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굳게 서라 (08.16.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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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굳게 서라 (08.16.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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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66회 작성일 Aug 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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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8월 16일
본문: 에베소서 6:16-17
제목: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로 굳게 서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어려서부터 정답을 찾는 법을 배우며 살아왔습니다. 학교에서는 정답을 맞히는 사람이 좋은 성적을 받고, 직장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는 사람이 인정받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해결책을 찾고, 길을 잃으면 방향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생도 정답만 찾으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막상 살아 보니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던가요? 우리의 인생에는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고,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도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 순간dp 우리 마음속에 질문이 찾아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신가?”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가?”그리고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는가?”

여러분,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질문이 영적 전쟁의 한가운데서 우리에게 던져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마지막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악의 권세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패배한 원수의 저항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에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승패를 알 수 없는 전쟁을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왕의 승리 안에 굳게 서도록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패배한 원수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합니까? 그리고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6-17)

오늘 우리는 이 말씀 가운데 특별히 두 가지를 보려고 합니다.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입니다.

1. 불화살 —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는가?”

바울은 영적 전쟁을 설명하면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

고대 전쟁에서 불화살은 단순히 사람 한 명을 다치게 하는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불붙은 화살 하나가 진영에 떨어지면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불길이 번져 결국 진영 전체를 태워 버립니다.

사탄의 공격도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언제나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를 떨어뜨립니다. 그 불씨 가운데 하나가 의심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은 하와에게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려는 순수한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모든 것을 풍성하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풍성함은 감추고, 금하신 단 한 가지에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불씨를 심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 분인가?”

여기에서 영적 전쟁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되고, 말씀을 의심하면 순종이 흔들립니다. 그리고 순종이 무너지면 결국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우리의 환경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왕과 백성 사이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시고 굶주리셨을 때 사탄은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겉으로는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는 이런 유혹이 숨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라면 왜 너를 굶주리게 하시는가? 왜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는가? 네 힘으로 해결하면 되지 않는가?”

에덴에서는 풍성함 가운데 하나님을 의심하게 했고, 광야에서는 결핍 가운데 아버지를 의심하게 했습니다. 욥에게서는 모든 것을 잃게 함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고 했습니다. 상황은 달라도 질문은 같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는가?”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이 흔들리고, 자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직장과 사업이 어려워지고, 오랫동안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불화살이 날아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를 사랑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왜 네 기도에 응답하지 않느냐?”
“이제 하나님만 기다리지 말고 네 방식대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탄의 불화살은 ‘이것은 사탄의 생각이다’라는 표시를 달고 날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생각처럼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시는 것 같아.”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 같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해야겠어.”

바로 이것이 영적 전쟁에서 위험한 지점입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생각이 진리는 아닙니다. 물론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사탄이 직접 넣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상처와 죄된 욕망에서도 잘못된 생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생각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생각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게 하는가, 의심하게 하는가?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다리지 말고 네 방식대로 하라”고 부추기는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게 하는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가?

불화살을 불화살로 알아보지 못하면 방패를 들지 않습니다. 싸워야 할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됩니다. 작은 의심의 불씨가 불신으로 번지고, 불신이 불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 어떤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을 때 곧바로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워 보십시오.
“이 생각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참된가?”

그리고 악한 자의 불화살임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마음에 꽂히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바울은 말합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2. 믿음의 방패 — 불화살이 날아올 때 십자가를 들어라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엡 6:16)

고대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방패 가운데에는 전투의 최전선에서 군인의 온몸을 완벽하게 가리는 대형 방패인 ‘스쿠툼(Scutum)’이 있었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라고 할 때 사용한 단어가 바로 이 ‘스쿠툼’입니다. 적이 쏘는 화살과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중요한 방어 무기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방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불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방패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방패를 가지고 있어도 옆에 내려놓고 있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불화살을 쏩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를 사랑한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바로 그 순간 믿음의 방패를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이미 확증되었다.”

사탄이 다시 쏩니다. “하나님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냐?” 그때 방패를 듭니다. “아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실 수 없다.”

또 다른 불화살이 날아옵니다. “네 처지를 보라. 그래도 하나님이 선하다고 믿겠느냐?” 그때 다시 방패를 듭니다. “내 형편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한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믿음의 방패는 단순히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반복하는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사탄의 거짓말 앞에 하나님의 진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의 논리 앞에 십자가의 논리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황을 근거로 하나님을 판단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십자가를 근거로 우리의 상황을 해석합니다. 고난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면 우리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다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어도 한 가지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가 아직 응답되지 않았는지 몰라도 한 가지는 압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는 불화살이 날아오지 않게 하는 무기가 아닙니다. 불화살이 내 마음속에 박혀 불길로 번져 가지 못하게 하는 무기입니다. 의심의 불씨가 불신으로 번지지 못하게 합니다. 불신이 불순종으로 번지지 못하게 합니다. 불순종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역으로 번지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무엇을 붙듭니까? 십자가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선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에서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내 믿음의 대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 자기 믿음만 바라보지 마십시오.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한가?” “왜 나는 이렇게 자주 흔들리는가?”그것만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자기 자신에게 갇히게 됩니다. 믿음의 방패를 든다는 것은 내 믿음의 크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패는 전쟁이 시작된 뒤에야 준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쌓아 두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깊이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하나님의 진리가 즉시 우리의 방패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붙드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만 보여 준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영적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사건입니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5)

십자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탄이 승리한 날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로 선언합니다. 그날 사탄이 패배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 왕 노릇하던 권세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탄이 쏘는 불화살은 이미 패배한 원수가 마지막으로 쏘는 화살입니다. 불화살이 날아오거든 즉시 방패를 드십시오. 십자가를 앞에 세우십시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전쟁은 이미 결정되었다.”

