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 경배할 것인가 (10.11.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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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5회 작성일 Oct 12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0월 11일
본문: 요한계시록 13:1–18
제목: 누구에게 경배할 것인가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뉴스에는 전쟁과 경제적 갈등이 이어지고, 지도자들은 평화를 말하면서도 군비를 늘립니다. 멀리서 벌어지는 일 같지만 그 영향은 우리 생활에도 미칩니다. 식료품 가격과 병원비, 보험료가 부담스럽고, 주식시장이 흔들리면 은퇴 자금이 걱정됩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보며 자녀와 손주들의 앞날도 염려합니다.
특히 낯선 땅에서 평생 일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미래의 불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묻습니다. 건강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은퇴 자금은 충분할까? 자녀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날은 새벽에 잠이 깹니다. 다시 잠들려고 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그럴 때 누군가 앞날을 미리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닥칠지 알면 준비할 수 있고,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짐승은 누구인가? 적그리스도는 언제 나타나는가? 666과 짐승의 표는 무엇인가? 동영상에는 새로운 기술이나 특정 정치 지도자를 그 답으로 지목하는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까? 아니면 마음속 불안만 더 커집니까?
물론 이런 궁금증과 질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안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13장은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짐승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더 가까운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에게 경배하고 있는가?”
계시록 말씀은 미래의 짐승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며,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충성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일곱 머리와 열 뿔, 마흔두 달, 짐승의 표와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 상징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본문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공격과 경배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숫자와 상징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만 매달리면 정작 말씀의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전 12장에서 용, 곧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사탄은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13장에서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하나는 힘으로 굴복시키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을 경배하도록 속입니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빼앗는 것입니다.
1. 짐승은 우리의 두려움을 붙잡습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뿔은 열이고 머리는 일곱이며, 표범과 곰과 사자의 모습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모습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강대한 제국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제국들은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지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까지 박해했습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세부적인 의미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짐승이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 이 말씀을 읽었던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로마 제국이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명령은 세상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고, 황제를 신처럼 높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이익과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모습은 로마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든 국가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명령을 앞세우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면, 거기에서 짐승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짐승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된 것처럼 상했다가 회복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짐승의 상처와 회복은 마치 그 어린양을 흉내 내어 사람들의 경탄을 빼앗으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외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본래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경탄을 짐승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두려움은 경배로 바뀝니다.
그러나 본문은 짐승의 힘에 한계를 그어 놓습니다.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마흔두 달은 삼 년 반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고난의 기간과 연결됩니다. 이를 장차 있을 실제 기간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고, 제한된 박해의 때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해석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짐승의 권세는 스스로 가진 영원한 권세가 아닙니다. 허락된 범위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짐승은 강하지만 무한하지 않습니다. 무섭지만 역사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아닌 것을 그렇게 두려워할까요? 직장을 잃으면 생활비가 막막해지고, 사업이 어려워지면 가족의 앞날까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강한 권력 앞에서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민 와서 가게를 시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가 서툴러 관공서의 편지 한 통도 걱정스러웠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렌트비와 직원들 월급, 아이들 학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매출이 떨어지면 가게를 닫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잡아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모양만 바뀝니다. 걱정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중요한 것은 걱정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묻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묻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직장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도 있는가? 사업을 지키기 위해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할 수도 있는가?”
여기서 두려움이 경배와 충성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직장을 지키려고 거짓말하고, 사업을 지키려고 부정직한 일을 정당화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장의 안전을 앞세우는 것이 됩니다. 돈과 건강, 자녀의 앞날은 소중하지만, 그것들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중하다고 해서 하나님 자리에 놓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려운 상황에서도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을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과 대조합니다. 그들이 남보다 강해서입니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죽임당하신 어린양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인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는 끝까지 잘 버텨서 어린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했기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려워하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감정처럼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손해가 없으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양께 충성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성도는 짐승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손해를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힘으로 위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복종하게 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을 좋은 것으로 믿고 스스로 따르게 만듭니다.
