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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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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78회 작성일 Jun 26 2023

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6월 25일
본문: 로마서 4: 17-25
제목: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설교자: 이강웅 목사

인생을 살다 보면 때가 묻고,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죄가 역사하는 세상에 살기에 아무리 조심히 산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이미 지은 죄가 있고, 현재도 앞으로도 허물과 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한 인생을 살기를 소원하고, 의롭다 함을 받기 원합니다.

로마서 4장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지난 주일에 우리는 유대인들이 존경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사례를 배웠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3).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다윗 또한 자기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가려주셨습니다.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심으로 다윗은 의롭다 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론과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차원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함을 받게 한 믿음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진술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좇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 본받아야 할 중요한 영적 법칙입니다.

1.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데 과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지난 주에 연일 세상 뉴스를 달구게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111년 전에 침몰해서 심해 바닥에 가라앉혀 있는 타이태닉 호를 투어하던 잠수정이 침몰했다는 소식입니다. 깊은 심연에서 수압을 견디지 못해 폭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때에 난민들이 탄 배가 침몰해서 수백명이 죽었습니다. 생존자는 12명의 남자들이고, 여자들은 갑판 아래에서 아기를 안고 다 익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별로 뉴스를 타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잠수정에는 5명이 타고 있었다는데 연일 뉴스의 화제를 몰고 갔던 이유는 잠수정에 탔던 자들이 억만장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 잠수정 투어는 1인당 25만 달러(약 3억2천500만원)에 달하는 초고가 관광 상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전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이 잠수정을 전문가가 위험하다고 지적했음에도 굳히 그들이 탔던 것은 침몰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들은 믿음을 마치 자기 신념이나 확신으로 혼동하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어필하는 성공비결 중 하나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그래서 자꾸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줍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뭐든지 할 수 있어. 불가능한 일은 없어. 그 일은 꼭 이루어질거야.” 이렇게 자기 스스로에게 되뇌이며 확신을 갖습니다. 이런 자기 암시적인 신념과 믿음을 기독교에서 의미하는 믿음과 착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이것을 신앙으로 포장해서 꽤 오랫동안 목회에 성공한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LA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자녀들이 서로 경영권 쟁취하려는 다툼 끝에 결국 수정교회는 파산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건물이 팔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자기 신념으로 부터 믿음을 엄격히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대부분 자기 신념이나 자기 확신에 근거한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모호하거나 아예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신념과 확신을 스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에는 분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대상이고, 이로써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믿음의 행보에서 흔들리고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세우시며 그를 번성케 하실 것이고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에서 많은 사람의 아버지, 곧 열국의 아비(father of many)라는 의미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

자신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창조주이시며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고 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온 세상을 다스리심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는 영원의 세계를 향해서 하루하루 다가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면 영원한 천국의 복을 누리지만, 죄의 저주로 인해 사망에 이른다면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구원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롭다고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명령과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실 것이며, 그에게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케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 땅의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이를 때에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되면 그 약속대로 기업을 얻게 하셔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많은 시험을 결국 통과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히 11:17-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하는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지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확신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롬 4:20-21)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은 견고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실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그리고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8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을 때에 이미 구십 구 세였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19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은 이미 자신의 몸이 자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고, 사라도 잉태할 수 있는 시기가 훨씬 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은 이때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21절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그래서 22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에게 많은 장점들이 있었겠지만 의롭다 함을 받게 된 것은 그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셨습니다. (행 2: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렇게 오신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또 하나의 마지막 약속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종국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약속하신 대로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나타나실 광경에 대해 계시록 19장에서 아주 생생히 현장감 있게 상징적인 언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 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그분은 충신과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분은 다시 오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식 하나도 없었고, 아예 태어날 징조 조차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롬 4:22-24)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의로 여김을 받은 것은 단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내어줌이 되셨습니다. 내어줌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 사망이 그분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죽으신 대속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구속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이 완성된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바랄 수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론:
오늘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 믿음을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100세에 낳은 아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번제로 바친 그의 믿음은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듯 느껴지고, 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창세기 15장을 펴고 자세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주실 것을 확인해 주시며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자 아브람은 이에 무슨 징표를 주시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희생 제물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짐승의 중간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펼쳐 놓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고대 근동 국가의 언약 체결식이었습니다. 송아지와 같은 짐승을 제물을 가져다가 둘로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언약 쌍방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쌍방이 그 쪼갠 제물로 지나가는 순간 그 언약은 성사되는 것입니다. 만일 언약을 어기면 이 쪼갠 제물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계약에 사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됩니다. 계약서를 자세히 읽어 보지 않고 사인했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즉, 계약에 사인하면 계약을 파기할 경우 계약서에 기록된 벌금을 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언약 체결식이 그러한 맥락이지만 아주 엄중한 언약식입니다. 만일 이 언약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저렇게 쪼개지는 제물처럼 될 것이라는 무서운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그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가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갑니까? 아브람이 아닙니다. 그날 밤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타는 횃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그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걸고서 이 언약을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합니다. “내가 천국의 새하늘과 새땅을 소유하게 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제가 영원한 천국 들어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너와 새언약을 맺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고 세운 새언약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을 받은 증거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것을 보장 받는 언약입니다. 아무도 이 새언약을 훼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파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하나님은 ‘내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이 언약은 쌍방으로 맺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이 사인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깨뜨리시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파기 시킬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 세웠기 때문에 새언약은 결코 파기 될 수 없습니다. 믿는 우리에게 새언약은 오늘도 변함없이 유효하고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의심되거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기에 우리를 지독하리 만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세운 새언약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모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이 믿음을 확증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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