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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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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58회 작성일 Jul 03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7월 2일
본문: 로마서 5: 1-11
제목: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설교자: 이강웅 목사

우리는 로마서 4장 말씀을 통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의로운 행위로써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자기 의로써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써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값없이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가 수용함으로써 의롭게 여김을 받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죄 많은 우리를 십자가 보혈로 구속해 주셨으니 이 은혜에 감사해서 무엇인들 우리가 못 드리겠습니까?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위해서라면 온갖 정성과 마음을 다 해 헌신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등이 휘도록 수고를 해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천성적으로 율법적 성향이 있어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를 않고, 곧 갚아야 할 부채, 빚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 믿음과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느덧 이를 유지하고 지속하게 하는 것이 마치 내 믿음과 열심에 달린 양 생각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기쁨과 감사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자신의 믿음과 행위가 공로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함정에 우리가 빠지는 까닭은 예수님이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 주셨는데 이를 은혜로 받아 드리지 못하고, 왠지 도로 갚아야만 할 것 같은 부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도 구원을 위해서 뭔가 공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섬기고 기도하고 희생해도 늘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행위 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더욱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러지 못할 때는 죄책감을 갖습니다. 최선을 다 해도 항상 미달이라는 생각에 계속 자기 자신을 달달 볶습니다. 그러다 결국 탈진하고 좌절감에 더욱 침체에 빠집니다. 행복하지 못하고 비참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행위의 덫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핏 값으로 너를 구원해 주었으니까 너도 피 흘리기까지 헌신해라” 그렇게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 보면 아버지가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너를 받아 주었으니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날린 것 이제 부터 열심히 벌어서 갚아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가 먹고 즐기워 하자(Let's have a feast and celebrate)”고 하였습니다. 딱 하루만 잔치 벌리고 그 다음 날부터는 머슴처럼 “일해!”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일 아들과 더불어 겸상하며 축제와 같은 나날, 잔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기 원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엄숙하고 근엄하게 수도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먼저 헤아려 보고, 이를 잘 누려야 합니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처럼 먼저 우리가 받은 은혜의 내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음으로써 얻어지는 영적 축복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과 화평을 누립니다.

오늘 말씀 1절은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바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서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더 이상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된 자로서의 특권과 행복과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자녀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부담스러워하고 벌벌 떨면서 눈치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써 먹기 위해서 택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교제하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미국 반 하우스란 목사님이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동안 알프스 지방 한 마을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였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기 위해 가면 맞은 편에서 신부 한 분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마주쳤을 때 한 번은 천주교 신부가 “당신네 개신교도들을 왜 신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직접 나아갑니까? 프랑스 엘리제궁에 대통령을 만나러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가는 법이 있습니까? 비서들을 다 통과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의기양양하게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엘리제궁에 들어가는 것은 힘듭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그 아들은 일어나자마자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통령이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빠, 일 잘하세요’하고 뽀뽀하지 않습니까? 아들이 비서실에 등록하고, 안내를 받아서 자기의 아버지를 만나는 법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인이었을지라도 이제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아와 화평을 누리길 원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던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본래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습니다.(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진노’라는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두려움과 공포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있습니다.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 받을 종말에 보일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계시록에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계 6:15-17)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이렇게 적대적 관계에 있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의로써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사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롬 3: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니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은 편안함입니다. 그런데 편안과 평안은 다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갖출 것 다 갖추고 불편함이 없어도 내면에 하나님이 없으면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때 저절로 찾아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공일까요? 돈일까요? 명예일까요? 쾌락일까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정말 그것이 전부일까요?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솔로몬처럼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 사람이 원하는 것은 마음에 평화입니다. 외적으로 아무리 성공을 해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으면 지옥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새차를 뽑고 나서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푹신푹신한 쿠션에, 스위치만 넣으면 앉은 좌석에 열선이 들어와 따뜻하지요, 큼직한 네비게이션이 길을 알려주고, 음악이 팡팡 터지는 사운드 시스템에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차를 몰고 나가면 사람들이 자기만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차를 닦고 광택을 내고 번쩍번쩍 빛을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깐 주차를 한 후에 돌아와 보니 누가 그 차의 옆구리를 확 긁어놨습니다. 이를 본 순간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온갖 신경질과 미움과 분노와 짜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평강을 얻고자 하면 실망합니다. 사람들에게서 기쁨을 얻고자 하면 후회합니다. 이 세상에는 근본적으로 평강이 없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돈과 재물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재미와 쾌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으로 부터 옵니다. 하나님과 화평해야 누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고행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율법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끊임없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화평의 관계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더 심오해져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런 자리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계 3: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이처럼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은혜를 누리며 주님과 화평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평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기에 가능합니다. 율법의 행위, 고행과 수양을 해야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저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단번에 영원히 우리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히 10:19).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입니다. 물론 우리가 지고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의 삶과 행위를 통해서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헌신과 희생을 많이 들어봤지만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모세와 다윗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헌신과 충성과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경외함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신앙의 색깔은 모세와 조금 다릅니다. 물론 다윗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했습니다.

