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다 (06.18.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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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다 (06.18.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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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61회 작성일 Jun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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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6월 18일
본문: 로마서 4: 1-16
제목: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 다윗 율법 은혜 믿음 불법 할례 무할례 등 종교적 용어가 계속 튀어 나오고, 문장이 길고 이 말이 저 말이고 저 말이 이 말 같아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는 율법이나 할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더구나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타락이 일어난 이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도하는 인생을 살기에 율법적 성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을 의지하도록 학습 받고 경험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더 의지하며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배우고서도 여전히 확신이 안 생기고, 마음 한 구석에 꺼림칙한 채로 신앙생활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도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좀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딨는가! 내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애쓰고, 잘 믿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얼마나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고 의지하는지 모릅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복음의 영광을 충만히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다시 전하기 위해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로마서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변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는 이유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얻어야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하여 구원의 은혜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는 선언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을 변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서 최고의 믿음을 가진 자로 모두 인정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가장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을 주섰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언약을 맺는 언약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과는 직접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약속의 언약이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주어졌고, 마침내 그들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는 약속이 성취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증명한다면, 모든 유대인들도 율법이나 할례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증명함으로써, 신약에서 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의롭게 됨 (1-8절)

2절을 읽겠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물론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서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순종하여 길을 떠날 만큼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 또한 처음부터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에게도 허물과 실수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두려움에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래서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겼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셔서 아내를 되찾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나중에 한 번 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합니다. 또 자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참다 못해 사라의 몸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그는 이스마엘을 그의 후사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번번히 실패했고, 그의 믿음의 길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하며 믿음을 심어 주셨고, 17장에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흔들리고 있는 그의 믿음을 곧추세워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었습니까? 3절을 함께 읽어 볼까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행위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총총히 하늘에 박힌 별들을 가리키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몇 날 며칠에 자식이 태어나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별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별도 한 두 개 아니었습니다. 뭇 별. 수많은 별들을 보여 주시며 “네 자손이 저렇게 많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아직 없고, 나이는 85세인데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 같으면 믿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놀랍게도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모든 의심과 불신적인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가 이미 80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자식을 낳을 어떤 징조 조차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내게 자식을 주실 거야” “비록 지금은 자식이 태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고, 가능성도 없지만 장차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들을 주실거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에 그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고, 눈에 보이는 것 하나 없지만, 장차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에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들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기서 “여긴다”는 의미는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그렇게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그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만약 그가 믿음이 좋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럴 만한 자격이나 요건을 갖추어서 의롭다함을 받았기에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4절과 5절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예수님의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더러운 얼굴에 입을 맞추고 기뻐합니다. 좋은 옷을 내다 입힙니다. 값비싼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웁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습니다.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줍니다. 사실 그 아들을 기뻐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자식은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말아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금의환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뭘 잘했다고 맨발로 달려 나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잔치까지 벌여 줍니까? 이는 그가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하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아버지를 믿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버지를 믿고 공경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절되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다시 복원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나아올 때에 하나님은 두 팔 벌려 우리를 영접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라” “너는 이제 의인이 되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 행위가 의로와서 의인이 된 것 아닙니다. 내 업적이 훌륭해서 의인이 된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의의 옷을 입혀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어서 바울은 다윗의 사례를 통해 더 확실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다윗을 생각할 때에 부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는 소년 나이에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렸습니다. 그후 수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시도 잘 쓰고, 악기도 잘 다루었습니다. 마음도 넉넉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며 따랐습니다. 여인들에게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가 공적을 쌓고 돌아올 때 여인들은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런데 다윗은 이처럼 공적을 많이 쌓고, 사람들로 부터 인기가 있다고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정말 마음에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였을까요? 7,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 불법이 사함을 받는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이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의 최전선에 세우게 해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자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완전범죄입니다. 설령 눈치를 챘다 한들 감히 왕 앞에서 입 뻥긋할 수 있는 이가 누구겠습니까? 그래서 소문 소문으로 모두들 알면서도 쉬쉬하며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외치는 양심의 송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적을 쌓았는데, 골리앗도 물리치고, 사울왕의 핍박도 잘 감당하고, 그동안 내가 이긴 전투가 얼마나 많은데, 또 내가 도와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앞으로 더 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면 되겠지. 더 많이 선정을 베풀면 되겠지.’

