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다 (06.11.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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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다 (06.11.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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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78회 작성일 Jun 1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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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3년 6월 11일
본문: 로마서 3: 21-31
제목: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남에게 기쁨이나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주는 것이 선물입니다. 아무런 기대가 없는데 뜻밖에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 선물이 크고 작은 것과 달리 그 선물에 정성이 들어 있으면 더 기쁠 것입니다. 어린자식이 어머니날이라고 카드 하나 달랑 주어도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나중에 그 자식이 일이 잘 풀려서 어느 날 선물을 가져 왔는데 명품 가방입니다. 값비싼 선물이어서 기분도 좋겠지만 그 자식의 마음 씀씀이에 우선 감동이 될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쁘고 감사하겠지요. 모임 자리에 가서 그 가방을 땅에 내려놓을까요? 절대로 내려 놓지 않고 무릎 위에 놓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 부터 값을 매길 수 없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기쁨과 감격은 얼마나 클까요? 진정 그 선물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면 온 몸에 전율이 일만큼 충격을 받게 될 만큼 감격스러워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 감격과 감사가 없는 것일까요? 아마 우리가 복음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본래 사람들이 그래왔습니다만 특히 코비드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더 많이 물질적이고 쾌락적인 일에 더 몰입하고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이 지역에 세계에서 제일로 꼽히는 골프장이있지 않습니까? 전세계에 골프 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쯤 쳐보고 싶어할 만큼 명성이 자자합니다만 너무 비싸기 때문에 아무나 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손님들이 많은지 그들이 묵는 방이 꽉꽉 들어찬다고 합니다. 코비드 동안에도 그랬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의 흐름을 좇아서 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세상이 더 화려하고, 멋있어 보이고, 재미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받은 복음이 세상 것보다 더 시시한 것입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이 무시해도 될 만큼 별볼일 없는 것일까요?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금이나 은 같은 보석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명품 가방이나 다이아몬드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어 피를 흘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지독한 사랑에 사로잡히면 세상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순교의 자리까지 가는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생명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미 믿고 있던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로마서를 공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을 올바르게 깨달아야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3장에 걸쳐 가장 먼저 우리 인간의 영적 실존 상태에 대해 진술합니다. 검은 천 위에 보석이 반짝이듯이 복음의 진가가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모두에게 복음의 영광과 구원의 감격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의 의(21,22절)

