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의 복음 위에 굳게 서라 (08.09.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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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99회 작성일 Aug 10 2026본문
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8월 9일
본문: 에베소서 6:13-15
제목: 평안의 복음 위에 굳게 서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은 그칠 줄 모르고, 국제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안은 깊어지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며, 예상하지 못한 재난과 질병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합니다. 과학과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현실을 조금도 이상한 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 24:6)
왜 세상이 그럴까요?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결코 참된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세상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고, 탐욕이 있으며, 분열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이 흔들리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의 통치 아래, 누구의 다스림 아래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 6장이 보여 주는 영적 전쟁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평탄한 산책길이 아닙니다. 날마다 선택과 유혹이 있고, 고난과 두려움이 있으며,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영적 공격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 전쟁은 승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전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전쟁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 안에서 끝까지 굳게 서는 싸움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에베소서 6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섯 가지 전신갑주를 소개합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있습니다. 의의 흉배가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가 있습니다.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간에 바울의 시선은 갑자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발입니다. 신발입니다.
왜입니까? 군인의 용맹은 칼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끝까지 버티는 힘은 발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을 입고, 최고의 무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발을 헛디디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일차적인 목적은 단번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한 걸음씩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은혜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국 하나님의 통치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굳게 서라!"
1. 참소의 진흙탕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과의 화평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전에서 성도의 영적 전쟁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 안에 굳게 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그 승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바울은 그 답을 골로새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어떤 번역은 ‘무장 해제’라고 표현합니다. 전쟁에서 적장을 사로잡아, 그의 무기를 빼앗고, 모든 사람 앞에 세워 패배를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멈춤) 십자가가 바로 그 장면입니다. 십자가는 그저 우리 죄를 용서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의 무기를 빼앗으신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그 무기를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부러뜨리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자격이 없다'고 손가락질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왕이 아닙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무기—죄와 사망—그 무기는 이미 십자가에서 부러졌습니다. 왕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승리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첫 번째 선물이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더 이상 원수 관계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화평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죄란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왕 되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왕이 되려 한 반역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 대신 마귀의 유혹을 좇아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떠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고, 사탄은 그 틈을 이용하여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다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복음은 단순히 우리 마음에 위안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복음입니다.
이에 대해 사탄의 전략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를 미끄러뜨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은혜를 의심하게 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게 합니다.
- "정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느냐?"
- "그렇게 실패하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 "너 같은 사람이 무슨 믿음이 있다고 그러느냐?"
이것이 사탄의 오래된 전략입니다. 창세기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 고난이 찾아오면 그는 속삭입니다. "보라.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
- 병이 찾아오면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냐?"
-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또 속삭입니다. "네 기도는 하나님이 아예 듣지 않으신다."
이처럼 사탄은 환경을 이용하여 우리를 복음에서 미끄러지게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입니다. 사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살짝 우리 마음속에 의심을 심습니다. 죄책감을 키웁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신의 실패를 더 크게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평안의 복음 위에 선 성도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자신의 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듭니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실패했다." 성도는 대답합니다. "그렇다.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성도는 대답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정죄받아야 한다." 성도는 로마서 8장의 말씀으로 응답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이것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평안은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이미 나를 의롭다 선언하셨기 때문에 누리는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안은 내 감정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십자가의 완전함이 우리의 평안의 근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와 우리 자신의 자격을 가지고 논쟁하게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가리키십시오. 우리의 평안은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왕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2. 성도 간의 담을 허무는 십자가의 사랑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물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짧은 멈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여기서 평안을 다 찾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회복되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짧은 멈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그림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가 허문 담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여러분 사이의 담도 함께 허물어졌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함께 볼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화평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설명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 16)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만 허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허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종교적•문화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부정하게 여겨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그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한 사건인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왕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 된 백성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죄는 언제나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며, 민족과 민족을 적대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곳에는 화평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평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왕의 통치가 회복된 열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전쟁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이라고 하면 사탄이 우리를 큰 죄에 빠뜨리거나 특별한 시험을 가져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훨씬 교묘합니다. 교회를 밖으로 부터 무너뜨리지 못하면, 반드시 안에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핍박으로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분열로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단 교리로 흔들리지 않는 공동체를 자존심 싸움으로 흔들려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적과 싸우기 전에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이미 패배한 군대입니다. 군인들이 서로를 의심합니다. 서로를 비난합니다. 서로의 발을 걸어 넘어뜨립니다. 그 군대는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집니다. 영적 전쟁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교회는 교리가 무너진 교회보다,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화평은 단순한 좋은 성품이나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화평은 영적 전쟁에서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화평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기려 하기보다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상처를 키우기보다 치유하려 합니다. 오해를 확대하기보다 이해하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끝까지 목을 쥐고 흔들 수 없듯이, 하나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이끄십니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용서하셨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사랑하셨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품으셨다."