2. 더 무서운 것은 짐승이 어린양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겉모습은 어린양을 닮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입니다. 보기에는 선하고 믿음직스럽지만,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쓰입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적 권세와 폭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권세를 사람들 앞에서 정당화합니다. 큰 표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짐승의 우상을 만들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가 아니라, 그 능력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입니다. 그 끝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짐승을 향한 경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과 행동이 결국 사람들을 누구에게로 이끄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의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곧바로 둘째 짐승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신앙적인 말처럼 들리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매이게 하는 속임수는 경계해야 합니다. 가령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만 좋으면 사업이 반드시 잘됩니다.” “하나님께 잘하면 자녀들이 모두 성공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만큼 물질로 갚아 주십니다.”
이런 말에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구절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인지, 돈과 성공과 어려움 없는 생활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사업과 자녀의 앞길을 열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공이 믿음의 증거는 아니며, 어려움이 하나님의 버림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삶을 보장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많거나 목회자가 유명하다고 그 가르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직접 살피지 말고 지도자의 말만 믿으라고 하거나,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요구한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사람들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이 위험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교묘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손해를 피하고,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 약속된 것은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실제로 손해를 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3. 손해가 걸렸을 때 누구에게 속했는지가 드러납니다
본문에는 짐승의 표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표가 어떤 물건인지, 어떤 기술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를 함께 읽으면 먼저 중요한 대조가 보입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인침을 받고, 14장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선 사람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3장에서는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가 주어집니다. 표와 인의 대조가 묻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하고,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짐승의 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이마와 오른손이라는 표현도 생각과 행동, 공개적인 충성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읽히곤 합니다. 다만 본문이 명백하게 연결하는 것은 짐승의 표와 짐승에 대한 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술이나 물건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본문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드릴 경배를 빼앗는 권세를 분별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구에게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17절에 이르면 저들의 압박은 생계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팔지 못한다면 가족을 어떻게 부양하겠습니까? 신앙 때문에 생계가 막히고 가족까지 고통받는 상황인 셈입니다.
처음 이 말씀을 들었던 성도들이 살던 로마 세계에서는 종교와 상업, 사회적 관계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모든 상거래가 동일한 방식으로 금지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보여 주는 장면은 더욱 극단적입니다. 먹고사는 길을 틀어쥐고 경배를 강요하는 권세입니다. 오늘의 상황이 그 장면과 똑같지는 않지만, 믿음과 생계가 충돌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게 문을 닫고 그날 매출을 정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카드와 현금 매출을 장부에 적는데 누군가 말합니다. “현금으로 받은 것까지 다 기록할 필요가 있어? 다들 그렇게 하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만 눈감으라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인데 그렇게까지 정직할 필요가 있나?”
그 순간 펜 끝이 잠깐 멈춥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일부를 빼놓아도 당장은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두 생각이 부딪힙니다.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요즘 장사도 어려운데.”
물론 장부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이 곧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훨씬 더 조직적이고 강압적인 경배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러나 작은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접는 데 익숙해진다면, 큰 손해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누구의 말씀을 따르는지는 바로 그런 일상의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경배는 입술의 고백으로 시작되지만, 충성은 삶의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경배의 문제가 예배당 밖으로 나와 계산대 위에 놓이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거짓된 내용을 보고서에 적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르면 자리는 안전하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야말로 어린양께 대한 충성과 성도의 인내가 시험받는 현장입니다.
