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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약속하신 성령님 (05.21.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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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21회 작성일 May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5월 21일
*제목: 약속하신 성령님
*본문: 사도행전 1: 1-5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기독교 절기 중에서 굳히 세 가지를 꼽는다면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성령강림절을 강조한 적이 없어서 생소하게 생각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셨고, 그리고 삼일 후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승천하신 후 10일, 즉 부활주일로 부터는 50일째 되는 오순절에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일이 부활주일로 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되어 성령강림주일이 되겠습니다. 왜 성령강림이 중요한가, 한 마디로 이로써 신약교회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는 성령님에 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대해 생각할 때에 가장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분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각각 자기 자신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지니신 인격체이십니다. 그리고 영광과 능력과 권세에서 있어서 동등합니다. 그런데 간혹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성령님을 마치 하나님의 능력이나 영향력 쯤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령을 일단 받으면 내가 마치 성령을 불릴 수 있는 것처럼, 그래서 원하는 대로 능력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그분께 순종해야 하며, 그분을 높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그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인도와 지도를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제삼위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 인간이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을 감지할 수 있는 TV 안테나와도 같아요. 그런데 그만 “죄와 허물”로 인해 이 영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엡 2:1). 즉 안테나가 고장 난 것과도 같아요. 안테나가 고장 났으니 화면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이 죽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부터는 영이 죽은 상태에서 자녀들을 낳으니까 자녀들 또한 모두 영이 죽은 상태로 출생합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영이 다시 살아나서 마치 화면에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 심령 가운데 하나님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내주하시기에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성령으로 마무리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성령을 받지 않고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고 기독교인다운 모습을 갖추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성령이 없으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롬 8: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기독교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 받았으니 이제 내 힘으로 알아서 해 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롬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눅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공동저자입니다. 전직이 의사였던 누가가 누가복음에 이어서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서두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의 내용을 반복하여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이 그렇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곧 성령님을 가리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에 절정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이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메시아가 죽어야 하는지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활 또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을 풀어 깨닫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핵심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후 부활하셨는데 이제 이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의 은총을 얻게 하는 회개를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위해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을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하셨던 성령께서 보내시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약속하셨던 복,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하신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성령님이 주도적으로 행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약속하신 성령님’의 제목으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셨는지 그 역사 배경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성령님이 오셔야 하는지 이해의 문이 열리고, 우리 마음의 중심에 성령님에 대한 열망과 갈망이 더욱 간절해지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 나라와 새 언약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하신 일, 승천하시기 전 40일 동안 무슨 일을 하셨는지, 사도행전 1장 3절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행 1: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

