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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합의 신비 (08.06.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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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53회 작성일 Aug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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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8월 6일
본문: 로마서 6: 1-11
제목: 연합의 신비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그동안 로마서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많이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서의 대상이 율법주의자인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율법 없이 사는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와 신앙행위를 의지하려는 율법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행이나 행위가 아닌,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율법 없이 살아왔던 우리도 태생적으로 자기 의의 신봉자이기에) 바울은 한사코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셨느냐’고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예상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거룩한 계명으로 주신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니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하고 펄쩍 뛸 것입니다. 여러분도 율법이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더 많아지게 한다니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전에 몰랐던 것들이 죄로 분명하게 진단되기에 죄가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에서 거짓말을 죄라고 규정하니까 이제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율법을 통해서 정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로 규정한 율법이 없어서 죄로 정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율법이 죄로 규정하니까 죄가 더해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율법이 우리의 악한 본성, 반항심을 자극해서 오히려 죄를 촉발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입니다. 청개구리처럼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사람의 죄를 지적함으로써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반항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고 말합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칩니다. 은혜는 그 어떤 죄보다 더욱더 강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죄와 죄의 세력을 이기며 극복하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은혜의 교리에 대한 반론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다니’고 말하니까 이번에는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율법도 더 이상 필요 없고, 우리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겠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짓는 것을 합리화시키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 가운데 살아도 되겠네.’라고 주장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실에 라스푸틴이라는 종교담당 고문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왕가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로마서 5장 20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구절을 인용해서 “성경에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그러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보통 죄인이면 하나님께 보통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큰 죄인 이면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니 반복해서 계속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니 괜찮습니다.”라며 왕실의 죄를 합리화시켜 주었습니다. 이런 썩어빠진 신앙적 조언을 받던 제정 러시아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민중 봉기가 일어나 공산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라스푸틴의 말은 전형적인 무율법주의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죄를 지어도 이는 은혜를 더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우리는 라스푸틴처럼 극단적 무율법주의자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지만 실제 우리 삶과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별반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논리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 된 것이지 내 신앙행위로 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적당히 신앙생활을 해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설령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크기 때문에 다 덮어질 것이고, 결국 천국에는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적 나태함을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무율법주의자들의 논리 또한 배격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이를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네이게토, 절대 그럴 수 없는니라!’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단 한 번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미 끝난 죽음이지 매일매일 죽는 그런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세례를 들어 말합니다.

2. 세례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침례, Baptism)는 물 속에 들어가거나 (물 뿌림) 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행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는 세례는 단순한 의식(儀式)이나 성례전(聖禮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은유적 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하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됨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와 접목 되어 은혜의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예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를 주님의 것으로 안(印)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신앙 고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순간에 성령께서 신비롭게 역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 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연합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도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기에 그 단 한 번의 죽음으로 우리도 죄와 단절하게 되었습니다. 죽어 장사 되었기에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더 이상 권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아버지의 영광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주님과 연합한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도록 살려주셨습니다. 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영역에서 살지 않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어둠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미 생명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구출하여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제 죄와 죄의 세력이 우리를 붙잡아 두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3. 이미와 아직

물론 이 땅에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고 있기에 죄로 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는데도 현실은 눅눅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영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이 땅에 도래하여 완성을 바라보며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완성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긴장 관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세계2차 대전을 비유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될 때 나치 독일은 영국과 소련을 제외하고 전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세를 완전히 뒤엎는 작전이 있었습니다. 1944년 6월 6일 암호명 D-day에 실시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입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던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나치 독일은 결정적으로 패퇴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퇴각하는 독일군들이 곳곳에서 저항하며 전투는 계속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5월 7일 V-day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할 때 비로소 전투는 끝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D-day와 V-day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사단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무너지고 이미 승패는 결정되었습니다. 이미 승리는 분명하지만 아직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단이 아직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셔서 사단을 결박하고, 죄와 사망을 불못에 집어 던짐으로써 최후 승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 안에서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영의 욕망과 죄의 쾌락을 즐기고 싶은 육의 욕망이 우리 안에서 충돌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이 죄와의 일대일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원하는 바 선을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자기 모순 앞에서 절망하며 부르짖지 않습니까?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그런데 이 절망의 자리에 설 때 오히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비로소 더 이상 추락하지 않은 든든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 절망의 외침을 뛰어 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롬 7:25)고 외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 우리는 장사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습니다. 죄가 권세를 부리지 못합니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으로써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의를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아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롬 6:8-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단을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이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복된 소식을 듣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취었습니다. (고후 4: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빛이 비취지 않으면 우리는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는 우리를 사단의 먹이감으로 삼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 1863년에 선포된 노예해방 선언으로 미국 땅에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도가 종식되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이제 모든 노예들이 자유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부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살아왔던 대로 주인에게 예속 되어서 노예처럼 살아갔습니다. 물론 그들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노예선언하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유가 주어졌어도 그 자유를 어떻게 누리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노예해방을 한 남북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까? 마침내 노예해방이 되었지만 정작 그들은 농장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노예처럼 매여 살아갔습니다. 막상 자유인으로 살려니까 앞날이 불확실하고,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 출발을 하지 못하고 농장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죄로 부터 자유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순종으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어둠의 권세 아래 있지 아니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지 않습니다. 의와 생명이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적 흑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게 될 것입니다. 여전히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복된 소식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을 알지 못하느뇨”, 6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9절에서 “앎이로라”고 반복해야 알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의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제물처럼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영원히 살아 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10,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길지어다”는 원문에서‘여기라’는 명령문입니다. ‘그대로 믿으라, 기정 사실로 받아드리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체험의 문제가  아니고, 또 자기 자신을 보고 평가할 문제도 아닙니다. 또 느낌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신분), 어디에 있으며(소속),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알게 해 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는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아닙니다. 우리처럼 이미 믿고 구원받은 로마 신자들에게 쓰여진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들려 주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날 죄의 욕심에 따라 구습을 쫓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연합의 신비를 우리가 믿는다면 더 이상 예전에 죄의 노예가 되어 종노릇하던 옛사람처럼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물론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할 수 있습니다. 추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의 역사가 무효가 되는 것 아닙니다. 더 이상 우리는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롬 5:17).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우리 삶과 신앙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영광의 복음을 가진 자는 쉽게 죄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계속 살지 않습니다. 설령 잠시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죄를 자백하고 다시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구원 확신을 결코 흔들어 놓지 못할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며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답게 다시 일어나 담대히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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