(시 84:1-2)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하나님은 지고의 선이자 절대적 진리이고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영광은 어떤 것에도 비견할 수 없이 탁월하십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빠지는 것처럼 그분의 영광에 흠뻑 빠져서 그분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은 것은 우리가 올라설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롬3:23). 우리 모두 함량미달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내면은 죄 때문에 썩고 부패하여 하나님 영광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죄 사함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은혜에 들어가고, 마침내는 하나님의 영광까지 바라보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비천하고 천박한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의 속사람이 변화되어 점점 성화되어 장차는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는 영광 가운데 변화되어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생각할 때에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은 몸이 늘씬해서 드레스를 입게 될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수험생들은 장차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며 그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들은 장차 사랑과 행복이 깃든 가정을 이루어 함께 살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합니다. 운동 선수들은 오늘 땀을 흘리며 고통스럽지만 프로 리그에 진입하는 것을 꿈꾸며 즐거워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의 영광도 지는 날이 옵니다. 베드로전서 1: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은 뒤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에 모든 것이 다 썩고 부패하여 사라진다 할지라도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도 나의 속사람이 점점 변화되어 영광스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갈 것을 생각할 때에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3.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 합니다.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라”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즐겁고 기쁘다가도 인생의 환난이 닥쳐오면 모든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근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이 환난의 과정을 거쳐서 인내심을 키우게 되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연단된 믿음은 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빛이 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게 연단된 믿음, 더 빛나는 믿음, 영광스러운 인품을 주시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앞에서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난의 때에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입니다.
(행 5:40,41)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벧전 1:6,8)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받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환난을 많이 겪은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굶어 죽을 것 같은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이민을 가야 했습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삭은 대적들 때문에 끊임없이 우물을 파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모사꾼 외삼촌 밑에서 20년 동안 밤낮없이 고생했습니다. 요셉은 노예생활,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웠습니다. 정금같이 연단되어서 영광스러운 주의 종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처럼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소망을 바라볼 때에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 할 수가 있습니다. 시편 119: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욥기 23:10절에서도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 안에서 화평을 누리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5,6절을 읽겠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처럼 조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무조건적으로 부어주시는 사랑입니다. 폭포수와 같이 퍼부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훌륭하고, 잘나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경건치 않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사육신이나 생육신처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간혹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대적하고, 반발하며, 불순종하여서 원수 된 자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8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내가 뭔가를 잘 할 때에 주어집니다. 반면에 내가 실수하고 허물이 있으면 원망과 비난으로 바뀝니다. 때문에 세상의 사랑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열매 없어도, 허물과 실수가 많아도, 문제 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 주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죄인되었을 때에, 원수 된 자를 위해 가장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신 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폭포수와 같은 사랑을 묵상할 때에 우리는 어떤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생각할 때에 어떤 힘든 양도 끝까지 품고 인내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써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눔으로써 이 영적인 축복을 적극적으로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피폐한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평강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힘써 전파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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