승천하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전생애를 걸쳐 전파하시며 가르치시고, 병고침과 귀신을 쫓는 등 모든 사역과 심지어 죽고 부활하신 일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에 대해 강조하는 점은 ‘하나님이 우리 왕이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도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순복함으로 그분의 통치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현존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절대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기사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온 우주의 통치자가 되시고 왕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땅에 자신의 대리자를 두셨습니다. 아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에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셔서 하늘과 땅의 전체의 왕이시고 주가 되시는데, 하늘에 거처하시는 하나님께서 땅에 자신의 대리자로서 아담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질서가 있고, 그 질서 속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적절한 정의를 내린다면 죄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하는 행위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도주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반항과 도피, 하나님께 대들거나, 아니면 그 하나님이 싫어서 멀리 멀리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 대드는 행위로 점철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먼 곳으로 도주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를 특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했다고 말합니다. 언약, 파기 이 두 단어는 법정에서 쓰이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보다 인격적이고 관계성의 면이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언약 파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파괴, 훼손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언약은 당사자의 인격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지극히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상호신뢰와 성실성으로 약속은 견고해 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파기되면 가장 허망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배신했다는 말로 비통해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로 열방 중에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라는 전무후무한 독특한 구원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독특한 정체성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태두리 안에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삶과 해위를 통해 이 세상 민족들이 의와 구원, 복과 평화, 길과 진리, 빛과 생명에 대해서 배우고 열망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소명이자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영광스러운 소명에 부응하지 못하고 은혜의 자리에서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언약 파기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아니 들었어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습니다. 선지자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언약백성 유다의 형편을 다양한 모양으로 묘사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먼 곳으로 가버린 탕자와 탕녀로, 실실한 남편의 품을 떠나 다른 정부를 좇아간 불륜과 행음의 여인으로, 아니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썩어 들어가는 불치병의 환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 자신은 정작 이런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소수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만이 임박한 심판의 날을 바라보고 탄식합니다. 그리고 결국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수많은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강제로 바벨론에 끌려갑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무너져 페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깨지고, 그로 말미암아 언약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전적으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실패로 끝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합니다. (렘 31:31-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셨는데 옛 언약을 용도 폐기하기 위해 새 언약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옛 언약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언약을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옛 언약 아래서는 이스라엘과의 깨어진 언약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기는 했으나, 그들의 내면적인 세계는 여전히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옛 언약을 깨뜨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으로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의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렘 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돌에 새기지 않고, 사람 마음 판에 새기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순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고, 또 그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약속대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배반당하시고 잡히시던 밤에 잔을 드시며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피를 통하여 새 언약으로 옛 언약을 대치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의심하던 제자들을 책망하시며 구약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그예고한 그대로 성취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주십니다.

(눅 24:44-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피를 통하여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대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삶이 가능하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을 근거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 마음에 효력이 발생하여 죄사함과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능력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2. 약속의 성령님

사람이 죽으면 몸이 뻣뻣하게 굳습니다. 매우 부드러운 간이 굳으면 간경화가 되어 죽게 됩니다. 동맥도 경화가 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마찬 가지로 마음도 강퍅케 되면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패역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면 새 영을 받아야 합니다. (겔 36:2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농사를 지을 때 단단한 땅을 파고, 엎고, 물을 넣을 때 흙이 부드러워 집니다. 그리고 써레질을 하여 땅을 더 부드럽게 한 후 모를 심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새 영을 받을 때 마음이 부드러워져 옥토가 되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새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약속하신 성령님을 오순절에 보내셨습니다.

3. 성령님이 주실 복

(행 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약속에 따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할 때 사도들이 다같이 성령 충만하여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며 당혹해 했습니다. 저들이 낮부터 새 술에 취했다고 비방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면서 요엘서의 성경구절(욜 2:28-32)을 인용합니다.

(행 2:16-18)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하나님은 구약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종말에 성령을 주시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부어 주시듯 풍성하게 부어주실 주실 것을 약속합니다. 특정 대상, 영적 엘리트에게만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 초자연적으로 부어주십니다. 인간의 최대 불행이라면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서 떠나는 일일 것입니다(창 6:3; 시 51:1). 인간이 오직 육체의 일을 좇는 자가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너희들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예언의 성취라고 베드로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이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도 엄청난 복을 내려주실 것인데,

첫째로, “너희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예언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섭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미래에 펼쳐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담대하게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복됨을 보게 되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재림에 대한 일들을 증거 하게 됩니다.

둘째로,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패역한 이스라엘은 강대국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능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막을 힘이 없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시체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더 불행한 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비전도 가질 수 없습니다. 절망과 죽음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자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비전과 소망을 갖게 되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셋째로,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노인의 특징은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 진리를 깨닫게 하여 우리 몸이 다시 부활할 것을 믿게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고, 살아 있는 자들도 홀연히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천수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그 장엄한 광경을.

(계 7:9-12)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노인들은 바로 이런 영광스러운 천상의 예배를 꿈꾸게 됩니다. 그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대한 열정과 열심을 품게 됩니다.

결론: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성령님을 환영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십니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도 전심으로 기도하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임하셨던 것입니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행 2:1-4)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오늘 우리도 이 성령님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합심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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