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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다함이 없는 만족 (2023년 5월 2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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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66회 작성일 May 29 2023

본문


날짜: 2023년 5월 28일
본문: 요한복음 7:37-39
제목: 다함이 없는 만족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기본적인 욕망과 욕구도 함께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식욕, 성욕, 소유욕, 성취욕 등이 있습니다, 본능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본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식욕이 있어야 잘 먹고 건강을 유지할 것 아닙니까? 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청춘 남녀가 만나면 스파크가 일어나요. 그래서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만 늑대같은 남자를 바라보고 여자는 행복을 꿈꿉니다. 여우같은 여자를 보고서 남자는 황홀해서 결혼을 결심해요. 만약 남자와 여자가 만났는데 목석같이 아무 느낌이나 감동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종족이 번식되겠어요? 또 사람에게 소유욕과 성취욕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이지요. 소유욕과 성취욕이 없다면 경제활동, 사회활동이 성립되지 않아요.이런 본능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절제속에 잘 다스려지면 인간 사회는 발전하고 진보하게 되어 있어요. 기독교는 결코 이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죄가 개입되니까 우리의 본능이 콘트롤이 안되는 겁니다. 왜곡되고 뒤틀려서 절제할 수 없어요. 조화와 균형이 깨뜨려졌어요. 그래서 타락한 본능대로 살게 되면 꼭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자연계의 맹수들, 사자와 호랑이를 보세요. 그들은 배가 고플 때만 사냥합니다. 배가 부르면 그 앞에 노루와 사슴이 얼씬거려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해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않거든요. 끝없이 욕심을 부립니다. 만족할 줄 몰라요.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이어스라는 사람이 [행복의 추구]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좀 더 행복하게 될 것 같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월급 3,000불을 받는 사람은 4,000불을 받게 되면 더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파트 1베드룸에 사는 사람은 2베드룸에서 살면 더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해요. 회사에서 과장인 사람은 부장이 되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순간에는 잠깐 동안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4,000불을 받게 된 사람은 5,000불을 받고 싶어 하고, 아파트 2베드룸에 살게 된 사람은 하우스에서 살고 싶어하고, 부장이 된 사람은 이사가 되고 싶어 하게 되어 있어요. 결국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더 하는 거죠.

타락한 인간의 욕망은 무한정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가지고 결코 채워 질 수 없고, 또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갈증을 갖게 되고 욕심을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과 충만함을 줄 수 없어요. 그렇다면 진정한 기쁨과 만족, 그리고 충만한 삶은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복된 길, 형통한 길, 생명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수를 구하기 위해 엉뚱한 곳에서 샘을 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지팡이로 반석을 칠 때 그 바위에서 물이 터져 나온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갈시켜 줄 수 있는 생수가 오직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터져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수의 강, 은혜의 강이 되어 흘러 온 인류를 구원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1. 목마른 자를 초청하시는 예수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도시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였어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의식을 행하는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본거지였어요. 이 예루살렘에서 초막절에 일어났던 사건을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어요. 초막절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생활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중요한 3대 절기에 속해요. 이 절기가 되면 전국각지에서, 해외에서 모든 유대 남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갑니다. 절기가 진행되는 예루살렘 성에서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로 인하여 피비린내와 함께, 제물을 태우는 냄새로 가득했을 거예요. 그리고 각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은 제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거예요.

