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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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37회 작성일 Oct 19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10월 18일
본문: 요한계시록 14:1–20
제목: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설교자: 이강웅 목사
들어가는 말: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과 인생과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요한계시록은 고난 중에 있던 성도들에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천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안목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고, 용기 있게 현실을 대처하게 하거나 잘 견딜 힘을 얻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두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을 압도하는 권세를 행사했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짐승의 표가 없으면 사고파는 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을 지키느냐 타협하느냐는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였고, 가족의 안전과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온 세상이 짐승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연 누가 이런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생계가 위협받고, 마침내 죽음까지 맞이해야 한다면 누가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당시 성도들이 겪었던 박해와 다릅니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이 충돌할 때 우리 마음에도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면 흔들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기도하면서도 내 계획이 무너지면 불안해집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다가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어떤 때는 현실이 너무 무겁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혹시 병석에 오래 눕게 되면, 치매가 오면 어떻게 하나 미리 염려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눈앞의 현실은 너무 크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내가 과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요한계시록 14장이 시작됩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1절)
13장에서는 짐승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 요한은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달리,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이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그 두려운 현실 너머에 누가 서 계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짐승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으며,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끝까지 그들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1. 어린양이 서 계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1–5절)
1절은 어린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으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두 번 거듭 사용되고, 천이 결합된 이 숫자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숫자가 아니라 이마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13장에서 짐승의 표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다면,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때 흔히 가진 것과 이루어 놓은 것으로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정받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거나 건강이 약해지고, 더 이상 예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 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손 놓아야 하고, 이제는 몸이 불편해서 가족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마음 한편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여전히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는 그들이 이룬 업적이 아니라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도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어린양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4절은 그들을 “사람 가운데에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 값을 보았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려진 첫 열매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피로 그들을 사신 어린양께 속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충성은 어린양의 구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끝까지 어린양을 따라갔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그들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하여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어린양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건강과 재산, 사람들의 인정은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자기 피로 사신 어린양의 은혜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는 새 노래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들을 구속하신 어린양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린양께 속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뜻이 아니라 그분의 길을 따라갑니다 (4–5절)
4절은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카톨릭 신부처럼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사람만 거룩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영적인 음행에 비유합니다. 특히 바로 앞 장에서 세상이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어린양께 충성을 지킨 백성의 신실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말씀은 짐승의 거짓에 동조하지 않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린양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거짓에 동조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넘어질 때에는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들의 거룩함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신 어린양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길을 정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고, 자녀가 내 기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 어디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다만 제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고 말씀합니다.
어린양께서 가신 길은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의 길과 언제나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셨고,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셨으며,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을 따른다는 것은 때로 손해를 감수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으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고, 자녀의 앞날이 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면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정말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어린양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교회의 감독 폴리갑에게도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로마제국 관원들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폴리갑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목숨을 구하기보다,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우리도 폴리갑처럼 용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돈과 사람들의 인정, 내 계획을 더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짐승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경배를 요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잃을 것이 두려워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붙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어린양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린양께서 내 뜻과 계획을 따라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보다 더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면서도 내 손으로 붙들고 있어야 안심합니다.
그렇다면 더 강한 결심만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죄와 싸우고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심만으로 마음이 바뀐다면 왜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반복해서 넘어집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강한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분을 보는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손해를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버림받기를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짐승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경배를 요구하지만, 어린양께서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짐승은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붙들지만, 어린양께서는 사랑과 은혜로 자기 백성을 붙드십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어린양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께서 승리하셨는데도 왜 성도들은 여전히 고난을 당합니까? 세상은 여전히 강하고, 악한 사람들은 번성하며,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죽음까지 맞이합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언제, 어떻게 드러납니까?
3. 어린양이 서 계시기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인내합니다 (6–20절)
6절부터 세 천사가 등장합니다.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절)
13장에서 짐승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 첫째 천사는 온 세상을 향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두 길이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두려움 때문에 짐승에게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구속하신 어린양께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인가? 이것이 성도들이 직면한 영적 싸움입니다.
세상이 짐승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경배받으실 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서 마침내 악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의로운 통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소식이지만, 악한 권세 아래 고난받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세우신다는 소식입니다.
이어서 둘째 천사가 외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8절)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세상의 권세와 화려함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그 부와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미 “무너졌도다”라고 선언합니다. 바벨론이 아직 강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끝을 이미 정하셨습니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어느 길이 편안한가가 아닙니다. 지금은 편안해 보이는 길이 마지막에는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지금은 고난스러워 보이는 길이 마지막에는 생명과 안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이 더 쉬운가가 아니라, 어느 길이 어린양께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장 10절에서도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3장에서는 짐승의 박해를 보여 주신 뒤 성도의 인내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4장에서는 짐승과 바벨론의 마지막을 보여 주시며 다시 성도의 인내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고난이 없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수 있고, 하나님께 충성했는데도 고난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내는 막연히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마지막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짐승의 권세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요한은 하늘로부터 놀라운 음성을 듣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절)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충성하면 죽음을 피하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복이 있습니까? 평생 믿음을 지켰는데 마지막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복된 삶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주 안에서”입니다.