이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혹시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작은 씨앗 하나를 아직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까?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는다는 것은 단지 넘어지지 않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이미 이루신 화평을 공동체 가운데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용서가 시작됩니다. 화해가 일어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마귀의 전략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납니다.
3. 절벽 위에서도 굳게 서게 하시는 평안의 복음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하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예비’라는 말은 그냥 ‘준비물을 챙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두 가지 그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반입니다. 둘째는 언제든지 왕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군인이 전투화를 신고 끈을 단단히 묶었다는 것은 싸움을 회피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어떤 전장으로 들어가도 굳게 설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위에 서 있지 않는 사람은 결국 환경 위에 서게 됩니다. 형편이 좋으면 기뻐합니다. 형편이 나빠지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면 평안합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평안의 복음을 신은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환경 위에 서지 않습니다. 왕의 약속 위에 섭니다.
사도 바울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하신 신’이라는 말씀을 기록할 때 그의 마음에는 분명 이사야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먼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왕께서 통치하신다." 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왕의 통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의 반대말은 고난이 아닙니다. 평안의 반대말은 왕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왕이 승리하셨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우리는 이 말씀을 자주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성공과 형통의 약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말하는 높은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 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절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절벽을 없애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발을 사슴과 같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 사슴입니까? 사람은 절벽을 보면 멈춥니다. 두려워합니다.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사슴은 절벽을 만나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벽이 낮아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위는 그대로 있습니다. 낭떠러지도 그대로 있습니다. 험한 산길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슴은 그 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닙니다. 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슴에게 주신 발은 거친 바위와 가파른 절벽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사슴에게는 가장 안전한 길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신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절벽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난도, 질병도, 눈물도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이 달라졌습니다. 왕께서 붙드시는 발입니다.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 그리고 40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사탄은 여전히 참소합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심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미끄러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장해제된 적군은 전쟁의 결과를 바꾸지 못합니다. 왕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결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절벽 앞에 서 계십니까? 건강의 절벽입니까? 가정의 절벽입니까? 사업의 절벽입니까? 외로움의 절벽입니까? 아니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벽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절벽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가 네 발을 사슴과 같게 하겠다. 내가 너를 붙들겠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왕의 승리에서 흘러나오는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장해제하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우리를 참소할 수는 있어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두렵게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넘어뜨리려 애쓸 수는 있어도, 왕의 손을 놓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왕께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도 평안의 복음의 신을 단단히 신고 굳게 서십시오. 우리가 굳게 서 있기 때문에 왕이 승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굳게 설 수 있습니다.
날짜: 2026년 8월 9일
본문: 에베소서 6:13-15
제목: 평안의 복음 위에 굳게 서라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은 그칠 줄 모르고, 국제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경제적 불안은 깊어지고, 빈부의 격차는 커지며, 예상하지 못한 재난과 질병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합니다. 과학과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불안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현실을 조금도 이상한 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 24:6)
왜 세상이 그럴까요?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결코 참된 평안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세상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고, 탐욕이 있으며, 분열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이 흔들리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내가 누구의 통치 아래, 누구의 다스림 아래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에베소서 6장이 보여 주는 영적 전쟁의 한복판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평탄한 산책길이 아닙니다. 날마다 선택과 유혹이 있고, 고난과 두려움이 있으며, 믿음을 흔드는 수많은 영적 공격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 전쟁은 승패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전쟁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적 전쟁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 안에서 끝까지 굳게 서는 싸움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에베소서 6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여섯 가지 전신갑주를 소개합니다. 진리의 허리띠가 있습니다. 의의 흉배가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가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가 있습니다. 성령의 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간에 바울의 시선은 갑자기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갑니다. 발입니다. 신발입니다.
