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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예외는 없다 (06.04.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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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87회 작성일 Jun 05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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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6월 4일
본문: 로마서 3: 9-20
제목: 예외는 없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서 나온 기사를 소개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정읍 덕천면 상학마을에 사시는 김만순 할머니를 인터뷰한 글인데 이분은 칠남매 중의 장남과 결혼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의 결혼생활을 유쾌하게 증언했습니다.

“시어무니를 한 사십 년 동안을 모시고 살았제. 그 세월을 시어무니랑 나는 쌈 한번도 안하고 좋게 살았어.“ ‘그렇게 살아낸 비결이 무엇일까요?’하고 묻자 “나만 비우문 되야.” 할머니의 즉답입니다. “시아무니야 시아부지야 시동생들 많은 속에서 나를 채와놓고는 못 살아. 내 마음속 뭐시든지 다 내려놓고 다 비와불어야지. 나를 비와야 그 사람 뜻이나 생각을 받을 수 있제. 내가 꽉 채와져 있으문 싸우기 마련이여.” 그렇다면 그 세월이 ‘나’라는 존재는 전혀 없었던 세월일까요? “아녀. 그러고 살다본게 인자는 내 그릇이 커져불었어, 하하하”(전라도닷컴 209호, 2019년 9월, p.24-25)

‘나를 채워 놓고는 못 산다’, ‘나를 비워야 다른 이들의 뜻이나 생각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지혜자의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 체득한 지혜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비우며 사는 삶이 일견 손해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커지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포용할 수 있도록 내 그릇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가난과 고된 노동, 그리고 무거운 책임이라는 대가족 속에서 얻은 지혜가 이렇게 깊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 부모님 시대까지는 공감하고 통용이 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를 전혀 공감할 수 없고, 이해조차 안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내 것으로 먼저 내 속을 꽉 채우며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할, 변함이 없는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외없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인정하고 받아 드리지 않는다면 구원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우리 속에 자신의 의와 자존심과 욕심과 교만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여름 장마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데 대접을 엎어 놓은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예외없이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좇아 늘 새로운 것에 정신이 팔려 있기에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그저 새 드라마에 몰입하고, 새 명품 가방을 들고, 새 자동차를 타고, 비행기로 여기저기 여행하며 살아가는 맛에 과거 뿐만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도 이 사실로 인해 수많은 비극으로 점철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외형적으로는 인공지능과 로봇공학, 3D 프린트 등 4차 산업혁명에 진입하여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 인간 자신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로 인해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역사의 종말에 대해 말씀해 줍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은 종말론적으로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지극히 비관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동시에 대단히 낙관적인 메시지를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장차 죄와 사망을 완전히 극복하는 영광의 그 날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1. 모든 사람은 죄 아래 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오늘 본문 9절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의 권세(power)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행위 자체 보다 죄의 노예로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본래 의미는 ‘과녁에서 빗나가다’’미달되다’로써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단을 좇아 하나님께 반역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우리 인생에게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의’이며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타락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후 사람들은 ‘의로움’대신 ‘불의’를 행하고, ‘생명’의 삶 대신 하나님을 떠난 ‘사망’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창 4:7)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문앞에 엎드려서 기회를 틈타 가인을 다스리기 원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죄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권세에 굴복하여 아벨의 피를 흘리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렇게 죄 아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 독이 됩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의 권세는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강력한 권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죄는 살아있는 인격과 같아서 사람을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아예 인간의 본성에 죄가 자리 잡고 있어서 죄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 8:32)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2. 죄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타락시켰습니다.

죄는 한 사람의 의지뿐 아니라 감정과 지성, 신체에 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 존재의 어떤 측면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이를 교리적으로 ‘전적인 타락’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영역에 죄로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18절이 이것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1) 10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성경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증거합니다. 아담 이후로 죄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살아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고 하면 분명코 믿겨지지 않을 것이고, 받아드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자존심이 이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다가 아내를 빼앗깁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되풀이 하고, 나중에 아들 이삭도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끝까지 참지 못하여 애굽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노아는 또 어떻습니까? 당대의 의인이라고 인정 받았지만 홍수가 끝난 후 술에 취하여 자신의 하체를 드러내어 자기 자신과 함이 죄를 범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충직한 신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서, 그의 남편을 죽이도록 교사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벌써 하나님의 진노로 정죄를 받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자 메시아를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의 죽음으로 온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이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은혜에 이르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이전에 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 영역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너뜨렸습니다.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자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사망이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단절되고 영적인 어두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상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 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죄를 범한 인생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총명이 어두워져 영적으로 무지하고, 마음이 굳어저서 사망이 왕노릇하는 삶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인생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원수 되는 행동으로 인도됩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는 대신에 우상을 만들어 숭배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의 문명이나 부족에는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가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도 영적으로 무지하여 바알과 아스다롯과 같은 이방신들을 숭배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현대인들도 마음 속에 각양 우상들을 만들어 섬깁니다. 성공, 돈, 쾌락, 영광, 과학기술 등등. 그 결과로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롬 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3) 죄는 사람과의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2절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이 치우쳐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게 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에 마음이 부패하였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기에 그 소행이 가증하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13절 부터 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롬 3:13-17)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죄악성을 말로 나오는 몸의 지체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목구멍과 혀, 그리고 입술과 입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마음의 부패함을 보여 줍니다. 무덤안에는 시신이 썩어 부패합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아 시신의 썩은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마음의 부패한 속성이 목구멍을 통해서 말로 표현되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라고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은 마음에 악을 쌓아 두었다가 악한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이 부패했기에 그 혀로 속이는 것이 가득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채워져야 우리 입술에서 선한 말이 흘러 나옵니다. 이렇게 말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새로운 마음을 주실 때에 일어납니다. 이에 대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겔 37: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새 영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십니다.

3.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은 오직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맺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율법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사망 가운데 거하는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고 선포합니다. 죄인이 법정에서 죄가 드러나면 입을 막고 판사의 판결을 묵묵히 기다려야 하듯이, 지금 온 세상은 유죄 판결을 받아서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율법은 우리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이지 사람을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마치 X-ray를 찍으면 몸속에 있는 병을 드러나게 하지만 치료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며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그는 태어날 때 부터 왕족이자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고, 선지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오죽 율법에 따라 거룩을 지키며 구별된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 ‘내가 하나님을 알현하기에는,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기에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에는 너무나도 부정하고 부적합한 존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자 자신이 헌누더기와 같은 더러운 존재임을 자각한 것입니다.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어요. 누가 가르쳐 줄 필요 없어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내가 비천한 죄인이라는 사실이 저절로 깨달아 진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출발이 있어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잡게 해 주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막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를 살려 주십시오.” 이런 고백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만약 내가 암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는데 아직 통증이 없다고 병원에 안 가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얼마 후에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서 손 쓸 수 없을 때가 옵니다. 그때는 아무리 울며 통곡하고 사정사정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X - ray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진단을 해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의를 자랑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결론: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존심이라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합시다. 그리고 자기 의를 더 이상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분만을 나타내도록 합시다.

사실 구원이 내 자신의 행위와 의로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감미롭습니까? 만약 구원이 내 손에 달렸다고 한다면 이처럼 불안정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아무도 죽는 순간까지도 구원에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복되신 구세주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소망을 품을 수 있고, 확신을 가지며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복음을 확실히 증거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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