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이기지 못하더라 (10.04.2026)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91회 작성일 Oct 05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0월 4일
본문: 요한계시록 12:1–17
제목: 용이 이기지 못하더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때로 그 일 자체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내리는 결론이 우리를 더 깊이 흔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늦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썼는데 오히려 일이 더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오래 기도한 자녀의 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하셨던 것인가?”
과거를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이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이들에게 조금 더 잘해 줄 것을.” 그러다 보면 한두 번의 실패와 후회가 어느새 내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로 바뀝니다.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나는 결국 제대로 살지 못한 것 아닌가?”
바로 여기에 위험이 있습니다. 인생의 한 장면을 보고 인생 전체를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결론은 같지 않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뱀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의심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고 속삭입니다. 실패하면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또 그랬잖아. 그런 네가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냐?”고 몰아붙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겪는 현실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단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만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교회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12장에는 여자와 붉은 용, 별과 여러 숫자가 나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싸움을 보여 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오늘은 한 가지 큰 흐름만 따라가면 됩니다.
용이 하나님의 구원을 막으려고 계속 싸우지만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11장에서 두 증인은 짐승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장면만 보면 짐승이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을 다시 일으키셨고, 마침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라는 선언이 울려 퍼졌습니다. 눈앞의 현실과 하나님의 최종 결론은 달랐습니다.
1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공격받고 성도들은 고난을 당합니다. 사탄은 참소하고 용은 크게 분노합니다. 눈앞의 장면만 보면 용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장면 뒤의 진실을 보여 주시고, 싸움의 결과를 짧은 한마디로 기록합니다.
“이기지 못하여.”
이것이 오늘 말씀을 읽는 열쇠입니다. 용은 싸웁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탄은 그렇게 강하게 싸우는데도 결국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1. 용은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먼저 한 여인과 아이를 보여 줍니다. 해를 입고 달을 발 아래 둔 여인은 메시아를 기다려 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보여 주며, 뒤이어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5절은 아이를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합니다. 시편 2편에 약속된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큰 붉은 용이 아이가 태어나면 삼키려고 기다립니다. 9절은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밝힙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싸움입니다. 용은 그리스도를 없애 하나님의 구원을 막으려 합니다.
그날 갈보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고,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십니다. 그날 “누가 이겼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사람들은 “예수는 끝났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의 마음도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정말 구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죽으셨습니다.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결론은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5절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합니다. 탄생에서 보좌까지 단숨에 보여 줍니다. 용이 삼키려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의 값을 담당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용이 가장 크게 이긴 것 같았던 바로 그 십자가가 용의 결정적인 패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보이는 형편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를 구원하고 계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넘어집니다. 화를 내고, 용서하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의 후회에 붙잡힙니다. 그러면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또 그랬잖아. 몇 년을 믿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떻게 이런 나의 소망이 됩니까?
2. 용은 어린양의 피로 산 성도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7절에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웁니다. 그러나 본문의 관심은 미가엘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싸움의 결과에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여”
용은 하늘에서 내쫓깁니다. 이어 10절은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승리의 열쇠는 천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10절은 용을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부릅니다. 참소가 무서운 것은 실제로 지은 죄를 붙잡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한 일을 생각해 봐. 또 똑같은 죄를 지었잖아. 그러고도 하나님의 백성이냐?” 우리에게는 변명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책망과 사탄의 참소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네가 잘못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참소자는 “네가 잘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끝났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오게 하시지만, 참소자는 죄에 절망의 결론을 붙여 그리스도에게서 도망가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대답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먼저 나오는 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평생의 봉사도, 직분도, 오래 교회를 다닌 경력도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에게 정죄가 마지막 판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양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그래서 나는 도망가지 않고 다시 어린양께 나아간다.”
사탄은 말합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끝났다.”
복음은 말합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린양이 필요하다.”
성도 여러분, 혹시 오래전의 실패 하나 때문에 자신에게 계속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하고, 바로잡을 일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간 사람에게 “너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사탄은 죄를 들춰낼 수 있지만 마지막 판결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깁니다.
11절은 또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겼다고 합니다. 참소자는 “네 죄를 보아라. 너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를 붙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참소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 복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승리의 근거이고, 복음이 그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교회가 용보다 강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이미 이기셨고, 교회는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그러면 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어린양께서 이미 이기셨다면 왜 교회는 여전히 고난을 받고, 용은 아직도 그렇게 날뛰고 있습니까?
3. 용은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12절이 대답합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용은 이길 것을 알아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그 분노를 보고 악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용의 분노를 그의 힘의 증거로 보지만, 본문은 그의 때가 제한되어 있다는 증거로 보여 줍니다.
사탄은 패배했지만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지만, 사탄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모든 고난을 끝내실 날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싸움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계속된다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광야에 있습니다. 그런데 6절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며, 여인을 “양육하기 위하여” 마련된 곳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도 여인은 광야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업어 인도하신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광야에서 빨리 꺼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왜 아직도 이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까?” 생활이 빠듯하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오래 기도한 일이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꺼내시는 대신 그 광야에서 먹이십니다.
