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충성 (05.14.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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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충성 (05.14.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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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702회 작성일 May 15 2023

본문


*날짜: 2023년 5월 14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충성 (가정의 달 2)
*본문: 릇기 1: 11-18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가 불편없이 살고 있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고, 쾌적한 환경을 누리며 살고 있다면 누구가의 수고가 있기 때문이고, 우리가 따뜻한 밥 한그릇 즐기고 있다면 누군가의 섬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어머니입니다. 오늘은 어머니주일이자 어버이주일입니다. 희생과 섬김의 삶을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에게 오늘 위로와 평강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올해 2월22일,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숫자 하나에 온 세상이 놀랐습니다. ‘2022년 합계 출산율 0.78명’입니다. 가임기 여성 한 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아이의 숫자가 0.78명이라는 얘기입니다. 외국인 유입 없이 인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합계 출산율이 2.1명을 넘어야 한데 0.78입니다. OECD 가입 국가 중 합계 출산율이 1명 밑으로 떨어진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론 외신마저 한국의 합계 출산율을 주요 뉴스로 보도했습니다.

어쩌면 국가 존망이 달린 문제인데 이것은 단순히 숫자와 통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한국 사회에서 ‘연애하고 결혼하며 아이를 낳아 기르는’생애 모델 전반이 붕괴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2030 젊은 세대는 아이는 커녕 결혼 조차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2017년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틴 라가르드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집단자살(Collective Suicide) 사회’라고 지칭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 청년들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애 과정을 포기할 만큼 한국 사회가 아주 병적인 위기에 처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현재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기 어려운 현실적 문제가 큽니다. 그리고 시대정신의 변화입니다. 가령 20대 여성에게는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삶’이 더 이상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굳히 자녀와 나 둘 중 ‘양자택일’해야 한다면‘자녀’라는 존재의 성공보다 나의 성공과 행복이 우선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아이가 있어도 내 행복을 위해서라면 이혼할 수 있다’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가치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까지는 단기간 고도성장하는 중에 결혼과 출산, 육아 전 과정에서 여성들의 희생적 출혈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성들이 더 이상 ‘손해’를 감수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 수록 개인의 희생에 대해 아주 비관적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국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 문제점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이야기하고자 함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권리와 권한을 주장하고 지킬 만큼 똑똑하고 영악합니다. 손해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바보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적 영향 탓인지 교회에서 조차 예전처럼 하나님께 전적인 항복, 헌신과 희생, 섬김과 봉사,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등등 이런 용어 사용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대신 축복, 기도 응답, 승리 등등이 좋은 믿음의 결과 인양 언급되고 있습니다. 어느덧 우리에게는 고통과 희생이 부자연스러운 것이고, 성공하여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는 것이 당연히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보다 넓고 편한 길을 원합니다.

대도시에 가 보세요. 교회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대형교회로만 몰리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교회에 가면 제공 되는 프로그램들이 많고, 자녀교육을 위해서 시스템이 잘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대중 속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헌신하지는 않고 예배만 드리고 떠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시대적 정신을 거스리는 삶을 권면합니다.  (빌 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타인 중심의 삶입니다. 자연히 자기중심적 시대의 흐름을 좇아가지 않고 주님의 뜻을 좇아갑니다. 그러기에 이 길은 모든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한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모압여성 룻이 이 좁은 길을 택했습니다. 타인에게 조금 양보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 전부를 희생하기로 한 것입니다. 룻도 어릴 적에 부모의 사랑과 동기간의 우애 속에서 자랐을 것이고, 결혼할 때는 행복을 노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남편과 일찍 사별했지만 희망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댓가가 보장되지 않을 수 있는 길에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홀로 된 시어머니에게 충성하기로 자원해서 결단했습니다. 누가 강압해서 그렇게 한 것 아닙니다. 그렇다면 룻이 좁은 길을 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룻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게 했을까요?

남편도, 두 아들도 먼저 세상 떠나 보내고, 홀로 남게 된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제 쓸쓸하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다 늙은 나이에 과부 신세입니다. 남은 재산도 없습니다. 앞으로 며느리에게 의존해야 하는 시어머니의 신세는 과거나 지금이나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일 것입니다. 늘 미안하고,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산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더 짜증나게 하고 피로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롯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앞길이 너무나 애처럽게 보였습니다. 그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룻은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결단했습니다. 물론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예수님도 좁은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지신 것 아닙니다. 자원하여 그 길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삼 일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는 영광의 주가 되셔서 만인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입니다. 이 영적 진리가 진실임을 우리는 룻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룻의 인애

나오미가 고향으로 향할 때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나오미는 생각했습니다. '두 며느리와 함께 돌아간다는 것은 자기 욕심이지, 두 며느리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것을 요구할 수 없다.’ 그래서 두 며느리에게 권합니다. “나를 따라 내 백성에게로 돌아간다고 해도 소망이 없다. 차라리 너의 친정집으로 돌아가서 좋은 남편을 만나 새롭게 가정을 이루라”

간곡한 나오미의 권면에 오르바는 울면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룻은 여전히 나오미를 붙들고 떠나지 않습니다. 룻이 오르바처럼 자기 민족에게 돌아갔다고 해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르바가 떠난 것을 비난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룻기 기자는 오르바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시어머니의 상식적인 판단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입술을 통해 룻과 오르바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이미 충분히 인애를 베풀었다고 언급합니다. (룻 1: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오르바가 먼저 나오미에게 떠나겠다고 요청한 것 아닙니다. 나오미가 먼저 그들에게 각기 어미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그들은 소리 높여 울며 (룻 1:10) “나오미에게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따라 간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있어서 이방 땅에서 과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의 권고대로 시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떠난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울며 떠났습니다.