죽음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은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인 패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의 삶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성도의 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장 큰 소망은 단지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복은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보다 그분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인생의 긴 세월을 지나오신 분들에게 특별히 큰 위로가 됩니다. 평생 자녀를 위해 기도했지만 그 열매를 다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지만 자신의 수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 약해지고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내가 살아온 날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그들의 행한 일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서 행한 성도의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시고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오랜 기도와 섬김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결과를 살아 있는 동안 보지 못할 수 있지만, 어린양께서는 자기 백성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괴롭히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악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수고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마지막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14장 마지막의 추수 환상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추수의 환상을 봅니다. 흰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아 계시고,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습니다. 곡식이 거두어지고, 이어 포도송이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특히 포도 추수는 하나님께서 악을 끝내시고 심판하실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은 짐승과 바벨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은 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이 고난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진실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구에게 경배하고 누구를 따라가는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어린양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와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합니다.
맺는말
이제 처음 요한이 보았던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은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자로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혼자 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 피로 사신 백성이 그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린다고 어린양까지 흔들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흔들릴 때에도,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에도, 마침내 죽음 앞에 서는 날에도 이 광경을 기억하십시오.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분과 함께 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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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두려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상을 압도하는 권세를 행사했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짐승의 표가 없으면 사고파는 일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을 지키느냐 타협하느냐는 단순한 종교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였고, 가족의 안전과 생존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온 세상이 짐승을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연 누가 이런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믿음 때문에 생계가 위협받고, 마침내 죽음까지 맞이해야 한다면 누가 그 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당시 성도들이 겪었던 박해와 다릅니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이 충돌할 때 우리 마음에도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면 흔들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고 기도하면서도 내 계획이 무너지면 불안해집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다가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것을 잃을까 봐 두렵습니다.
어떤 때는 현실이 너무 무겁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혹시 병석에 오래 눕게 되면, 치매가 오면 어떻게 하나 미리 염려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눈앞의 현실은 너무 크게 다가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내가 과연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요한계시록 14장이 시작됩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1절)
13장에서는 짐승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 요한은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봅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달리,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겪는 고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이 두렵지 않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대신 그 두려운 현실 너머에 누가 서 계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짐승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때,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서 계십니다.
그분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으며, 우리처럼 연약한 사람들은 어떻게 끝까지 그들처럼 믿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1. 어린양이 서 계시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1–5절)
1절은 어린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으며,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두 번 거듭 사용되고, 천이 결합된 이 숫자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숫자가 아니라 이마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13장에서 짐승의 표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나타냈다면,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할 때 흔히 가진 것과 이루어 놓은 것으로 말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인정받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거나 건강이 약해지고, 더 이상 예전처럼 일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처럼 느낍니다. 평생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느 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손 놓아야 하고, 이제는 몸이 불편해서 가족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 마음 한편에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여전히 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오늘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기준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이마에는 그들이 이룬 업적이 아니라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도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어린양께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4절은 그들을 “사람 가운데에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은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우리는 이미 그 값을 보았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사람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양께 드려진 첫 열매입니다. 이제 그들의 삶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피로 그들을 사신 어린양께 속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먼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충성은 어린양의 구속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이 끝까지 어린양을 따라갔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께서 자기 피로 그들을 사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하여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어린양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위해 자기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건강과 재산, 사람들의 인정은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자기 피로 사신 어린양의 은혜가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우는 새 노래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들을 구속하신 어린양의 은혜를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어린양께 속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뜻이 아니라 그분의 길을 따라갑니다 (4–5절)
4절은 어린양께 속한 사람들을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카톨릭 신부처럼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사람만 거룩하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영적인 음행에 비유합니다. 특히 바로 앞 장에서 세상이 짐승에게 경배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말씀은 우상숭배에 굴복하지 않고 어린양께 충성을 지킨 백성의 신실함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말씀은 짐승의 거짓에 동조하지 않고,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한 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린양께 속한 사람은 세상의 거짓에 동조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살아갑니다. 넘어질 때에는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옵니다. 그들의 거룩함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신 어린양께 속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데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길을 정해 놓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고, 자녀가 내 기대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 어디든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다만 제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조건을 붙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간다고 말씀합니다.
어린양께서 가신 길은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의 길과 언제나 같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낮추셨고,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셨으며,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을 따른다는 것은 때로 손해를 감수하고, 자기 뜻을 내려놓으며,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정직하게 행동하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면 자존심이 상할 것 같고, 자녀의 앞날이 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면 하나님께 맡기기보다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어집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정말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어린양을 따른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다 알지 못해도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을 생각해 보십시오. 서머나 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주님께서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입니다.