우리 인간은 본래 의롭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에 이르고자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 의에 이르고자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어떤 사람은 속세를 떠나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습니다. 한국의 성철 스님은 자기가 기거하는 암자에 철조망을 쳐 놓고 수양을 쌓았다고 합니다. 16년 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8년 동안을 장좌불와(長坐不臥), 눕지 않고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죄에서 자유하고, 의롭게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탁발승들은 고행기간에 깨어진 유리 위를 걸어갑니다. 못 침대위에서 잡니다. 뜨거운 연탄불 위에 눕습니다. 온 몸에 유혈이 낭자한데도 그렇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늘로 혓바닥을 찌르기도 하고, 물구나무 서기를 한 상태에서 몇 일을 보내기도합니다. 더러운 세상에 발을 딛지 않기 위해서 세운 통나무 끝에 올라가 몇 년을 살기도 합니다. 단식을 너무 많이 해서 피골이 상접하기도 합니다. 티벳의 라마승들은 그들의 경전이 담긴 쇳통을 수없이 돌리고 또 돌립니다. 그렇게 하면 정결케 된다고 믿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어떤 신적인 존재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합니다. 더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더 많이 착한 일을 하고, 고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들이 믿는 신 앞에 자신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고를 했으니, 저렇게 헌신을 했으니 하나님이 날 받아주실 것 같고, 저 사람과 달리 나는 이렇게 했으니까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되어 할례를 받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켰으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심판은 이방인들에게 있을 것이고, 구원은 유대인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로마서 3장 9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다. 또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23절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고행하고 수양하고 도를 닦아도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은 별의 별 수를 다 써보아도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그 마음 깊은 곳 속에 영광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이에 이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쇠는 아무리 갈아도 금이 되지 않는다. 돌을 아무리 갈고 갈아도 다이아몬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영적 실존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다같이 21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제는” “But now” “그러나 이제는” 이 말씀은 대전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전까지는 없었는데 이제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는 별의 별 수를 다 써보아도 소용없었는데 이제 소망의 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그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의(a righteousness from God)”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시도가 왜 실패했습니까? 그것은 모두 ‘인간의 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는 ‘인간으로 부터 오는 의(a righteousness from a man)’ ‘인간으로 부터 시작되는 의’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미 죄으로 인해 그 뿌리가 썩고 부패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하나도 없도다” “There is no one righteous, not even one”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전적 부패입니다. 의에 대해서는 전무하고, 죄에 대해서는 전원이 다 범법자입니다. 이런 인간에게서 무슨 의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무슨 선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로마서 7:18절 말씀처럼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순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엡 4:18). 인간의 의는 이처럼 썩은 밧줄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붙잡고 어느 누구도 하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 외에, 인간의 의 외에, 인간의 행위와 노력 외에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내려온 의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의의 밧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사 그를 믿기만 하면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자신들의 의와 노력으로는 도저히 의에 이르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이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를 의롭다고 인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과거, 그의 허물, 그의 죄를 묻지 않고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늪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원의 밧줄을 던져 주었을 때에 그 밧줄을 붙잡기만 하면 구출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얼마나 선하게 살았건 추하게 살았건,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어른이건 어린아이건, 남자건 여자건, 사장이건 종업원이건 차별이 없습니다. 구별하지 않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24-26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이란 ‘댓가를 지불하고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제국에서는 노예가 아주 많았습니다. 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팔았습니다. 지나가던 한 사람이 발길을 멈춥니다. 경매에 붙여진 노예가 너무나 가엽습니다. 그래서 그 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샀습니다. 이제 자기 소유가 되었는데 노예를 불쌍히 여겨 아무런 댓가없이 그냥 풀어주어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속량’이란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범법자들입니다. 죄를 범했으면 댓가를 치루어야죠. 교통법규만 위반해도 300불, 500불 벌금을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생을 두고 말과 행위, 그리고 마음과 생각으로 지은 죄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의 형벌로 죽어야 마땅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값을 치루어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고 우리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으로 그 댓가를 지불하고, 우리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지불한 댓가는 없습니다. 고행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몇 발짝 따라간 것도 아닙니다. 채찍에 한 대도 맞지 않았습니다. 침뱉음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모든 질고와 아픔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기만 했습니다. 오직 그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선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나음을 주셨습니다. 평화를 주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아무 공로 없는데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5절을 볼까요?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구약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림으로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하였습니다. 그들은 순결한 어린양의 피를 뿌림으로 죄로부터 정결케 하고자 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그 죄의 댓가를 지불하기 위해 피를 쏟아야 합니다.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점 없고 흠 없는 어린양을 잡아서 깨끗한 피를 번제단에 뿌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풀고, 죄로 오염된 몸과 마음도 깨끗케 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는 일시적이고 한계가 있습니다. 제사장도 매번 바뀝니다. 이는 장차 올 온전한 것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히 8:5). 그런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사 그의 거룩한 피로써 우리의 더러운 죄를 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사람의 피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피입니다. 겉모양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 점없고 흠없는 천국의 피를 그 속에 담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예수님의 피는 죄로 오염된 피가 아니요 성결한 피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더럽고 오염된 피를 능히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을 때에 내 안에 예수님의 피가 들어와서 모든 더럽고 오염된 나의 피를 다 씻어 주십니다. 청소해 주십니다. 죄의 독성을 제거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상하게 그 마음에 독이 사라집니다. 미움의 독성이 물러갑니다. 시기심의 독성이 사라집니다. 낙심과 패배의 독이 걷히게 됩니다. 음란의 세력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사랑과 용서, 평강과 기쁨, 성결과 거룩의 영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내 속사람이 달라져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의 피가 내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내 안에 아담의 피가 물러가고 예수님의 피가 수혈되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깨끗해졌습니다. 가치관이 깨끗해졌습니다. 마음의 소원이 깨끗해지고 열망이 깨끗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desire’ 가 ‘dirty desire’ ‘sinful desire’ 였는데 이제는 ‘holy desire’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의 desire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청승맞은 유행가를 좋아하던 사람이 찬송가를 좋아하게 됩니다. desire가 바뀐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이 바뀌었습니다. 본질이 바뀐 것입니다. 근본이 바뀐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까? 나의 노력으로 된 것입니까? 나의 수양으로 되어졌습니까? 훈련으로 되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믿은 것 뿐입니다. 화목제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것 뿐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이처럼 완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까? 25b절과 26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그 속성 자체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무조건 죄를 눈감아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냥 눈감아 주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의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타락한 우리 인간을 다 죽일 수도 없습니다. 아무 선을 행할 의지도 없는 우리에게 댓가를 요구하실 수도 없습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제물로 내어 놓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모든 죄의 댓가를 다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 믿는 우리도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의는 득의(得意)가 아니고 칭의(稱義)입니다. 내가 내 노력으로 얻은 의가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의롭다고 칭해주신 의입니다. 그래서 은혜요, 선물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값을 하나님이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 받는데 있어서 자기 의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자랑할 수 없느니라(27-31절)

그러므로 27절을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우리는 하나님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내가 아무리 수양을 많이 쌓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의 앞에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행위로, 노력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28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내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가증스러운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씻어 주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의 기록들을 다 말소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사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누구로 말미암아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말미암아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 앞에서도 자기 의를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믿음 좋다는 것을 은근히 나타내어 자랑하려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맞는 말이지만 이를 마치 내 믿음이 좋아서 구원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해 자기 의를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로 삼습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믿는 바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나는 단순히 믿고 받아드린 것 뿐입니다. 여기에 자랑이 어디 있습니까!

결론:
세상은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재물, 돈, 성공, 권력, 재능, 배경을 자랑합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든든히 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의 영광을 본 자들은 더 이상 자기 의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맛본 자들은 더 이상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높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값없이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그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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