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08.13.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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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08.13.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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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5회 작성일 Aug 14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8월 13일
본문: 로마서 6: 12-23
제목: 무엇이 내삶을 움직이는가?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오래 전 한 자동차 회사에서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를 내세웠습니다. “Driven by what's inside (내 안에 있는 것에 의해 내가 움직여진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말씀을 하셨던 것을 봅니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여러분의 내면에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을 지금 움직이게 합니까? 그것이 안심하고 내어 맡길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충동(impulse)과 욕망(desire)과 감정(emotion)에 여러분의 삶을 맡기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 내면에 무엇이 나르 움직이게 하는 것인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지난 주일 말씀과 같은 주제의 연장선에서 구원 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순종의 종, 의의 종,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될 것을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진술하자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반격의 질문이 던져집니다. 15절입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얼핏 1절과 동일한 질문인 듯 보입니다. 1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15절은 “그런즉 어찌하리요” 그리고 이어서 은혜와 죄에 관한 질문이 나옵니다. 1절에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15절은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 다음에 이에 대한 단호한 답변으로 “그럴 수 없느니라”하고 강 스파이크를 내려꽂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질문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강조점은 다릅니다. 1절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구원 받으니 율법 없이 죄를 짓고 살아도 은혜가 더욱 넘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입니다. 15절은 구원 받은 이후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고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더 가치 있고, 고상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방탕이나 방종이 아니라 순종과 자발적인 헌신으로써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 영생에 이릅니다. 이를 풍성히 누리도록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주목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바로의 학정 아래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해방된 자유인으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문제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미 정착해 살고 있는 강성한 원주민들과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그들을 내쫓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도 구원 받음으로써 모든 문제가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영적 전투에 돌입하게 됩니다.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제어하기 어려운 야만인들을 내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라고 불리는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죄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쉽게 끝장을 볼 만큼 손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아주 견고한 진을 치고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 1:7-8)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무엇을 위해 섭니까?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기 위해서’ ‘율법 책을 가까이 하며 주야로 묵상하고,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는 일’에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지요? 가나안 용사들과 싸우는 전쟁을 앞두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라니요. 우리 같으면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고, 용기를 내어 힘써 싸우라고 할 텐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담대히 지켜 행하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율법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말로 ‘토라’입니다. ‘토라’를 흔히 ‘율법’이라고 번역하는데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의미로써 우리가 지켜야할 규칙이나 규범을 의미합니다. 이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넓은 의미로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르침’이란 당연히 모세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의 책, 모세 오경을 가리켜 ‘토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듯이 모세 오경은 십계명처럼 단순히 ‘하라, 하지 마라’식의 단순히 우리 행동 규칙이나 규정만을 담고 있는 책이 아닙니다. 창세기로 시작되는 모세 오경은 우주 만물의 창조로 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 그리고 애굽에서 종노릇, 마침내 애굽에서 해방되는 출애굽의 구원, 시내 산에서 장엄한 하나님의 강림하심과 이스라엘과의 언약, 그리고 40년 광야의 여정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백성을 이끌어 오셨는지를 담고 있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스토리가 담겨 있어요.

그러므로 율법 토라는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과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과 부르심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밤낮으로 ‘토라’를 가까이 하고 묵상하라고 명하신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물리적 전투만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 가운데 그들을 특별하게 구별하셨어요. 그 당시 최강국 애굽의 왕 바로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그들을 불러냈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주셨어요. 여기에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소명과 사명이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망각하지 않고, 부르심을 받은 대로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명을 수행해 나가면 그들을 당할 적이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승리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형통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성수해라, 십일조를 바치라, 전도해라, 술 담배하지 마라… 이런 규율을 지키는 것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행위에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6장에서도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진리를 알려 줍니다. 먼저 3절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알라고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구원 받은 사람일지라도 영적 무지 가운데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온갖 신령한 은사들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11절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믿고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이제 부터는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더 이상 불의의 병기가 되어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의의 병기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1. 누구의 종인가?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모두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박멸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여기는 박테리아나 세균이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질병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이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물이 부패하여 썩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시체가 부패 되지 않아 썩지 않고 있어요. 얼마나 끔찍한 세상이 되겠어요? 이렇게 작은 풀이나 나무, 하찮은 짐승이나 벌레들도 자연 속에서 자기 역할을 감당하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사람들도 인생의 목적이 있고, 또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몸도 분명히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몸을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고 잘못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이 구절에서 우리 몸을 죽을 몸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몸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합니까? 그래서 몸을 잘 돌보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약을 먹기도 하고, 음식을 섭취하고, 운동을 하고, 참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애를 씁니다. 그런데 몸의 수명에는 제한적입니다. 건강하게 활동하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안되고, 곧 몸이 노쇠해지고, 병약해져서 힘든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몸이 죽고 썩어서 없어져 버립니다.

