 결국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진술하였기 때문입니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저들은 말합니다. ‘사도 바울 당신은 지금 죄와 율법, 이 둘 사이에 마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동의어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진술을 듣다보니 결국 율법이란 죄처럼 나쁘고, 해롭고, 결국 죽음을 가져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를 염두에 두고, ‘율법이 죄냐’ 이렇게 스스로 묻고서 이어서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아주 강한 부정을 합니다. 율법 자체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심의 기준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규범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율법은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 율법의 용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율법의 용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올바르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에게 죄의 속성을 알려 주기 위함이라고 먼저 말합니다. 7절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고 하지 않습니까? 죄를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1) 율법은 먼저 죄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7절을 계속해서 보십시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니라”

율법은 탐심이 죄라고 규정합니다. 만약 그 기준이 없었다면 우리는 탐심이 죄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 속에 자기 의가 깊이 뿌리 내리고 있어서 율법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부분 자신은 착하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살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또 법을 어겨서 감옥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등등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스스로 자신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사도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으로 예루살렘 대학으로 유학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바드 법대에 진학한 셈입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교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학생 중에서도 탁월하게 앞서가는 특대생이었습니다. 그가 장차 유대교와 유대사회의 지도자가 될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렇게 장래가 촉망된 길을 걸어가던 그는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입지를 더욱 굳히기 위해 뭔가를 보여주려고 앞장서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들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유일신앙에서 탈선하여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고, 율법과 성전을 모독하며 유대교에서 탈선하고, 유대민족을 배신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할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추호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의로 충만한 그는 당당했습니다. (빌 3:5-6)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는 계명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 계명 지켰다. 7계명 간음하지 말라. 나는 간음한 적 없으니 계명을 범하지 않았다.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나는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으니 나는 문제가 없다. 9계명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나는 거짓 증거한 적 없으니 계명을 깨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조명해 주시니까 율법 조문을 하나하나 지키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법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 즉 계명의 정신이 깨달아 진 것입니다. 특히 열 번째 계명에 와서 그는 걸려 넘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위 계명은 겉으로 지키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는데 열 번째 계명 탐내지 말라는 것은 우리 안 내면에 있는, 은밀한 탐욕과 탐심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율법 규정을 지키고 있지만 자기 마음 속에 가득한 탐심의 문제만은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의인 행세를 하기 쉽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바리새인의 기도가 그렇지 않습니까? (눅 18:11-12)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나는 살인하지 않았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실제로 살인하지 않았어도 형제에게 노하여 ‘라가(미련한 놈)’이라고 하며 미워하였다면 이미 그 마음 속에 살인을 한 것이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실제로 간음하지 않았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이미 간음한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계명의 정신입니다. 모든 율법과 계명은 결국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 두가지로 귀결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합니까? 과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과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여 돌봐줍니까? 누가 이 기준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조명하여 주실 때 문득 계명이 깨달아지고, ‘아, 내가 죄인이구나’하는 깊은 찔림과 탄식과 함께 회개의 문턱에 서게 됩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죄를 죄로 인식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율법은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드러냅니다.  8절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탐심을 피하려고 할 수록 오히려 그것이 더 맹렬하게 역사하는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알 수록 죄는 더욱 두드러지고 선명해져서 전혀 변명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 마음 속의 죄를 부각시키고, 부추겨서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 다시 한 번 이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앞으로 그럴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율법은 X-Ray 와도 같아서 우리 몸 안에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실히 드러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며 그래서 구원이 필요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이 자신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본성과 그 깊이에 대해서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해 주어야 비로소 우리는 구세주 그리스도께 향하게 됩니다.

2. 죄를 도발하는 율법

이처럼 율법은 X-Ray 이나 MRI 같은 역할로 주어진 것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율법은 우리 안에서 그 이상의 결과를 가져 온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주어진 용도와는 상관없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있는 죄를 증폭시키거나 선동한다는 것입니다.

8-9절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여기서 ‘기회’라는 아포르메(aphorme)’단어는 군사 기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원정을 나가기 위한 출발점, 혹은 작전 기지를 말합니다. 군대가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발판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말은 ‘죄가 계명에 의해 우리를 자극시키는 기지나 발판을 우리 안에 설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마디로 죄가 율법을 지렛대 받침처럼 사용해서 죄를 선동하고 더욱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목적으로 주신 율법이 그럴 수가 있는 것인가!’하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부패되어 있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괜히 삐딱선을 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키울 때를 회고해 보십시오.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 이런 말 저런 말로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도통 들어먹지 않습니다. 오히려 삐딱선을 탑니다. ‘저 망할 놈이 내일 시험인데도 방 구석에 틀어박혀서 종일 게임만 합니다. 유튜브만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빗나갈까봐 화를 꾹꾹 눌러 참습니다. 하루가 다 지나가는데 도무지 공부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보다 못해 드디어 한 마디 합니다. ‘얘, 너 내일 시험 보지 않니?’ 그러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네, 어머니,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해요.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요. 하루 종일 게임해서 죄송해요. 지금부터 정신차리고 공부할께요’하고 들어갑니까? 아니지요. 폭발하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그렇지 않아도 방금 딱 마음 잡고 공부하려고 했는데 이제 기분이 나빠서 공부할 마음이 사라졌어. 나 공부 안해!’ 유세도 이런 유세가 없고, 뻔뻔스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지금 그러고 삽니다. 계명이 하지 말라고 금지하면 오히려 더 그것을 탐하는 성향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나쁜 짓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떤 죄된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에는 별로 그럴 욕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지 명령을 받으면 타고난 삐딱함이 발동해서 괜히 하고 싶은 욕망으로 꿈틀되고, 이내 그 욕망에 사로잡혀 버립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자극되어 고의로 법을 어기고자 하는 죄성과 죄의 충동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것에 맞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는 제 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세상과 인생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규정한 모든 법은 이런 우리의 본성과 욕망을 금지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내 주권을 하나님 말씀이 침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며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킵니다.
그런데 죄는 여기에 반기를 듭니다.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자 욕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초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시험한 내용입니다. “너도 이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창 3:5). 그리고 이 시험이 모든 죄의 본질이자 모든 죄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것이 죄의 본질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절대 권력에 하나님의 계명이 도전한다고 여기며 이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율법을 알면 알 수록 오히려 죄성의 힘이 그 반작용으로 증가하게 범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의 결국

그 결과로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사실 바울은 유대교 가정에서 자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율법을 몰랐던 적이 없었고, 오히려 율법에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만큼 철저히 지키던 자였습니다. 그가 회심하기 전까지 율법과 무관하게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율법 없이”라는 말은 율법의 본질적인 요구를 이전에는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드려야 할 것입니다. 율법의 수많은 규칙과 규율을 알고 지켰지만, 율법을 주신 목적과 의도,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상 율법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살았더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즉 율법의 정신을 알고 보니 실상 나는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리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계명이 이르매” 드디어 내 양심이 깨어나고 내 자신 속에 있는 죄를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교만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덕적 실패와 가망이 없는 영적 파산 상태에 직면에 자신을 자각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직시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결론: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은혜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을 하거나 율법의 멍에를 매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 거하는 대신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영광스러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내용을 고린도후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후 6:4-10)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기에 빈곤이나 풍부함이나, 핍박이나 고난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병듦이나 건강이나,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환경을 초월하여 자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재수 없는 사람으로 오해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얼마나 멋있는 인생입니까? 우리 모두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하여 복음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 성도의 영광스러움을 한껏 드러내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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