이것이 믿음의 방패입니다.

3. 구원의 투구 — 참소가 생각을 공격할 때 복음으로 머리를 지켜라

그런데 사탄의 공격은 의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의심은 유혹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기다리지 말고 네 방식대로 해결하라.” 이 유혹은 죄로 이어집니다.

사탄의 전략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죄짓게 한 뒤, 이제 그 죄를 가지고 다시 우리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참소의 불화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탄을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라고 부릅니다(계 12:10). 사탄은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속삭입니다. “또 실패했구나.” “네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느냐?”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너 같은 사람을 다시 받아 주시겠느냐?”

이어서 사탄은 우리의 시선을 우리 자신에게 돌립니다. 여기에서 공격받는 중요한 자리가 바로 생각입니다. 사탄의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되기 시작합니다. “나는 안 될 거야.” “하나님도 나를 포기하셨을 거야.” “나는 너무 많이 실패했어.”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도 없어.”

참소가 생각 속에 깊이 들어오면 죄책감은 절망으로 변합니다. 실패가 자기 정체성이 되어 버립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다”에서 멈추지 않고, “나는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이 노리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생각을 점령하여 복음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가 우리 자신을 정의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왜 하필 투구입니까? 투구는 머리를 보호합니다. 전쟁터에서 머리에 치명적인 공격을 받으면 군인은 더 이상 제대로 싸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에서도 생각과 확신이 무너지면 성도는 쉽게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확신을 보호하도록 구원의 투구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투구를 쓴다는 것은 사탄이 던지는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말합니다. “너는 버림받았다.” 구원의 투구는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다.”
사탄이 말합니다. “네가 또 실패했으니 하나님도 너를 포기하셨다.” 구원의 투구는 대답합니다. “내 구원은 나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 위에 서 있다.”
사탄이 말합니다. “네 죄를 보라.” 구원의 투구는 대답합니다. “나는 내 죄를 숨기지 않고 회개한다. 그러나 내 죄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다.”
이것이 구원의 투구가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방식입니다. 사탄의 거짓말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복음의 진리가 우리의 생각을 둘러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는 단순히 “나는 구원받았다”고 자기 자신에게 반복하는 심리적 확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루신 구원을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 위에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완전한 순종에 달려 있다면 사탄의 참소는 언제나 옳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내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성도는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죄를 숨기지도 않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우리의 회개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죄인이 복음의 은혜를 의지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곧바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우리 구원의 근거는 우리의 눈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심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도 아닙니다. 우리 구원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완전한 구속과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시는 중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란 내가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를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머리에 쓰는 것입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너 자신을 보라.”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라.”
사탄은 말합니다. “네가 또 실패하지 않았느냐?” 복음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보라.”
사탄은 말합니다.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구원은 네가 얼마나 잘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내 아들이 무엇을 이루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구원의 투구가 보호하는 것은 오늘의 구원 확신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말합니다(살전 5:8)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사탄은 우리의 과거 실패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 빼앗으려 합니다. “너는 계속 실패할 것이다.” “결국 너는 넘어질 것이다.” “네가 끝까지 갈 수 있겠느냐?”

그때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그리고 복음으로 대답하십시오. “나의 구원은 내가 나를 끝까지 붙드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끝까지 붙드신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그 구원의 은혜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구원은 영광 가운데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소의 말이 머리에 들어올 때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복음으로 생각을 지키십시오.
내 실패가 나를 정의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구원이 나를 정의하게 하십시오.
내 감정이 나의 구원을 판결하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이 판결하게 하십시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는 감정 위에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행위 위에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믿고 있는가 위에도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반복하여 명령합니다. 13절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절 “그런즉 서서…”

왜 끝까지 서라고 합니까? 이미 왕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싸우는 군사가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왕의 승리 안에 끝까지 서는 군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 싸우도록 부름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내 믿음이 흔들릴 때 교회가 내 곁에서 다시 복음을 말해 줍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형제와 자매가 왕 되신 그리스도 안에 서도록 붙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홀로 버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교회와 함께 왕 되신 그리스도 안에 끝까지 서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은 오늘도 불화살을 쏩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겠는가?”

그때 믿음의 방패를 드십시오. 사탄의 거짓말 앞에 십자가를 세우십시오. “나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그리고 사탄이 여러분의 실패와 죄를 가지고 머리를 공격할 때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나의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 위에 서 있다.”
사탄은 말합니다. “너 자신을 보라.”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보라.”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를 드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쓰십시오. 그리고 왕 되신 그리스도 안에 굳게 서십시오.

사탄의 불화살보다 십자가가 더 강합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큽니다. 우리의 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더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서십시오. 왕께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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