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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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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93회 작성일 Jul 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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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7월 9일
본문: 로마서 5: 5-11
제목: 확증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난 주일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적 축복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1절). 죄로 인해 불화한 가운데 있었는데 의롭다 여김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우리 마음에도 평강이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이 무서워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중요합니다. 

두 번째 축복은 이제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절).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썩고 부패하여 사라진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축복은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3,4절).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즐겁고 기쁘다가도 인생의 환난이 닥쳐오면 모든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이 환난의 과정을 거쳐서 인내심을 키우게 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과 인격이 연단되고, 연단된 인격과 믿음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앞에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환경 탓하며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의 때에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영적 축복을 누리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었기에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그 은혜에 들어가는구나,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구나’ 이렇게 ‘내가 믿었다’는 것에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마치 의롭게 되는 근거, 원인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면 내가 잘 믿으면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고, 그렇지 못할 때 버림 받은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어느덧 내 믿음이 중요한 변수를 일으키는 근거,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패하고 넘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믿음’은 율법이나 행위에 대조 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는 조건이나 근거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인이 되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분기점이 됩니다. 다른 종교에서 믿는 신들은 인간들에게 무관심하거나 냉정하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온갖 정성과 열심을 보여야 합니다. 신을 감동시켜야 겨우 보상을 받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신은 하나님이 원인이 되셔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정성이나 소원 보다 우선합니다. 만약 우리가 먼저 시작하고 우리가 원인이 된다면 더 이상 ‘은혜’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받아야 할 ‘삯’이 되어 보상 받는 것이 되고 맙니다.

1.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그렇다면 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까? 그리고 영적 축복을 누리도록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여기서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사랑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언어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부어주셨다’온 몸을 흠뻑 적실 정도로 물을 붓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을 말씀합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혹시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까닭은 우리 마음에 죄의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가 있으면 받아드리고 수용하고 믿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먼저 의심하고 거부하게 됩니다. 가령 우리 주위에 남에게 잘 베풀고 대접을 잘하는데 막상 자기 자신은 이를 받아드리지 뭇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 마음에’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늘 성부, 성자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창조의 순간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성령님은 마치 암탉이 달걀을 품어 부화시키듯이 세상을 품어 생명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실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늘 성령에 충만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잠들고, 예수님 홀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떨어지는 기도의 순간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처참하게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에도 성령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 순간을 보셨습니다.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시신이 무덤에 묻히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실 때 그 곳에도 성령님은 계셨습니다. 즉 성령님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산 증인이십니다.

우리는 예수께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서 읽고, 들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진리라고 확신하는 까닭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셔서 확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다 보았다, 내가 직접 목격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복음을 들을 때 그것이 사실이고, 진리라는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지게 합니다. 나에게 부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확신시켜 줍니다. 성령께서 이를 깨우쳐 주시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랑에 흠뻑 적시며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축복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이 충만한 삶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무릎을 꿇고 간구합니다. (엡 3: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간절함이 있을 우리는 무릎을 꿇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루어지기 원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엡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러분은 이 사랑에 대해서 아십니까?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습니까?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기까지 이르시기 바랍니다. 그 충만한 사랑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되기 바랍니다. 

2. 사랑의 깊이 

그렇다면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그 사랑의 농도, 깊이, 충만함을 아십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powerless), 우리가 경건하지 않았을 때(6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8절),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10절),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powerless), 전적으로 무능력한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경건하지 않았습니다”(6절). 우리는 다 치우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선을 행하지 않았고, 우리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었고, 혀로는 속임을 베풀었고, 우리의 발은 피 흘리는 데 빨랐습니다(롬 3:10-18). 우리는 불경건했습니다(6절).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인들이었고(8절), 하나님의 원수였고(10절),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엡 2:1-3).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중심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의 이성과 이해를 뛰어넘고, 이전에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차원입니다. 죄로 인해 원수이자 대적자이었던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해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자기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6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하나님의 때에, 약속하신 대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10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연약하고 무능한 우리, 불경건한 우리, 죄인된 우리,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 바로 이런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사랑입니다. 세상에는 의인을 위해서도 죽는 것이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서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흉악하고 불경건한 죄인, 대적자와 원수를 위하여 대신 죽는 법은 없습니다(6-7절).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8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자 그 절정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3.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신하게 만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9절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정말로 확실하다면, 우리가 (심판날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9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는 일이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갈 것이고, 우리는 장차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완전히 구원을 받을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또한 이전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에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구원의 복락 가운데 살게 될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절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이런 신앙의 논리가 필요한 이유는 자주 우리가 자신의 믿음과 신앙행위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됨이 확실하고, 천국에 들어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런데 영적 침체에 빠질 때에는 ‘내가 이 꼴로 무슨 복을 바라겠어. 하나님이 무슨 복을 내게 주시겠어’하며 자조와 자책에 빠집니다. 아무런 기대감이 없어 그저 무능하고 무력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그래도 간신히 예수를 믿었으니 그저 지옥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하고 체념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식이 없는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인데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가운데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합니다.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이 아들을 잡아 바치면 어떻게 하늘에 별과 같은 자손을 얻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여기에 순종하여 바칩니다. 왜냐하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신앙 행위로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는 거리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더욱 구원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의 구원을 더욱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면, 우리로 하나님과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크게 즐거워하게(exult) 됩니다(11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기 없이 살아가는 침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미래에도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기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거의 매주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동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영적 질병이 발생하기 딱 좋은 환경을 제공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우리보다 훨씬 신앙생활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어요. 아주 작은 물질이라도 철저히 십일조했어요. 그리고 계명을 많이 지켰어요.  무엇보다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정통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왜 그들이 하나님 아들을 대적하고 죽였을까요? 그 근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한 마디로 지적하십니다.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동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분명한 표식은 그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전부 인 줄 알고, 세상에 목매여 살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누리십니까?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들을 때마다 우리 가슴에 와 닿고, 마음이 뜨거워집니까? 우리 생애에 한 번이라도 그 사랑에 접촉하고서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킬 만큼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아무도 핑계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온 몸을 흠뻑 적실 정도로 물을 붓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생생한 체험을 말씀합니다. 자신이 압니다. 주변사람들이 압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즉각 느끼게 됩니다. 성도들이 깨닫게 됩니다. 직장 동료들이 뭔가 느낌을 갖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는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부요하심에 놀라며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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