마침내 초막절의 모든 행사와 종교 의식이 끝나고 전례에 따라 실로암 못에서 길러온 물이 엄숙하게 제단위에 부어졌어요. 이것으로 흥분되고 감동적이었던 종교의식과 행사는 다 끝났어요. 이제 사람들이 집으로 떠날 시간이 왔습니다. 그런데 발걸음을 돌려 자기 집을 향하는데 뭔가 허전했어요. 왠지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식은 화려하고 웅장하였고, 모든 것이 율법에 맞게 정확하게 실행되었는데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어요. 그래서 집을 향해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어요. 마음에 실망감이 가득했어요. 마음을 누르는 죄의 짐, 양심의 가책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아무런 감동과 변화도 없는 채 쓸쓸히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이런 무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께서 드디어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저는 예배란 우리의 영혼 상태를 발가벗겨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다 보시고 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스럽게 치장하고 있는 종교적 의와 선행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헌누더기와 같은 겉껍질을 벗고 발가벗은 나신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채워질 수 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움 받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에 교만과 욕심, 그리고 정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사로잡히고 눈에 씌워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는 것을 하나의 연약함 표시라고 여겨요. 그런데 우리 사람은 육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다 채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예요. 영혼의 문제가 있어요. 죄의 문제가 있어요. 천국과 지옥의 문제가 있어요. 이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영혼의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깨어난 양심이 부르짖는 갈증이예요.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갈급해 하는 갈증입니다. 영혼의 구원을 사모하는 갈증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충만한 베드로는 강력하게 십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의 양심에 찔림이 왔어요. 마음에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서 양심이 깨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자각한 거예요. 자신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깨달은 것입니다. 영원한 파멸을 고통스럽게 바라본 거예요.

그들은 일찍이 예수님으로 부터 부자와 나사로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부자가 생전에 호화롭게 살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그 집 앞에서 비참하게 살던 거지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는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습니다. 죽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 세계에서도 지금 이 세상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요. 그래서 부자는 지옥불이 너무도 뜨거워서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눅 16:24).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한 파멸이 있다고.

십자가 복음은 항상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로써 사람은 육체의 만족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합니다. 영원히 멸망할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해줘요. 그래서 구원을 갈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찍어 혀를 시원하게 할 만큼 목마름과 갈증이 느끼는 것처럼 갈망합니다.

2.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에게 언제 구원을 갈망하게 됩니까? 십자가의 복음을 들을 때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마름과 갈망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께서 목말라하는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합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성에 맞지 않다고 해요. 과학적이 아니다고 해요. 상식에 맞지 않다고 해요. 그러다가 죄의 독소로 죽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짓 같아도 하나님 말씀이니까 그대로 믿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하면 거듭나는 일이 없고, 믿음도 발생하지도 않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교회 영적 생명력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하니까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문제의식이 없어요. 차갑게 식어버린 가슴을 가지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았다가 감동 없이 돌아갑니다. 말씀을 들어도 세상 일에 대한 염려와 쾌락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열매 없는 신앙생활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양심의 종소리를 쳐주십니다. 비록 낮 시간에는 분주함으로 양심의 소리를 눌러 버릴지 몰라도, 고요한 밤중에 침상에 누어있을 때, 병이 들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천장만 쳐다볼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자기 영혼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정에 문제가 있고,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생기고, 건강에 빨간불이 켜질 때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이 주님의 초청을 들을 때 우리는 골고다의 십자가로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에 죄 사함과 화해, 구원과 생명이 있어요. 생명이 소생함을 받습니다. 능력 있는 삶으로 회복됩니다. 성도들의 가슴에, 교회에 부흥이 찾아옵니다. 광야 반석에서 물이 콸콸 터져 나오는 것처럼 우리 영혼을 흡족히 채워주는 놀라운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생명력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문제 해결책이라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3.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충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결코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하십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려면 성령님이 오셔야 합니다.

(요 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배’란 인간의 기본적 본능의 욕구와 욕망의 근원지를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이것이 모든 탐욕과 욕심, 그리고 정욕의 원천이 되어서 우리 삶을 휘어잡아갑니다. 우리를 죄 짓도록 끌고가는 거예요.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믿고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배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생수의 원천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일생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생수를 공급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 명령대로 반석에게 명했을 때 물이 터졌습니다. 바위 밑에서 나온 것 아닙니다. 바위에서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소수의 사람들만 간신히 목을 축일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가축까지 다 마시고도 남을 만큼 수량이 풍부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를 풍성이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 요한은 이를 해석하기를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믿어서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 우리의 배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원천으로 변한다고 말씀합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일생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수를 공급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크리스천의 삶이 어떻습니까? 생수를 공급 받아서 하나님의 부요와 풍성함을 충만히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영적으로 침체에 빠질 때 어떤 모습일까요? ①믿음이 약해지고 부정적이 됩니다. ②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③하나님의 일에 열정이 줄어듭니다. ④헌신의 마음이 점점 없어집니다. ⑤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나태해집니다. ⑥경건생활에 점차 관심이 적어집니다. 그 대신 세상일이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⑦죄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지고, 죄의 경계선이 모호집니다.