룻도 얼마든지 오르바처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곤궁에 빠진 나오미를 그냥 놔두고 떠날 수 없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자발적으로 나오미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니고서는 텅 빈 나오미의 인생을 채워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강요된 압력이나 체면 유지의 차원이 아니라 순전히 인애의 마음으로 곤궁에 빠진 나오미에게 끝까지 충성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것을 ‘헤세드’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하나님의 언약’이란 개념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신실하게 보호하시며 돌보시는 까닭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면 하나님은 자발적인 의무, 즉 구원을 베푸십니다. 룻기에서는 헤세드를 ‘선대, 은혜, 인애’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무엇인가를 베풀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비이기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 그리고 축복의 놀라운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백성으로 언약을 맺음으로 그에 따르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집의 남종과 여종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여행객이나 이방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공동체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세드’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약한 자가 곤궁에 처했을 때 강한 자가 자발적으로 보여주는 충성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룻기서에는 ‘헤세드’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룻은 홀로 남은 나오미에게 헷세드를 베풀고, 보아스는 이방인 룻에게 헤세드를 베풉니다. 이들은 꼭 그렇게 해야할 의무가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닙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상실하고 쓸쓸이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습니다. 룻이 이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자원한 것입니다. 룻의 인애와 충성심은 이미 발길을 돌려 떠난 오르바에 의해서 더욱 대조적으로 빛이 발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르바를 비난할 수 없어요. 오히려 정상적인 여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에요. 그러기에 룻의 선택은 더욱 빛나보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깨달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헤세드의 사람은 신앙의 비밀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 여기서 나옵니다. 우리가 룻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2. 룻의 충성

오르바가 떠난 다음 나오미는 룻에게 (룻 1:15)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에 대해 롯이 무엇이라고 답변합니까? (룻 1:16)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여기서 룻의 결심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룻은 자신의 민족과 자신의 신을 바꿀 정도로 나오미에게 충성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결심을 확고하게 보여주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합니다. 놀랍게도 자신의 민족과 신까지도 포기하는 충성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까지 이르는 충성입니다.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죽어서까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룻의 말을 단지 수사학적인 표현이나 과장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고대 근동 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이 죽음에 의해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보통 식구들의 무덤이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안에 살이 썩는 기간 동안 눕혀 놓는 장소가 있습니다. 여기에 오래 놓아 두어 뼈만 남게 되면 그것을 모아서 무덤 안의 가족 공동 뼈 보관소에 거두어 보관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경우 실제로 식구들의 뼈와 뼈가 만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룻의 말은 죽은 후에 다시 하늘에서 만나는 재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룻은 죽음과 무덤에 까지 이르는 충성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이런 룻의 충성과 인애로 말미암아 텅 비었던 나오미의 삶은 은혜로 풍성히 채워지게 됩니다.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도 자발적으로 어머니를 섬기려는 결정은 그녀의 고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에 베들레헴 여인들은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4:15)라고 룻을 칭찬합니다. 아들을 선호하는 그 당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칭찬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생애를 내어 던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헌신은 모험입니다. 위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우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단호합니다. 룻의 헌신은 바로 그런 헌신이었습니다.

(룻 1: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아무런 힘이 되어 줄 수 없는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생애를 내어 던졌던 룻이 오히려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 것도 거둘 것이 없는 텅 빈 인생이 어떻게 충만하게 채워진 인생으로 변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룻이 나오미가 믿었던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룻은 고백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시어머니 나오미가 알고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오미는 룻기 1장 20절과 21절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의 인생이 쓰디쓴 인생이었지만 신앙고백만은 확실히 했습니다. 하나님은 “엘 샤다이”전능자이시라는 것입니다.

룻 또한 전능자이신 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헌신했습니다. 그 당시 모압 사람들이 섬기던 신은 그모스라는 우상이었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할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무능한 신입니다. 룻은 그 신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이방여인이었지만 보아스를 만나 안식을 찾았습니다. 아들을 낳아 시어머니 나오미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자손 가운데 다윗이 탄생했고, 그 후손 중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축복의 통로 역할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결론:
우리 주님은 ‘헤세드’마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가 ‘헤세드’를 베푸셨습니다. (마 9:35-36)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주님의 이런 사역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온전히 고치시며 회복시키시는 ‘헤세드’의 목회였습니다.

‘헤세드’의 주님이 죄로 인해 비틀려서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세상을 새롭하십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합되고 통일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새롭게 되어 세상에 대한 안목 또한 새로워집니다(고후 5:17). 이전에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곤경에 빠져 울부짖는 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한숨 쉬며 시름이 깊어지는 분들이 눈에 보입니다. 중한 병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로 심적 압박감으로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려운 분들도 보입니다. 죄의 독침에 쐬여 눈물로 처절히 반성하는 분들도 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이 빠지라고 자녀들의 소식을 기다리는 부모님의 외로움이 마음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분들이 우리의 위로와 섬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베푸는 ‘헤세드’로 인해 그들은 소망을 갖게 될 것이고, 고통 속에서 위로 받게 될 것이고, 삶의 중압감에서 해방을 될 것입니다.

우리는 ‘헤세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이것을 어리석고 미련하게 볼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런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헤세드’로 우리가 더 이상 영적 흑암에서 살지 아니하고 밝은 빛가운데 나왔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진리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저주의 삶이 아닌 축복의 삶입니다. 절망과 낙심이 아니라 소망과 평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헤세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길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을 의뢰하고 헌신하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믿으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도 룻처럼 복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삶을 내어 던지는 사람은 결코 부끄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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