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으로 부터 자유 (08.20.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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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율법으로 부터 자유 (08.20.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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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71회 작성일 Aug 2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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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8월 20일
본문: 로마서 7: 1-6
제목: 율법으로 부터 자유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처음 신앙이 깊지 못할 때에는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신앙생활에 매여 속박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처럼 느낍니다. 예전에는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크리스천으로서 해야할 것과 하지 않아야 될 것을 구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일에 친구들과 놀러 다니거나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며 여유를 부렸는데 이제는 예배 드리기 위해 서둘러 교회에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 믿은 후 부터는 제한이 많아졌습니다. 그만큼 자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말씀합니다. (요 8:3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혜택은 자유입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었을 때에는 영적으로 무지하여 오도된 거짓에 속아서 잘못 생각했습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고, 내 마음에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을 추구하며,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자유한 삶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실상 우리가 욕망하고 추구하던 그것이 실상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원하고 탐하고 추구하던 것에 우리는 자신을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었고, 우리는 종이 되어 섬겼습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인기와 재미, 심지어 가치 있는 대의명분이거나 지극히 소박한 소원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대신 그것이 우리를 실제적으로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과거에 우리 모두는 우상숭배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파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자 영적 흑암 가운데 있던 우리가 빛의 나라로 옮김을 받았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충만한 영생의 삶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환란과 시련에서 완전히 면제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입술에서는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시 4:7-8)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1. 연합의 신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 옛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죄가 더 이상 상전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삽니다.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받은 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할 삶입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니까 그러자 즉각 이에 대한 반격의 질문이 던져집니다. (롬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었으니 더 이상 죄가 주장하지 못합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율법과는 상관없으니 지금부터는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됩니까? 사도 바울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1절부터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하게 된 것을 결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결혼한 상태이거나 그리스도와 결혼한 상태이거나 둘 중에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싱글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세대 사람들은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비혼주의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결혼을 하게 되면 미혼으로서 누리던 자유와 독립성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미혼일 때는 자신이 일방적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결혼하게 되면 그렇지 못합니다. 결혼에는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유롭지 못하는 구속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미혼일 때는 경험하기 힘든 사랑과 친밀감, 안정적이고 보호 받는 느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사랑과 친밀감 덕분에 자유와 독립성을 잃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배우자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결혼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율법으로 부터 자유

한 여인이 친구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얼마나 깔끔하고 매너가 훌륭한지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서 넘기고, 양복은 칼같이 주름을 잡아서 세웠습니다. 와이셔츠는 얼마나 새하얀지 눈이 부실 정도였습니다. 구두는 또 얼마나 광택이 나는지 파리가 앉아도 낙상할 정도이었습니다. 깍듯이 존댓말을 써 주었고, 식당에 가면 친절하게 의자를 먼저 빼 주었습니다. “Lady first!” 여인은 이 남자가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서 만난 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한 뒤 부터 였습니다. 남편은 출근할 때에 바지에 조금이라도 구김이 가 있으면 난리가 났습니다. 남편이 퇴근했는데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있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남편은 매일 밤 일일결산을 한다며 가계부를 점검하였습니다. 잠은 반드시 11시 이전에 자야하고, 아침에는 절대적으로 5시에 일어나서 함께 공원에 가서 운동을 하고, 7시에 출근을 했습니다. 출근해서도 점심시간에는 반드시 전화해서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체크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칼 같은 남편을 따라 살자니 여인은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자기는 도저히 남편의 높은 요구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여인은 이 남편과 결혼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혹시 병이 나서 몸져 누우면 칼 같은 성품이 무뎌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지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이 퇴근길에 그만 교통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겉으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지만 속으로는 기뻤습니다. 엄한 남편의 속박으로 부터 마침내 해방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던 여인은 마침내 이해심 많고, 자상하고, 사랑이 많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 비유에서 칼 같은 전 남편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은혜로운 새 남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 지당하신 말씀이요, 좋은 말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연약해서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해 헉헉대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도덕선생처럼 가르치고 지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잘 이해해 주십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대신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율법과 사별하고, 새롭게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 되신 예수님을 만나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런저런 율법조항을 정해놓고 그것을 억지로 지켜 나가는 도덕생활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성경 몇 페이지, 기도 몇 시간, 이렇게 해 놓고 목표 달성하면 기뻐하고, 미달하면 눌리고,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를 위해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교제하며 그분과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결혼생활입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성경을 읽습니다. 그분과 더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전도합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도 하고, 십자가를 지며 희생 하기도 합니다. 

6절을 볼까요?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이전에 바울은 의문의 묵은 것, 즉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법조문 지키듯이 수양하듯이 했습니다. 그때는 쉽게 지치고 피곤했습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로 완벽에 이르고자 하니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그 마음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할 수록 더 거세게 죄의 정욕이 역사합니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것은 마치 스프링을 누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르면 잠시 괜찮아 진 듯 싶습니다. 그 뒤에 더 큰 반발력으로 튕겨 나오듯이, 유혹의 불길이 더 거세게 타올라서 육신을 사로잡습니다. 결국 율법은 내가 죄인 됨을 폭로하고, 이에 남은 것은 정죄와 심판입니다. 사망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으로 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나의 능력과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믿음의 길을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바람의 힘으로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새 언약의 축복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문의 묵은 것 율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 성령으로 새로워지도록 예정하신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이를 이루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구원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정체성을 말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복을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이를 위해서 언약의 태두리 안에 살도록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배의 자리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름 받은 그 소명에 부응하지 못하였고, 영광스러운 은혜의 자리에서 추락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깨뜨리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 언약의 파기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아니 알고도 무시했고, 들었어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수많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강제로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페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깨지고, 이로써 언약의 축복 대신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렘 31: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옛 언약을 용도 폐기하기 위해 새 언약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의 깨어진 언약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이집트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으나 노예의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적인 세계는 여전히 죄의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의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돌에 새기지 않고, 사람 마음 판에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약속을 지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피를 통하여 새 언약으로 옛 언약을 대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더 이상 마귀의 어둠의 세력에 속하지 않도록 은혜의 왕국 하나님 나라에 옮기셨습니다. 더 이상 불순종의 삶을 살지 않고,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효력이 발생하여 죄사함과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능력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날로 새롭습니다. 날마다 감격이 넘칩니다. 날마다 기쁨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기대와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똑같은 찬송을 불러도 어제의 느낌이 다르고 오늘의 느낌이 다릅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작년의 은혜가 다르고 올해의 감동이 다릅니다.

결론: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아무런 감격도 없이 기대감도 없이 마지못해서 합니다. 습관적으로 사람들 눈치 때문에,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끌려가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은 아직 율법에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매인 신앙생활은 기쁨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고리타분하고 지루합니다. 아무런 기대도 소망도 없이 억지로 끌려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 죽은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날로 새롭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올 때도 거룩한 기대감을 갖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는 어떤 은혜를 주실까?’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고, 그분을 경험하게 될 것을 기대하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는 우리 가정에 어떤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까?’ 이렇게 가슴 벅찬 기대와 소망 가운데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의문의 묵은 것을 버리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길 축복합니다. 이로서 더 이상 과거의 실패, 아픔과 상처, 율법에 매이지 아니하고 자유함 속에서 믿음의 길을 달려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남은 한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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