그런데 그 무엇으로도 마음의 죄의식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내가 죄를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 “주께서 꺾으신 뼈들로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그는 얼마나 괴로왔던지 뼈가 썩는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다윗은 또 이전에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아서 미쳐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을 거두어 가실 때 악신이 그를 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시 38:2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아가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외적 조건으로 볼 때 부족함이 없이 살아도 그 마음에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다윗도 몸은 왕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그 내면의 죄의식으로 인해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때에 죄 사함의 은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복이 있도다 불법이 사함을 받는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이여”

우리도 가슴에 묻어 둔 죄로 인한 고통과 고민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들고 나아가 죄 씻음을 받게 될 때에 그 기쁨과 감격이란 이루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기쁨이 있지만 이 죄 사함의 기쁨만큼 큰 감격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기쁨은 창살없는 감옥에서 빠져나온 기쁨이요, 사형수가 무죄판결 받고 풀려나는 기쁨입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기쁨입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던데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와 그 피를 믿은 것 뿐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고, 천국 시민으로 삼아 주십니다. 과거의 죄를 따져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복과 평안을 주십니다. 장래의 소망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감사 찬송드립니다.

2. 할례 이전의 칭의 (9-16절)

그러면 이 사죄의 행복이 누구에게 임합니까?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임합니까? 아닙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그 마음에 믿음이 있는 자는 누구나 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후 14년이 지난 후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고, 그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할례와는 무관합니다. 할례는 언약의 백성이라는 표시로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훗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할례나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물론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중요한 표식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받아 주시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이 보증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은 지옥에 갈 수 없다고 랍비들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습니다. 할례를 너무 믿고 자랑했습니다. ‘할례당’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할례 받기 이전입니다. 이와같이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는 구원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세례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베풀어 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로 베풀어집니다. 구원받은 자녀가 되었기에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즉 세례 받는 것이 구원 받는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습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실제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James Kennedy 목사님이 창설한 <전도폭발>의 훈련 과정에서 나오는 첫번째 질문을 들어보신 분들 있으실 것입니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만약 오늘 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선다고 가정했을 때 하나님이 당신에게 ‘내가 너를 왜 천국에 들여 보내야 하지?’라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변하실지 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대다수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답변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첫째,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는 예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는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답변 모두 얼핏 듣기에는 아주 신앙적인 답변인듯 보이지만 여전히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 첫 번째 답변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예수님을 믿었고,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 답변한 분은 ‘믿음 위에 행위를 더한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 플러스 알파’ 즉 믿음 외에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미사에 참여하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고 답변한 사람은 ‘믿음이 행위가 된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었다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마치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근거로 삼는 것과 같습니다. 믿었다는 행위 자체가 또 하나의 자기 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결과가 된 셈입니다.

그 결과 내 믿음이 좋을 때는 구원의 확신이 들고, 천국이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반면에 요즘 믿음이 좋지 않다고 느껴질 때는 마치 구원과 천국이 내게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래서 확신이 없고 불안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까요? 앞으로 신앙생활을 더 잘해 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더 열심을 내어 기도하고 말씀 듣고, 봉사도 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렇게 노력해서 이제 좋은 믿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어 자신감이 듭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실 것이고, 내 기도를 들으시며 도우실 것 같습니다. 반면에 다짐하고도 노력에 실패할 경우에는 어떨까요? 당연히 나는 실패자이고, 하나님은 더 이상 나에 대해 관심도 없고, 사랑도 하지 않으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욱 더 비참한 느낌이 들고 좌절합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둘 중에 하나로 귀결됩니다. 아예 체념하거나 아니면 외식하게 됩니다. 체념하게 되면 더 이상 영적 도전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저 외형적 신앙행위로 자기 믿음을 이어가려고 할 뿐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하고 더 가까이 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도 평안도 없고, 복음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한 채로 살아갑니다. 아니면 외식에 빠져 바리새인들처럼 됩니다. 그 마음속에는 온갖 더러운 욕심과 추악함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냥 겉으로만 경건한 모양으로 형세를 합니다. 그리고 자기방어와 투사심리로 인해 오히려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아 남을 정죄하거나 비방합니다.

물론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가령 치명적인 질병을 걸렸을 때 가장 먼저 과거에 지은 죄가 생각나면서 ‘아, 내가 벌을 받았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구나.’하고 마음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이 죄의식의 문제가 해결 되지 않는다면 임종의 자리에서 공포심에 압도 당할 것입니다. ‘이제 죽는다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텐데…’하고 이것을 생각하면 심히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홀연히 우리에게 임하기 전에 복음을 잘 이해하고 믿어서 미리 준비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임종의 자리에 가서도 믿음이 견고해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믿는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 하나님에 그 강조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구원 받았던 원인(原因, cause)은 믿음이 좋은 아브라함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의 약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 아브라함을 의롭다하고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방편, 혹은 채널에 불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 인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2,000년 전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세워주신 새언약에 따라 오늘 믿는 우리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선을 행해서도 아닙니다. 믿음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은총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겸손하며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 반대로 불안하며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이 나의 행위로 온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하기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으로 확신을 가지십시오. 감격이 있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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