이처럼 짐승의 권세가 사람의 삶을 깊이 지배하는 장면 끝에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의 글자에 숫자 값을 부여하는 방식이 있었고, 이를 통해 네로 황제의 이름과 연결하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 숫자를,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만 끝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인간 권세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읽기도 합니다. 어느 하나의 해석을 확정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지혜와 분별을 요구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그리고 이 숫자를 “사람의 수”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사람들은 짐승을 보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라고 외쳤습니다. 군대를 움직이고 사람을 처벌하며 매매까지 통제하니 아무도 맞설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권세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린양을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린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은 사람을 두렵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충성해야 할 분은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제가 어떻게 변하고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보여 줍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짐승이 아니라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나는 끝까지 어린양을 따를 수 있을까?” 자신을 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흔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님께로 돌립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어린양을 붙드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먼저 나를 붙드셨느냐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산에 어린양이 서 계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아니라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13장의 위협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양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고난이 전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때에도 주님께 나아가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회개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자신이 없을 때에도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붙드신 주님을 의지합니다. 성도는 끝까지 잘 버텨서 어린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 견디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어려움은 찾아올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가진 것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까지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 있습니다.
짐승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666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마지막 날까지 우리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어린양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임당하신 어린양께만 경배하며, 어떤 형편에서도 그분께 충성하겠습니다.” 아멘.
날짜: 2026년 10월 11일
본문: 요한계시록 13:1–18
제목: 누구에게 경배할 것인가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다. 뉴스에는 전쟁과 경제적 갈등이 이어지고, 지도자들은 평화를 말하면서도 군비를 늘립니다. 멀리서 벌어지는 일 같지만 그 영향은 우리 생활에도 미칩니다. 식료품 가격과 병원비, 보험료가 부담스럽고, 주식시장이 흔들리면 은퇴 자금이 걱정됩니다.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보며 자녀와 손주들의 앞날도 염려합니다.
특히 낯선 땅에서 평생 일하며 살아온 우리에게 미래의 불안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었을 때는 열심히 일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묻습니다. 건강은 언제까지 유지될까? 은퇴 자금은 충분할까? 자녀들은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날은 새벽에 잠이 깹니다. 다시 잠들려고 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머릿속을 맴돕니다. 그럴 때 누군가 앞날을 미리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닥칠지 알면 준비할 수 있고,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짐승은 누구인가? 적그리스도는 언제 나타나는가? 666과 짐승의 표는 무엇인가? 동영상에는 새로운 기술이나 특정 정치 지도자를 그 답으로 지목하는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까? 아니면 마음속 불안만 더 커집니까?
물론 이런 궁금증과 질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두 안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13장은 우리의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짐승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지만, 말씀은 우리에게 더 가까운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에게 경배하고 있는가?”
계시록 말씀은 미래의 짐승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며,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는 것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충성할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일곱 머리와 열 뿔, 마흔두 달, 짐승의 표와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 상징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본문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공격과 경배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숫자와 상징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만 매달리면 정작 말씀의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전 12장에서 용, 곧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사탄은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13장에서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권세를 주고,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하나는 힘으로 굴복시키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을 경배하도록 속입니다. 서로 다른 방법이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빼앗는 것입니다.
1. 짐승은 우리의 두려움을 붙잡습니다
요한은 바다에서 한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봅니다. 뿔은 열이고 머리는 일곱이며, 표범과 곰과 사자의 모습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 모습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강대한 제국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제국들은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사람들을 지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까지 박해했습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의 세부적인 의미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짐승이 사람들을 압도할 만큼 큰 권세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 이 말씀을 읽었던 성도들에게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로마 제국이었을 것입니다. 황제의 명령은 세상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고, 황제를 신처럼 높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이익과 박해가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모습은 로마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든 국가나 지도자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명령을 앞세우며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한다면, 거기에서 짐승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짐승의 머리 하나가 죽게 된 것처럼 상했다가 회복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을 보여 주었습니다. 짐승의 상처와 회복은 마치 그 어린양을 흉내 내어 사람들의 경탄을 빼앗으려는 모습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외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본래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경탄을 짐승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두려움은 경배로 바뀝니다.