왜입니까? 군인의 용맹은 칼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끝까지 버티는 힘은 발에서 나옵니다. 아무리 좋은 갑옷을 입고, 최고의 무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발을 헛디디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납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일차적인 목적은 단번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한 걸음씩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에서, 은혜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국 하나님의 통치 밖으로 걸어 나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굳게 서라!"
1. 참소의 진흙탕에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과의 화평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전에서 성도의 영적 전쟁은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 안에 굳게 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그 승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바울은 그 답을 골로새서에서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어떤 번역은 ‘무장 해제’라고 표현합니다. 전쟁에서 적장을 사로잡아, 그의 무기를 빼앗고, 모든 사람 앞에 세워 패배를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멈춤) 십자가가 바로 그 장면입니다. 십자가는 그저 우리 죄를 용서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사탄의 무기를 빼앗으신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이라는 그 무기를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부러뜨리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여전히 우리를 고소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자격이 없다'고 손가락질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왕이 아닙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무기—죄와 사망—그 무기는 이미 십자가에서 부러졌습니다. 왕좌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승리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첫 번째 선물이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여기서 말하는 화평은 단순히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인이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더 이상 원수 관계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화평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죄란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왕 되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왕이 되려 한 반역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 대신 마귀의 유혹을 좇아 스스로 하나님같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를 떠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였고, 사탄은 그 틈을 이용하여 세상의 임금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우리가 심판을 면하게 되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다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복음은 단순히 우리 마음에 위안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시키는 복음입니다.
이에 대해 사탄의 전략도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를 미끄러뜨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은혜를 의심하게 하며, 십자가의 능력을 의심하게 합니다.
- "정말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느냐?"
- "그렇게 실패하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 "너 같은 사람이 무슨 믿음이 있다고 그러느냐?"
이것이 사탄의 오래된 전략입니다. 창세기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 고난이 찾아오면 그는 속삭입니다. "보라.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
- 병이 찾아오면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냐?"
-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또 속삭입니다. "네 기도는 하나님이 아예 듣지 않으신다."
이처럼 사탄은 환경을 이용하여 우리를 복음에서 미끄러지게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입니다. 사탄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우리를 위협하지 않습니다. 살짝 우리 마음속에 의심을 심습니다. 죄책감을 키웁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자신의 실패를 더 크게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평안의 복음 위에 선 성도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자신의 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듭니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실패했다." 성도는 대답합니다. "그렇다.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성도는 대답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 마귀가 말합니다. "너는 정죄받아야 한다." 성도는 로마서 8장의 말씀으로 응답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33-34)
이것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평안은 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이미 나를 의롭다 선언하셨기 때문에 누리는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안은 내 감정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에서 시작됩니다.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십자가의 완전함이 우리의 평안의 근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와 우리 자신의 자격을 가지고 논쟁하게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가리키십시오. 우리의 평안은 내가 얼마나 잘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왕께서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2. 성도 간의 담을 허무는 십자가의 사랑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십자가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을 허물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짧은 멈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여기서 평안을 다 찾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만 회복되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짧은 멈춤) 그러나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그림을 보여 줍니다. 십자가가 허문 담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담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나와 여러분 사이의 담도 함께 허물어졌습니다. 오늘 두 번째로 함께 볼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화평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설명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 16)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만 허무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허무셨습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 뛰어넘기 어려운 종교적•문화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부정하게 여겨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 그 모든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한 사건인 동시에, 하나님 안에서 인간과 인간을 하나 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에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왕 되신 하나님께서 하나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하나 된 백성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죄는 언제나 관계를 깨뜨립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분열시키며, 민족과 민족을 적대하게 만듭니다. 반대로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되는 곳에는 화평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평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왕의 통치가 회복된 열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전쟁의 또 다른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이라고 하면 사탄이 우리를 큰 죄에 빠뜨리거나 특별한 시험을 가져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훨씬 교묘합니다. 교회를 밖으로 부터 무너뜨리지 못하면, 반드시 안에서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핍박으로 무너지지 않는 교회를 분열로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단 교리로 흔들리지 않는 공동체를 자존심 싸움으로 흔들려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적과 싸우기 전에 서로 싸우기 시작하면 이미 패배한 군대입니다. 군인들이 서로를 의심합니다. 서로를 비난합니다. 서로의 발을 걸어 넘어뜨립니다. 그 군대는 적이 공격하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집니다. 영적 전쟁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탄이 가장 기뻐하는 교회는 교리가 무너진 교회보다, 사랑이 식어 버린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무너지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화평은 단순한 좋은 성품이나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화평은 영적 전쟁에서 이미 승리하신 왕의 통치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은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먼저 화평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선택합니다. 이기려 하기보다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상처를 키우기보다 치유하려 합니다. 오해를 확대하기보다 이해하려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자신이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끝까지 목을 쥐고 흔들 수 없듯이, 하나님께 엄청난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이끄십니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용서하셨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사랑하셨다."
