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의 권세 (2) (04.19.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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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 (2) (04.19.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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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14회 작성일 Apr 2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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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4월 19일
본문: 마태복음 9:1-8
제목: 죄 사함의 권세 (2)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러시아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을 파고든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이야기나 사건을 넘어서, 인간의 내면—특히 죄, 고통, 자유, 신앙—에 대한 치열한 탐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의 문학적 주제와 통찰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그는 인간을 선과 악,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라고 봅니다. 단순히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순과 충돌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난폭하고 충동적인 난봉꾼 첫째 아들이 신앙의 열정을 가진 순진하고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 막내 얄료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알겠니 알료샤! 내가 바로 그 벌레란 말이다. 아니 우리 카라마조프 일가는 모두 그런 인간들이지. 그래서 천사 같은 너의 내부에도 그런 벌레가 살고 있어서 네 피 속에 폭풍을 일으키는 거야. 암, 폭풍이고 말고, 정욕은 폭풍이니까. 아니 폭풍보다 더하지. 나는 원래 학식이 없는 놈이지만 여기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어. 정말이지 신비가 너무 많아.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고상한 마음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인간이 마돈나의 이상을 품고 출발했다가 결국 소돔과 같이 끝나고 만다는 사실이야. 너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니? 거기서 악마와 신이 싸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싸움터가 바로 인간의 마음이지. 아무튼 나는 방탕을 사랑했고, 그 방탕의 치욕까지 사랑했어. 잔인한 짓도 좋아하구. 그런데도 내가 벌레가 아닐 수 있겠어? 유해한 벌레가 아닐 수 있겠니? 카라마조프라 어쩔 수 없는 거야!”

이 말을 듣던 알료샤는 얼굴을 붉히면서 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얼굴을 붉힌 것 형님의 이야기 때문도 아니고, 형님의 행실 때문도 아닙니다. 나 자신도 형님과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누구나 똑같은 층계에 서 있는 거예요. 다만 내가 제일 아랫단에 서 있다고 한다면 형님은 좀 더 위 계단에 서 있을 뿐입니다. 결국 똑같은 성질의 것이지요. 맨 아랫단에 발을 디딘 자는 언제가는 반드시 맨 윗단까지 올라가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때로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저 사람 참 못됐다. 저런 죄를 짓고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 누구도 올바른 행실로써 천국에 갈 사람은 없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아무도 없다고 하면 우리의 얄량한 자존심은 분명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다가 아내를 빼앗깁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되풀이 하고, 나중에 아들 이삭도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자 끝까지 참지 못해 애굽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노아는 또 어떻습니까? 당대의 의인이라고 인정 받았지만 홍수가 끝난 후 술에 취하여 자신의 하체를 드러내어 아들 함을 저주하게 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마음에 합했던 다윗은 어떻습니까?  충직한 신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고서, 그의 남편을 죽이도록 교사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고, 오히려 죄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 결론 짓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이 구원 받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왜 구세주가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끝까지 고집하는 얄팍한 자존심입니다.

예전에 중국에서 한 선교사님이 대학생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물으니까 크게 반발하더랍니다. “대학교에 다니는 지성인에게 왜 죄인이라고 하느냐?” 그래서 선교사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지금 당신 마음속이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하더니, ‘지옥 같습니다’고 인정하더랍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찾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먼저 불신앙의 죄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란 지금까지 잘못된 길로 간 것을 인정하고,‘하나님, 잘못했습니다’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의 길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입습니다. 이 놀라운 복이 우리에게도 임한 줄로 믿습니다.

1. 편견과 선입견의 종교인들

그런데 이런 축복에 대해 눈을 감고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사람으로서 감히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세를 함부로 말하다니, 이것은 참람한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참람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독하다’라는 뜻으로 신성 모독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마 9: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저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저들의 논리가 부당한 것일까요? 사실 그들의 신학적 전제에 따르면 그들의 생각은 정당해 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이나 권세를 나도 행사한다고 선언한다면 누구나 다 그 사람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온전한 정신으로 이 말을 한다면 ‘그는 참람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는 이 생각은 지극히 정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의 문제일까요? 왜 그들의 생각을 악하다고 보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려면 복음서 전체 문맥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충돌한 이 무리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자세가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고, 그분의 사역과 능력을 그 말씀에 비추어 추론해 보는 자세가 없었습니다. 대신 유대교의 전통과 사고의 틀에 꽉 잡혀서 자신들의 기준에서만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오로지‘예수님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메시아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메시아라면 하늘에서 온 표징을 우리에게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옛적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한 모세처럼 홍해가 갈라지거나,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는 이적을 보이든지, 아니면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게 한 엘리야처럼 큰 능력으로 자기가 메시아인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유대 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태평성대를 이룩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전통적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쟁론의 귀결점은 ‘메시아냐 아니야’는 것에 있기 때문에 정작 예수님 그분 자체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서기관들의 행태에 비판의 날을 세우지만, 사실 우리 안에도 ‘내가 만든 메시아’의 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내 사업이 잘되게 해주시면 당신을 믿겠습니다. 내 병을 고쳐주시면 당신이 살아계신 줄 알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이 요구했던 ‘표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뒤흔드십니다. “네 사업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나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진짜 문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눈앞의 문제 해결입니까, 아니면 주님과의 관계 회복입니까?