광야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곳은 아닙니다.
6절의 1,260일과 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같은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날짜를 계산하기보다 광야의 시간이 하나님께 정해져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알고 다스리십니다.
사탄은 활동하지만 그 기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분노하지만 주권자는 아닙니다. 싸우지만 마지막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15절에서는 용이 여인을 쓸어 버리려고 강물 같은 물을 토하지만 땅이 그 물을 삼킵니다. 공격은 거세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17절에서 용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러 갑니다. 그리스도를 삼키지 못한 용이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싸움은 어린양이 졌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양께 속했기에 용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패배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용은 우리를 흔들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도 어린양을 증언하며 살아갑니다. 형편이 좋을 때만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교회의 승리는 고난이 없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이기신 어린양께 속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그분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승리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 내 인생을 해석하게 하고 있습니까?
실패한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한 것도 사실이고, 기도의 응답이 아직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는 결론을 누가 붙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판결이 아닙니다.
참소자에게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말을 맡기지 마십시오.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복음으로 대답하십시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어린양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그리고 다시 어린양께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확신은 오늘 내가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루신 일에 있습니다.
현실의 한 장면만 보고 여러분 인생에 마지막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광야는 버림받은 곳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지금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용이 이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용은 지금도 싸웁니다. 참소하고 크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싸움의 결과를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지 못하여”
용은 싸웁니다. 그러나 용이 이기지 못하더라.
날짜: 2026년 10월 4일
본문: 요한계시록 12:1–17
제목: 용이 이기지 못하더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때로 그 일 자체만이 아닙니다. 그 일을 겪으면서 마음속에 내리는 결론이 우리를 더 깊이 흔들 때가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늦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애썼는데 오히려 일이 더 어려워질 때도 있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오래 기도한 자녀의 문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하나님께서 정말 나와 함께하셨던 것인가?”
과거를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온 세월이 길어질수록 잘한 일보다 잘못한 일이 더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이들에게 조금 더 잘해 줄 것을.” 그러다 보면 한두 번의 실패와 후회가 어느새 내 인생 전체에 대한 평가로 바뀝니다. “내 믿음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나는 결국 제대로 살지 못한 것 아닌가?”
바로 여기에 위험이 있습니다. 인생의 한 장면을 보고 인생 전체를 결론 내리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내 인생은 실패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결론은 같지 않습니다.
사탄은 바로 이 틈을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뱀은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의심하게 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고 속삭입니다. 실패하면 “이제 끝났다”고 말합니다. 죄를 지으면 “또 그랬잖아. 그런 네가 무슨 하나님의 사람이냐?”고 몰아붙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겪는 현실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단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만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교회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12장에는 여자와 붉은 용, 별과 여러 숫자가 나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 그리고 그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싸움을 보여 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오늘은 한 가지 큰 흐름만 따라가면 됩니다.
용이 하나님의 구원을 막으려고 계속 싸우지만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11장에서 두 증인은 짐승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장면만 보면 짐승이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증인을 다시 일으키셨고, 마침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라는 선언이 울려 퍼졌습니다. 눈앞의 현실과 하나님의 최종 결론은 달랐습니다.
1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공격받고 성도들은 고난을 당합니다. 사탄은 참소하고 용은 크게 분노합니다. 눈앞의 장면만 보면 용이 이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장면 뒤의 진실을 보여 주시고, 싸움의 결과를 짧은 한마디로 기록합니다.
“이기지 못하여.”
이것이 오늘 말씀을 읽는 열쇠입니다. 용은 싸웁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사탄은 그렇게 강하게 싸우는데도 결국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1. 용은 그리스도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본문은 먼저 한 여인과 아이를 보여 줍니다. 해를 입고 달을 발 아래 둔 여인은 메시아를 기다려 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보여 주며, 뒤이어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5절은 아이를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합니다. 시편 2편에 약속된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큰 붉은 용이 아이가 태어나면 삼키려고 기다립니다. 9절은 이 용을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밝힙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이어져 온 싸움입니다. 용은 그리스도를 없애 하나님의 구원을 막으려 합니다.
그날 갈보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혔습니다. 제자들은 도망갔고,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십니다. 그날 “누가 이겼습니까?”라고 물었다면 사람들은 “예수는 끝났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의 마음도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정말 구원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죽으셨습니다. 이제 끝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린 결론은 틀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5절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합니다. 탄생에서 보좌까지 단숨에 보여 줍니다. 용이 삼키려던 그리스도는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 죄의 값을 담당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용이 가장 크게 이긴 것 같았던 바로 그 십자가가 용의 결정적인 패배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보이는 형편만 가지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결론 내리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를 구원하고 계셨습니다.