이렇게 일정한 기간 동안만 사용하는 몸인데도 탐욕이 많아서 우리를 끊임없이 보채고 유혹합니다. 많이 먹으려고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하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먼거리, 많은 시간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좋은 음식을 먹기도 합니다. 전부 우리 몸의 탐욕입니다. 값비싼 옷을 입으려고 하고, 큰 집에서 살려고 합니다. 권력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강하고, 물질과 성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몸입니다.

몸이 이렇게 욕심스러운데, 그 몸에 우리가 굴복해서 순종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죄가 우리의 왕노릇하고 주인 노릇하기 시작합니다. 눈이 시키는 대로, 입이 시키는 대로, 귀가 시키는 대로, 손과 발이 자기 욕심에 따라 시키는 대로 따라가게 되면 결국 죄가 우리의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원래 사람이 몸의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몸이 주인 노릇하게 되는 순간 부터 죄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죄나 사단은 이렇게 우리의 욕심을 통해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의 욕심에 굴복하여 죄의 종노릇하며 마귀의 종이 되어 죄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결국은 멸망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도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도 다시 살아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을 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의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더 이상 사단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요, 나의 주가 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깁니다.

우리는 둘 중의 하나의 종이 되는 것이지, 둘이 다 우리를 지배한다든지, 우리가 둘을 모두 섬긴다든지, 어떤 중립적인 상태를 유지한다든지, 같이 더불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부터 우리는 죄가 우리의 왕노릇하지 못하고, 예수가 나의 왕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 끝에, 죄가 우리의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죄가 나의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단호히 그것을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두 종류의 병기

13절에서는 이렇게 왕노릇하고 주장하는 것을 전쟁 무기에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고대 희랍에서는 전쟁에 나갈 때 수호신에게 자기 칼을 바치면서, ‘내가 지금 전쟁에 출전하게 되었으니, 신이시여 내가 죽음에 처하지 않도록 내 생명을 보호해 주십시오. 이 칼을 신에게 바치오니 친히 이 칼을 잡아 주장해서 나로 하여금 전장에서 승리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출정식을 합니다. 칼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수호신에게 바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우리 몸을 죄에게 드리면 불의의 병기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죄에게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그때서부터 불의의 병기가 되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악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몸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세계는 선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죄에게 바쳐서 죄가 우리를 주장하게 되면 불의의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악된 일만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용하시면 의의 병기가 되어 선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칼이 있습니다. 이 칼을 가정주부가 잡으면 칼을 통해서 맛있는 요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 칼을 살인자가 잡으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가 우리의 몸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의의 병기가 되기도 하고, 불의의 병기가 되기도 합니다. 머리가 좋아 컴퓨터를 잘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지식을 가지고 은행의 남의 계좌에서 돈을 훔쳐내고, 남의 컴퓨터에 들어가 자료를 빼내는 해커노릇을 합니다. 그러면 자기 지식과 기술을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3. 그 열매

몸의 욕심을 따라가든지 죄의 지배를 받든지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든지 그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자유대로, '나는 이제부터 몸의 욕심대로 불의의 병기로 살겠다' 결심하면 그때부터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합니다. 불의의 병기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결국 부끄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일생동안 사기치며 지냈어요. 그러면 나는 평생 사기꾼으로 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겠어요? 부끄러운 일생이 되는 것이지요.

21절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불의의 병기로 자신을 사용하면 부끄러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여기서 사망은 누구나 일생을 살다 죽어서 무덤에 가는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자기 욕심에 따라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는 것은 자기 자유이지만, 그러나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다가 부끄러운 열매를 맺게 되고, 마지막에는 지옥에 가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악을 끼치게 되고, 그들 또한 멸망하는 길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는 의의 병기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  잠재력, 기술, 지식, 나의 인생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의의 병기로 우리 자신을 바치고 그렇게 사용되면, 그 결과,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거룩한 삶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안델센 동화집 속에 ‘못생긴 오리 새끼’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오리 새끼는 다른 오리들로 부터 많은 미움과 괴로힘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오리 새끼들과 모습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너는 어찌 그리 못 생겼니?” 하며 이런 저런 흠집을 들춰가며 잔소리를 듣습니다. 그 가련한 새끼 오리는 그들의 말을 믿고서 아주 불행한 나날이 계속 되었습니다.

어느날 호숫가를 가로질러 날라오는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멋 있는지 모두 넋이 빠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가까이 오는 가운데 문득 호숫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문득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오리 새끼가 아니라 백조였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그의 하얗고 아름다운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이전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다 털어 버리고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동물들이 쳐다 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다른 백조들과 함께 뒤를 돌아 보지 않고 날아 갔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주라고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 성도들에게 이미 놀라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이제는 의의 종이 되어 영생의 열매를 거두는 신분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나의 지체를 매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율법에 의해 억지가 아닌 자발적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우리 모두가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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