만약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더라면 단죄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저분은 자의적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가?” 구약의 선지자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직접 일인칭으로 말씀하십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선언의 의미를 음미해 보십시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을 하셨다는 것은 셋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미쳤거나, 아니면 거짓말쟁이거나, 아니면 정말 그런 권세를 가졌거나. 예수님이 미쳤거나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한 가지 남은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추론했어야 하는데 그들의 편견과 선입견으로 인해 예수님을  단죄했습니다. 

2. 병 고침 보다 죄 사함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궁금합니다. 왜 예수님은 굳이 갈등을 일으킬 도발적 선언을 하신 것일까요? 그냥 병만을 고쳐 주어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중풍병자의 경우, 병의 뿌리가 죄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병의 고통 보다도 지난날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더 고통스러워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인가”라는 절망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병 고침 받는 것보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너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인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역으로 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마 9: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우리 생각에는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할 것 같습니다. 건강 문제, 돈 문제, 관계 문제, 이런 문제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병 고침 받아도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병이 있든지 없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이것이 최우선 순위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 있는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느냐”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과 그 나라의 경륜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본분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과 하나님 나라의 경륜을 지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죄 사함 받아 그분과 신령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분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들에게 성막과 제사제도를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레위기서를 보십시오. 레위기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죄 있는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느냐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 앞으로 나온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가, 즉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보배로운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온 천하만국에게 복의 통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이자 목적이었고, 이스라엘의 사명이자 존재 의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불치병만 고치셨다면, 사람들은 그저 ‘놀라운 기적이다’라며 쿨하게 그냥 넘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 가장 본질적인 '죄 사함'을 먼저 건드리셨습니다. 설령 병이 낫지 않더라도 그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문제 해결입니까? 아니면 죄 사함입니까?

3. 눈 앞에 증거해 주는 죄 사함의 권세

서기관들이 “참람하다”고 단죄하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을 뻔했느냐? 너희 생각에는 이 사람의 병이나 낫게 했었더라면 좋을 뻔했느냐?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라. 너희 생각에 어느 것이 더 쉬운 말이냐? 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우냐? 아니면 이 사람의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것이 쉬우냐? 어느 것이 쉬우냐?”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쉬울 것 같습니까? ‘죄 사했다’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지 않습니까? 만약 ‘일어나 상을 메고 가라’고 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이 사기꾼, 거짓말쟁이야!’하고 욕할 것입니다. 그런데 ‘네 죄를 사했다’고 한다면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사람들이 쉽사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속일 작정이라면 ‘네 죄 사함 받았다’이렇게 말하는 편이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서기관들이 지적한 것처럼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에 속하는 것인데 감히 누가 그 권세를 주장하는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권세를 선포했다면 그 말이 진실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신성모독 죄를 범한 자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 사함을 선언하신 후 일어나 상을 메고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전신불수 병자가 벌떡 일어나 상을 메고 갔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오랫동안 누워 있던 중풍병자입니다. 그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파리하고 피골이 상접했을 것입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간신히 일어났다고 해도 허약해서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주저앉을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어서 친구들이 침상 채 메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침상을 번쩍 들어 메었습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 갔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단지 병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일순간에 건강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진 이 일을 두고 서기관들이 더 이상 시비를 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런 증거가 없었다면 그들은 “이런 참람한 말이 어디 있느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죄 사함 받았다고 사기 치느냐?”이렇게 헐뜯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이 권세는 단순한 기적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 권세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십자가로부터 나오는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고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 할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시는 분이셨습니다.
이 기적은 단순한 신기함이 아니라, 자격 없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질 십자가의 은혜를 미리 보여주는 거룩한 표적이었습니다.

이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마 9: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서 누구보다도 감격하고 감사하며 기쁨이 넘쳤던 사람은 중풍병자입니다. 이제 건강을 되찾고, 정죄에서 자유를 얻었고, 버림 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아마도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입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그 발걸음은 날아가는 듯 가뿐했을 것입니다.

결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린 노인이 한 크리스천 상담가를 찾아왔습니다. 젊은 시절 사소한 실수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었는데, 그 후로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수십 년간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 채 살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고 손주들의 재롱을 봐도 마음 편히 웃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십자가 앞에서 “다 이루었다”하시는 예수님의 용서를 만난 순간, 그는 통곡하며 말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숨이 쉬어집니다.”

여러분, 죄 사함은 이론이 아닙니다. 숨 막혔던 사람이 처음으로 숨을 쉬며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영국의 어느 정신병원에서 발표한 통계를 따르면 정신질환에 걸린 환자들의 95%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못하고, 자신에게 스스로 형벌을 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마음에 죄책감과 정죄 의식이 있다면 평안이 없습니다.

다윗도 범죄 하였을 때 왕의 자리에 있었으나 내면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러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을 때 비로소 고백했습니다. “복이 있도다 불법이 사함을 받는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죄가 가리어짐을 받은 사람이여” (롬 4:7-8)

여러분, 우리 인생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의 숨구멍'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 사함의 은총입니다. 이 기쁨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빠져나온 기쁨이요, 사형수가 무죄 판결을 받는 기쁨입니다. 사단의 종노릇하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의 지붕을 뚫고서라도 내려와야만 하는 여러분의 아픔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세상은 결코 해줄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은 나의 과거 모든 사슬을 끊어내는 선언입니다. 오늘, 그 침상을 들고 일어나십시오. 정죄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당당한 발걸음을 내디디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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