그러나 본문은 짐승의 힘에 한계를 그어 놓습니다. 짐승은 마흔두 달 동안 활동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마흔두 달은 삼 년 반으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고난의 기간과 연결됩니다. 이를 장차 있을 실제 기간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고, 제한된 박해의 때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해석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짐승의 권세는 스스로 가진 영원한 권세가 아닙니다. 허락된 범위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짐승은 강하지만 무한하지 않습니다. 무섭지만 역사의 주인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아닌 것을 그렇게 두려워할까요? 직장을 잃으면 생활비가 막막해지고, 사업이 어려워지면 가족의 앞날까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강한 권력 앞에서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처음 이민 와서 가게를 시작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가 서툴러 관공서의 편지 한 통도 걱정스러웠습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해도 렌트비와 직원들 월급, 아이들 학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매출이 떨어지면 가게를 닫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잡아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고 모양만 바뀝니다. 걱정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을 돌보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중요한 것은 걱정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묻습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묻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직장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도 있는가? 사업을 지키기 위해 정직하지 못한 일을 할 수도 있는가?”
여기서 두려움이 경배와 충성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직장을 지키려고 거짓말하고, 사업을 지키려고 부정직한 일을 정당화한다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장의 안전을 앞세우는 것이 됩니다. 돈과 건강, 자녀의 앞날은 소중하지만, 그것들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소중하다고 해서 하나님 자리에 놓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두려운 상황에서도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본문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을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과 대조합니다. 그들이 남보다 강해서입니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죽임당하신 어린양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인내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의 믿음이 있습니다.
성도는 끝까지 잘 버텨서 어린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했기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도 두려워하고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감정처럼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손해가 없으리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어린양께 충성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성도는 짐승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손해를 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힘으로 위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복종하게 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것을 좋은 것으로 믿고 스스로 따르게 만듭니다.
2. 더 무서운 것은 짐승이 어린양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짐승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겉모습은 어린양을 닮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용의 말입니다. 보기에는 선하고 믿음직스럽지만,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쓰입니다.
첫째 짐승이 정치적 권세와 폭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면,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의 권세를 사람들 앞에서 정당화합니다. 큰 표적을 행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며, 짐승의 우상을 만들도록 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가가 아니라, 그 능력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입니다. 그 끝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짐승을 향한 경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과 행동이 결국 사람들을 누구에게로 이끄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의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을 곧바로 둘째 짐승과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신앙적인 말처럼 들리면서 실제로는 사람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매이게 하는 속임수는 경계해야 합니다. 가령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만 좋으면 사업이 반드시 잘됩니다.” “하나님께 잘하면 자녀들이 모두 성공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그만큼 물질로 갚아 주십니다.”
이런 말에 예수님의 이름과 성경 구절이 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인지, 돈과 성공과 어려움 없는 생활인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사업과 자녀의 앞길을 열어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성공이 믿음의 증거는 아니며, 어려움이 하나님의 버림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편안한 삶을 보장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이 많거나 목회자가 유명하다고 그 가르침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직접 살피지 말고 지도자의 말만 믿으라고 하거나, 하나님보다 자신에게 순종하도록 요구한다면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사람들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이 위험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교묘해서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그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손해를 피하고, 형편이 나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 약속된 것은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실제로 손해를 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3. 손해가 걸렸을 때 누구에게 속했는지가 드러납니다
본문에는 짐승의 표가 등장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표가 어떤 물건인지, 어떤 기술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전체를 함께 읽으면 먼저 중요한 대조가 보입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의 종들이 인침을 받고, 14장에서는 어린양과 함께 선 사람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 13장에서는 짐승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짐승의 표가 주어집니다. 표와 인의 대조가 묻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속하고, 누구에게 충성하는가?
짐승의 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에는 여러 해석이 있습니다. 이마와 오른손이라는 표현도 생각과 행동, 공개적인 충성의 표시라는 측면에서 읽히곤 합니다. 다만 본문이 명백하게 연결하는 것은 짐승의 표와 짐승에 대한 경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기술이나 물건을 사용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배반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본문의 경고를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고 하나님께 드릴 경배를 빼앗는 권세를 분별해야 합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누구에게 충성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17절에 이르면 저들의 압박은 생계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건을 사고팔지 못한다면 가족을 어떻게 부양하겠습니까? 신앙 때문에 생계가 막히고 가족까지 고통받는 상황인 셈입니다.