보이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넘어집니다. 화를 내고, 용서하지 못하고, 지나온 세월의 후회에 붙잡힙니다. 그러면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또 그랬잖아. 몇 년을 믿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냐?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떻게 이런 나의 소망이 됩니까?
2. 용은 어린양의 피로 산 성도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7절에서는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웁니다. 그러나 본문의 관심은 미가엘이 얼마나 강한가보다 싸움의 결과에 있습니다.
“이기지 못하여”
용은 하늘에서 내쫓깁니다. 이어 10절은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라고 선포합니다. 이 승리의 열쇠는 천사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입니다.
10절은 용을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부릅니다. 참소가 무서운 것은 실제로 지은 죄를 붙잡고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한 일을 생각해 봐. 또 똑같은 죄를 지었잖아. 그러고도 하나님의 백성이냐?” 우리에게는 변명할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성령의 책망과 사탄의 참소를 구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네가 잘못했다.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참소자는 “네가 잘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끝났다”고 합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오게 하시지만, 참소자는 죄에 절망의 결론을 붙여 그리스도에게서 도망가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대답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먼저 나오는 것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평생의 봉사도, 직분도, 오래 교회를 다닌 경력도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의 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에게 정죄가 마지막 판결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변명할 수 없다. 그러나 어린양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그래서 나는 도망가지 않고 다시 어린양께 나아간다.”
사탄은 말합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끝났다.”
복음은 말합니다. “너는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린양이 필요하다.”
성도 여러분, 혹시 오래전의 실패 하나 때문에 자신에게 계속 유죄 판결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하고, 바로잡을 일이 있으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그리스도께 나아간 사람에게 “너는 돌아갈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사탄은 죄를 들춰낼 수 있지만 마지막 판결을 내릴 권한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의롭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없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피 때문에 이깁니다.
11절은 또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이겼다고 합니다. 참소자는 “네 죄를 보아라. 너는 끝났다”고 말하지만, 성도들은 어린양의 피를 붙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참소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 복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승리의 근거이고, 복음이 그들의 증언이었습니다.
교회가 용보다 강해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이미 이기셨고, 교회는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그러면 왜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어린양께서 이미 이기셨다면 왜 교회는 여전히 고난을 받고, 용은 아직도 그렇게 날뛰고 있습니까?
3. 용은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12절이 대답합니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용은 이길 것을 알아서 분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에게 남은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그 분노를 보고 악이 이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는 용의 분노를 그의 힘의 증거로 보지만, 본문은 그의 때가 제한되어 있다는 증거로 보여 줍니다.
사탄은 패배했지만 아직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지만, 사탄을 완전히 심판하시고 모든 고난을 끝내실 날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싸움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계속된다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취소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광야에 있습니다. 그런데 6절은 그곳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며, 여인을 “양육하기 위하여” 마련된 곳이라고 합니다. 14절에서도 여인은 광야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큰 독수리의 두 날개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업어 인도하신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면 광야에서 빨리 꺼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왜 아직도 이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까?” 생활이 빠듯하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오래 기도한 일이 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로 자기 백성을 광야에서 꺼내시는 대신 그 광야에서 먹이십니다.
광야는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곳은 아닙니다.
6절의 1,260일과 14절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같은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날짜를 계산하기보다 광야의 시간이 하나님께 정해져 있다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어려움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 시간을 알고 다스리십니다.
사탄은 활동하지만 그 기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분노하지만 주권자는 아닙니다. 싸우지만 마지막 결과를 바꿀 수 없습니다.
15절에서는 용이 여인을 쓸어 버리려고 강물 같은 물을 토하지만 땅이 그 물을 삼킵니다. 공격은 거세지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자 17절에서 용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러 갑니다. 그리스도를 삼키지 못한 용이 이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이 싸움은 어린양이 졌기 때문에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양께 속했기에 용이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패배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용은 우리를 흔들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승리를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에서도 어린양을 증언하며 살아갑니다. 형편이 좋을 때만 주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교회의 승리는 고난이 없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미 이기신 어린양께 속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그분을 증언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승리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 내 인생을 해석하게 하고 있습니까?
실패한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약한 것도 사실이고, 기도의 응답이 아직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를 버리셨다”는 결론을 누가 붙였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판결이 아닙니다.
참소자에게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말을 맡기지 마십시오.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하면 복음으로 대답하십시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그러나 어린양께서 나를 위하여 피 흘리셨다.”
그리고 다시 어린양께 나아가십시오. 우리의 확신은 오늘 내가 얼마나 강한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이루신 일에 있습니다.
현실의 한 장면만 보고 여러분 인생에 마지막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광야는 버림받은 곳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거기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지금도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용이 이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용은 지금도 싸웁니다. 참소하고 크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싸움의 결과를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기지 못하여”
용은 싸웁니다. 그러나 용이 이기지 못하더라.
관련링크
- https://youtu.be/PyAtWvCIBgQ 22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