세월이 흘러 그 교회의 감독 폴리갑에게도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로마제국 관원들은 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해지는 순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86년 동안 나는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폴리갑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목숨을 구하기보다,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지 우리도 폴리갑처럼 용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도 그런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돈과 사람들의 인정, 내 계획을 더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짐승이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경배를 요구했던 것처럼, 우리도 잃을 것이 두려워 주님보다 다른 것을 더 붙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어린양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린양께서 내 뜻과 계획을 따라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주님보다 더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하면서도 내 손으로 붙들고 있어야 안심합니다.
그렇다면 더 강한 결심만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는 죄와 싸우고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결심만으로 마음이 바뀐다면 왜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반복해서 넘어집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더 강한 의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보다 더 귀한 분을 보는 것입니다.
어린양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손해를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버림받기를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분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패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로 죄인을 구원하시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짐승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며 경배를 요구하지만, 어린양께서는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짐승은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붙들지만, 어린양께서는 사랑과 은혜로 자기 백성을 붙드십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이 마지막은 아닙니다. 우리가 따라가는 어린양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양께서 승리하셨는데도 왜 성도들은 여전히 고난을 당합니까? 세상은 여전히 강하고, 악한 사람들은 번성하며, 믿음을 지킨 성도들은 죽음까지 맞이합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언제, 어떻게 드러납니까?
3. 어린양이 서 계시기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인내합니다 (6–20절)
6절부터 세 천사가 등장합니다. 첫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절)
13장에서 짐승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14장에서 첫째 천사는 온 세상을 향해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두 길이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두려움 때문에 짐승에게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구속하신 어린양께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경배할 것인가? 이것이 성도들이 직면한 영적 싸움입니다.
세상이 짐승의 권세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경배받으실 분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 그 하나님께서 마침내 악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의로운 통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 심판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소식이지만, 악한 권세 아래 고난받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공의를 세우신다는 소식입니다.
이어서 둘째 천사가 외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8절)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세상의 권세와 화려함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그 부와 권력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미 “무너졌도다”라고 선언합니다. 바벨론이 아직 강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끝을 이미 정하셨습니다.
셋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영원히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어느 길이 편안한가가 아닙니다. 지금은 편안해 보이는 길이 마지막에는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고, 지금은 고난스러워 보이는 길이 마지막에는 생명과 안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길이 더 쉬운가가 아니라, 어느 길이 어린양께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장 10절에서도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13장에서는 짐승의 박해를 보여 주신 뒤 성도의 인내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14장에서는 짐승과 바벨론의 마지막을 보여 주시며 다시 성도의 인내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고난이 없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모든 문제가 즉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수 있고, 하나님께 충성했는데도 고난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인내는 막연히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실 마지막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짐승의 권세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이미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요한은 하늘로부터 놀라운 음성을 듣습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절)
하나님께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세상에서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충성하면 죽음을 피하게 될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복이 있습니까? 평생 믿음을 지켰는데 마지막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삶이 어떻게 복된 삶입니까?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주 안에서”입니다.
죽음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은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죽음은 더 이상 최종적인 패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의 삶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가 수고를 그치고 쉰다고 말씀하십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성도의 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께서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장 큰 소망은 단지 고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속하신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복은 그분이 주시는 어떤 것보다 그분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은 인생의 긴 세월을 지나오신 분들에게 특별히 큰 위로가 됩니다. 평생 자녀를 위해 기도했지만 그 열매를 다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겼지만 자신의 수고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이 약해지고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내가 살아온 날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며, 그들의 행한 일이 따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안에서 행한 성도의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시고 인정하십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오랜 기도와 섬김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결과를 살아 있는 동안 보지 못할 수 있지만, 어린양께서는 자기 백성을 마지막까지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를 괴롭히고 하나님을 대적했던 악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수고를 기억하실 뿐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마지막 판결을 내리십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14장 마지막의 추수 환상입니다.
요한은 마지막 추수의 환상을 봅니다. 흰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아 계시고,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습니다. 곡식이 거두어지고, 이어 포도송이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집니다. 특히 포도 추수는 하나님께서 악을 끝내시고 심판하실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은 짐승과 바벨론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마지막을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은 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믿음을 지킨 사람이 고난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진실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누구에게 경배하고 누구를 따라가는가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도는 오늘의 현실이 아니라, 어린양께서 이미 이루신 승리와 장차 완성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끝까지 인내합니다.
맺는말
이제 처음 요한이 보았던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시온 산에 서 계신 어린양은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죽임당하신 어린양이 승리자로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혼자 서 계시지 않습니다. 자기 피로 사신 백성이 그분과 함께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때로 흔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들린다고 어린양까지 흔들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흔들릴 때에도, 우리의 삶이 흔들릴 때에도, 마침내 죽음 앞에 서는 날에도 이 광경을 기억하십시오.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 속한 사람들은 마침내 그분과 함께 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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