처음 이 말씀을 들었던 성도들이 살던 로마 세계에서는 종교와 상업, 사회적 관계가 서로 얽혀 있었습니다. 황제 숭배와 우상 숭배를 거부하면 불이익을 겪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 모든 상거래가 동일한 방식으로 금지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보여 주는 장면은 더욱 극단적입니다. 먹고사는 길을 틀어쥐고 경배를 강요하는 권세입니다. 오늘의 상황이 그 장면과 똑같지는 않지만, 믿음과 생계가 충돌할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가게 문을 닫고 그날 매출을 정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카드와 현금 매출을 장부에 적는데 누군가 말합니다. “현금으로 받은 것까지 다 기록할 필요가 있어? 다들 그렇게 하는데.”
아무도 예수님을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금만 눈감으라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인데 그렇게까지 정직할 필요가 있나?”
그 순간 펜 끝이 잠깐 멈춥니다.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일부를 빼놓아도 당장은 모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두 생각이 부딪힙니다. “정직하게 기록해야 한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요즘 장사도 어려운데.”
물론 장부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일이 곧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은 훨씬 더 조직적이고 강압적인 경배의 요구를 말합니다. 그러나 작은 이익을 위해 양심을 접는 데 익숙해진다면, 큰 손해 앞에서 믿음을 지키기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누구의 말씀을 따르는지는 바로 그런 일상의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경배는 입술의 고백으로 시작되지만, 충성은 삶의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경배의 문제가 예배당 밖으로 나와 계산대 위에 놓이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상사가 거짓된 내용을 보고서에 적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르면 자리는 안전하겠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야말로 어린양께 대한 충성과 성도의 인내가 시험받는 현장입니다.
이처럼 짐승의 권세가 사람의 삶을 깊이 지배하는 장면 끝에 666이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고대에는 이름의 글자에 숫자 값을 부여하는 방식이 있었고, 이를 통해 네로 황제의 이름과 연결하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 숫자를, 하나님처럼 행세하지만 끝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인간 권세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읽기도 합니다. 어느 하나의 해석을 확정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지혜와 분별을 요구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그리고 이 숫자를 “사람의 수”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사람들은 짐승을 보며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라고 외쳤습니다. 군대를 움직이고 사람을 처벌하며 매매까지 통제하니 아무도 맞설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권세도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어린양을 흉내 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어린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짐승은 사람을 두렵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충성해야 할 분은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죽임당하신 어린양이십니다.
맺는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제가 어떻게 변하고 가정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보여 줍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짐승이 아니라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그렇다면 묻게 됩니다. “나는 끝까지 어린양을 따를 수 있을까?” 자신을 보면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흔들립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신 예수님께로 돌립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강하게 어린양을 붙드느냐가 아닙니다. 누가 먼저 나를 붙드셨느냐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산에 어린양이 서 계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아니라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13장의 위협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고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양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한 사람으로서 그분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고난이 전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죄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울 때에도 주님께 나아가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회개하고 돌아갈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버틸 자신이 없을 때에도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붙드신 주님을 의지합니다. 성도는 끝까지 잘 버텨서 어린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 속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 견디며 충성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어려움은 찾아올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는 우리에게 손해를 입히고 가진 것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까지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소망은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 있습니다.
짐승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666이 마지막이 아닙니다. 죽임당하셨으나 살아 계신 어린양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내일도, 마지막 날까지 우리의 고백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먼저 우리를 구원하신 어린양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임당하신 어린양께만 경배하며, 어떤 형편에서도 그분께 충성하겠습니다.” 아멘.
관련링크
- https://youtu.be/zRtx3qoKax8 20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