- "예수께서 먼저 너를 품으셨다."
이 십자가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혹시 사탄이 우리의 마음속에 심어 놓은 작은 씨앗 하나를 아직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왜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까?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왕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는다는 것은 단지 넘어지지 않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이미 이루신 화평을 공동체 가운데 드러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마다 용서가 시작됩니다. 화해가 일어납니다. 사랑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마귀의 전략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납니다.
3. 절벽 위에서도 굳게 서게 하시는 평안의 복음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바울이 말하는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예비’라는 말은 그냥 ‘준비물을 챙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에는 두 가지 그림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반입니다. 둘째는 언제든지 왕의 명령에 순종할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군인이 전투화를 신고 끈을 단단히 묶었다는 것은 싸움을 회피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어떤 전장으로 들어가도 굳게 설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 위에 서 있지 않는 사람은 결국 환경 위에 서게 됩니다. 형편이 좋으면 기뻐합니다. 형편이 나빠지면 무너집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면 평안합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면 절망합니다. 그러나 평안의 복음을 신은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환경 위에 서지 않습니다. 왕의 약속 위에 섭니다.
사도 바울이 ‘평안의 복음의 예비하신 신’이라는 말씀을 기록할 때 그의 마음에는 분명 이사야의 말씀이 있었을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먼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왕께서 통치하신다." 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왕의 통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평안의 반대말은 고난이 아닙니다. 평안의 반대말은 왕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왕이 승리하셨음을 믿는 사람에게는 평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우리는 이 말씀을 자주 오해합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성공과 형통의 약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이 말하는 높은 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나라가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천 길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절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절벽을 없애 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네 발을 사슴과 같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 사슴입니까? 사람은 절벽을 보면 멈춥니다. 두려워합니다. 뒤로 물러섭니다. 그러나 사슴은 절벽을 만나도 멈추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절벽이 낮아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바위는 그대로 있습니다. 낭떠러지도 그대로 있습니다. 험한 산길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슴은 그 위를 자유롭게 뛰어다닙니다. 발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슴에게 주신 발은 거친 바위와 가파른 절벽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곳이 사슴에게는 가장 안전한 길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신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절벽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고난도, 질병도, 눈물도 그대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발이 달라졌습니다. 왕께서 붙드시는 발입니다.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시편 121편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 그리고 40편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
사탄은 여전히 참소합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심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미끄러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무장해제된 적군은 전쟁의 결과를 바꾸지 못합니다. 왕은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결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떤 절벽 앞에 서 계십니까? 건강의 절벽입니까? 가정의 절벽입니까? 사업의 절벽입니까? 외로움의 절벽입니까? 아니면 미래가 보이지 않는 절벽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절벽을 모두 없애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내가 네 발을 사슴과 같게 하겠다. 내가 너를 붙들겠다. 그러므로 너는 결코 미끄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왕의 승리에서 흘러나오는 평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장해제하셨습니다. 이제 마귀는 우리를 참소할 수는 있어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두렵게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넘어뜨리려 애쓸 수는 있어도, 왕의 손을 놓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왕께서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도 평안의 복음의 신을 단단히 신고 굳게 서십시오. 우리가 굳게 서 있기 때문에 왕이 승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굳게 설 수 있습니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rjMD2NU6C5o 48회 연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