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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성의 원리 (07.30.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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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82회 작성일 Jul 31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7월 30일
본문: 로마서 5: 12-21
제목: 대표성의 원리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난 시간 몇 차례에 걸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행위의 덫’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이 일어난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주도하는 인생을 살려고 하기에 율법적 성향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의지하도록 우리는 사회에서 학습 받고 또한 그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 의지하며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배우고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그래도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좀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는가! 내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고, 잘 믿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의지하는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은혜를 은혜로 받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음의 영광을 충만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다시 전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탁월한 교사인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임한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 한 가지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표성의 원리로써 우리에게 임한 구원에 대해 설명합니다.

지난 본문에서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든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렇게 특별하다는 사실에 매우 감격스러워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계속해서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단순히 감동이나 삶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면서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영원한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그분의 죽음이 세상의 악을 이기는 사건이 되고,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됩니다.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대표성의 원리를 통해 설명합니다. 올림픽에서 국가대표 선수가 메달을 따면 온 국민이 자기 일처럼 기뻐합니다. 이유는 그 선수가 국가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대표성의 원리는 의외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깊숙히 작동하고 있고, 개인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령 나라와 나라 사이에 외교 문서 협정을 맺을 때 대통령이나 외무부 장관이 서명을 합니다. 그때 그 나라 전체 국민이 다 서명하지 않지만 일단 사인하여 협정을 맺은 후에는 그 효력이 모든 국민에게 다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했다면 대통령 한 사람이 선포했어도 모든 국민은 전쟁비상 사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우리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런 대표성의 원리는 구원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10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왜 이렇게 한 사람을 강조하는 것인가요?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죄가 시작되었고, 결국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으며, 모두가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 얻게 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음이 이 땅에 왔듯이, 예수님 한 분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주어졌습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1. 아담의 대표성 (12-14절)

먼저 아담과 우리 사이에 대표성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4가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둘째, 한 사람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옵니다. 셋째,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넷째,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라는 바이러스가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우리는 억울한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모든 사람이 죽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내가 아닌 타인의 선택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 아주 불합리하게 느껴지고,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단순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담은 가장 먼저 창조된 사람으로서 그후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의 죄가 되고, 아담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죽음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실제로 이 원리가 작동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1997년에 있었던 한국의 IMF 사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경제 우등생이라는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 국가부도를 인정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야 할 뼈아픈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였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물론 원인은 여러가지 있었고, 또 이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밀어닥친 여파는 온 국민이 다 받아야 했습니다. 한 개인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회사가 망하니 직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이 범죄 했기에 모든 사람에게 죄가 들어왔고,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요? 아담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분명한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 했지만, 아담으로 부터 모세까지,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다르지 않습니까? 법이 없는데 어떻게 법을 어기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롬 5:13-14)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범법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으로 부터 모세 때까지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기에 아담과 같이 범법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법이 제정 되기 전까지는 범법이라고 처벌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범죄 했고, 그래서 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2:1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사람들은 아담처럼 주어진 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그들 또한 죄를 지음으로 사망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으로 인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죄와 사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의 대표성을 받아 드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감정적으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받아 드리기를 거부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도 그렇게 불평했습니다. 이들의 불평을 듣고 하나님이 묻습니다. (겔 18: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아니 내가 아니라 우리 조상이 잘못을 했는데 왜 국가가 멸망을 당하고, 우리는 포로로 끌려와서 이 고통을 당해야만 합니까?”하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렘 31:29-30)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가 시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도 신포도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지만 우리 또한 무죄하다고 손을 씻을 수 없습니다. 마치 아무런 책임이 없는 양, 과거로부터 내려온 산더미 같은 죄들에 대해 나는 전혀 상관이 없는 양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하여 우리의 죄를 더하기 때문에 죄는 갈 수록 더욱 불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또한 죄의 범법자이자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편으로 이 원죄에 대한 희생물이기도 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에덴 동산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깨어지고, 일그러지고, 더럽고, 불의한 에덴 동산의 동편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죄의 산더미와 같은 쓰레기에 의한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죄가 한 사람을 통하여 들어왔고, 죽음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으며, 이처럼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운명이며 피할 수 없는 비극적 종착역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담의 범죄와 상관없다’고 아무리 외쳐도 나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모두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2. 예수님의 대표성 (15-17절)

우리는 아담의 대표성에 대해서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사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에 죄를 짓고, 죄를 짓기에 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악순환 속에서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  우리의 운명이지만, 그 동일한 법칙이 그리스도 안에서 작동 되어서 이제 은혜와 생명으로 우리에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14절 후반에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표상이란 어떤 물건을 찍어 내기 위해 만든 하나의 주형이나 모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원형은 따로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담 또한 그리스도의 표상입니다. 그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리스도의 행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아담은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실 자 예수님의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 모형이 가리키는 바 진짜 실체, 원형이신 예수님의 대표성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롬 5:15-17)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5절에 아담은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16절에 아담은 정죄를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의롭다 하심을 가져왔습니다. 17절에 아담은 사망이 왕 노릇하게 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이 가져온 결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하여 우리를 속박하고 지배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즉 이전에는 죄의 노예살이를 하던 우리이었는데 이제는 생명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이 되어 다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생명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가 되어 우리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대표성의 결과 (18-21절)

그렇다면 대표성의 원리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 효과가 무엇입니까?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예수님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반복해서 비교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이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강조되는 것은 둘 다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행동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은 철저하게 실패했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은 완벽하게 성공하셨습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이 단순히 복원시키고, 간격을 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넘치도록 회복시켜 주시는 차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은사, 은혜, 선물이라는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은사는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물은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은사, 은혜, 선물, 서로 다른 말을 반복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은혜를 더 강조하기 위해 “더욱”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15절 “더욱 하나님의 은혜”, 17절  “더욱 은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아담으로 인해 얻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더 강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다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온 인류에게 주었던 그 저주와 고통, 정죄와 사망, 그 모든 것들을 완전히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넘치도록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은혜는 정말로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담과 예수님을 비교하다가 20절에서 갑자기 율법에 대해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왜 이 말을 하는 것일까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의 진술을 듣다가 ‘그렇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데 왜 율법을 주셨느냐? 그래도 주신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하고 의아해 할 것을 염두에 두고 미리 답변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은 율법이 사람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있는 반항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결국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분의 정하신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손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역할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은 그 역할을 하면서 죄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은혜는 그 어떤 죄보다 더욱 더 강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아름답게 완성하십니다.

비록 죄가 크고 넒고 깊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더욱 크고, 더욱 넓고, 더욱 깊습니다. 십자가에서 은혜는 죄를 압도했고, 생명은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1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복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다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불순종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순종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로운 행위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 넘치는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고,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 시작과 끝의 모든 것을 바꾸셨습니다.

결론:

우리가 신앙의 길을 가다가 낙심하고 좌절할 때, 영적 침체가 찾아왔을 때,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왔을 때, 아니 내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지만, 한 사람 덕분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이 모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 안에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항상 이 은혜 울타리 안에 거하십시오. 우리 모두 이 은혜를 굳게 붙잡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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