이렇게 영적 침체에 빠지면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에 별로 쓸모가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쟁이가 그렇고 그렇지’라고 조롱을 받습니다. 머리가 깎인 삼손이 블레셋군대에 붙잡혀서 두 눈이 빠지고, 짐승처럼 연자 맷돌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삼손이 누구입니까? 그는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군대 3,000명을 혼자서 때려죽인 괴력의 사나이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때에는 아무도 그를 당할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실인으로서의 언약을 파기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은 무력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한 영웅의 투쟁과 비극을 재미있게 들려주기 위해 기록된 것 아닙니다. 삼손은 바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언약의 백성이기에 그들을 대적할 민족이나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패역의 길로 갔을 때 결국 바벨론 패망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오늘 교회가 세상에서 마치 머리가 깎인 삼손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등치는 커서 허우대는 말짱한데 허우적거리며 헛발질만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많아져서 사회에서 한 세력을 이루고 있지만 실상 아무 쓸모가 없는, 영적 무력증이 만연하여 있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져 무려감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어떻게 대처할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것은 세상 학문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의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세상 권세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 그래서 간절히 성령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더 이상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대는 믿고 나오는 모든 이에게 자기 영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 받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죄 사함과 용서, 평안과 소망, 기쁨과 활력을 계속 채워주시겠다는 거예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그 사람의 영혼을 촉촉히 적셔 주시겠다는 거예요. 자신의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받을 뿐만 아니라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들 영혼에게까지 미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죄 때문에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의와 생명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마음 저변 깊은 곳에서 ‘평화 평화로다 하늘에서 내려 오네’하고 찬양을 할 수 있어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수 있어요. 이웃을 돕고 섬길 힘이 있어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마치 댐에 물이 차서 마침내 흘러넘칩니다. 그래서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공급하는 것처럼,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부요하심이 차고 넘치니까 환경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겪었던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고후 11:24-27)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이 그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질그릇 안에 그리스도를 담고 있어요.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놀라운 생명력이 나타나는데 특히 고난 중에 있을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고후 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환란과 곤고의 때에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 성도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담대함, 가장 고통스러운 재앙 속에서 평정을 잃지 않는 평안, 위험한 자리에서 요동함이 없이 여전히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심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우리 크리스천 삶이 얼마나 부요한지를 세상에 확실하게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모두에게는 복된 소망 있습니다. 영광의 그날 우리에게 약속된 부요함과 충만함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 22:1-2)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 영광의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어린양 예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우리를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아무 죄가 없지만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부활하신 예수님. 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성령의 생수를 흘려보내 주십니다. 이 생명수는 우리의 모든 더러운 죄를 다 씻어 주십니다. 우리 안에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신령한 기쁨이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솟아나게 하십니다. 뭘 가진 것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고 잔잔한 평화가 우리 마음에 흐릅니다.

하나님과 진정으로 화평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충만하기를 원합니까? 다함이 없는 만족으로 감사가 넘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영혼의 갈증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듯이 “주여, 내가 목마르나이다. 내 영혼이 목마름으로 온 몸이 뒤틀리나이다“하는 갈망과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범죄함으로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내 죄를 생각하니 비통하기 그지 없고 죄 짐이 무거워 견딜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복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것이요,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름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주리고 목마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그 의를 갈망하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주님과 함께 충만하게 누리기 원하십니까?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로 돌아가십시오. 거기에 능력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쫓아가십시오. 자기희생과 섬김, 그리고 사랑의 길로 가십시오. 여기에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성령의 충만하심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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