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의 권세 (1) (04.12.2026) 주일예배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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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죄 사함의 권세 (1) (04.12.20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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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45회 작성일 Apr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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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한인제일장로교회의 주일예배입니다


날짜: 2026년 4월 12일
본문: 마태복음 9:1-8
제목: 죄 사함의 권세 (1)
설교자: 이강웅 목사

서론: 여러분,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내딛던 날을 기억하십니까? 푸른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왔지만, 이민자의 삶은 참 녹록지 않았습니다. 말도 서툴고, 문화도 낯선 땅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생계를 책임지느라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습니다. 늘 부족한 시간 속에서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인생의 황혼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어떤가요? 열심히 달려온 보람 뒤에 왠지 모를 씁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삶의 ‘권태’가 어느덧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무료하기만 합니다.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배우자와의 관계도 어느덧 무덤덤해졌습니다. 시인 도종환은 이런 상태를 두고 이렇게 노래했지요.

“아내와 나는 가구처럼 자기 자리에 놓여 있다. 장롱이 그렇듯이 오래 묵은 습관을 담은 채 각자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 일을 하곤 한다... 본래 가구들끼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낡은 가구처럼 익숙해진 채, 거실의 불이 꺼질 때까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모습—혹시 우리 이민자 집 안에 있는 가구들의 자화상은 아닙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찬송만 불러도 눈물이 났는데, 이제는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심드렁합니다. 성경을 펴도 글자들이 생명력 있게 다가오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책장을 넘길 뿐입니다. 기도는 형식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영혼에도 깊은 권태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권태는 종종 서글픈 ‘적개심’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는데, 정작 그 자녀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나를 그저 ‘나이 든 부모’로만 여기는 것 같을 때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까칠한 말들이 툭툭 튀어 나갑니다. 예전의 그 고왔던 신부, 듬직했던 신랑의 모습은 사라지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 돋친 말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여기서 찾아오는 ‘우울과 외로움’입니다. “이제 와서 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 하나 없어져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겠지”라는 절망적인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미국이라는 드넓은 땅에 살고 있지만, 정작 마음 둘 곳 없이 고립된 느낌,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그 단절감이 우리 시대 어르신들의 가장 큰 질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고, 살맛과 활력을 통째로 앗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끝자락에서 우리를 이토록 허무하게 만드는 이 병의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요?

성경은 이 문제를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원인을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찾아오는 결핍’이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지만 땅에서 뿌리 뽑힌 나무가 이내 잎과 가지가 마르며 죽어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도 결핍된 증세가 나타납니다. 불안, 초조, 두려움, 고통, 저주, 미움, 다툼, 온갖 방탕과 추함, 욕정, 약탈, 증오, 비겁, 고독, 의심, 거짓, 모함, 교만, 자만, 편견, 분노, 흩기는 눈, 냉소, 그리고 결국 늙어가고 병들어 죽습니다. 이 모든 증상은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에서 오는 증세입니다. 성경은 이 상태를 바로 ‘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떠나 단절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이 치명적인 영혼의 질병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다시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인간의 삶에는 전혀 다른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마치 다시 땅에 심겨 생수를 공급받는 나무가 푸른 잎을 내고 열매를 맺듯이, 하나님과 연결된 영혼은 새 생명의 징후를 드러냅니다.

불안 대신 평안이 자리잡고, 초조함 대신 기다릴 줄 아는 인내가 생깁니다. 두려움은 믿음으로 바뀌고,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주의 자리에는 축복이 흐르고, 미움은 사랑으로, 다툼은 화평으로 변화됩니다.

방탕과 추함 대신 거룩함과 절제가 나타나고, 욕정은 순결로, 약탈은 나눔과 섬김으로 바뀝니다. 증오는 용서로 녹아내리고, 비겁함은 담대함으로 변화됩니다. 고독 속에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채워지고, 의심은 확신으로, 거짓은 진실로 바뀝니다.

모함과 교만은 겸손으로 낮아지고, 자만과 편견은 이해와 포용으로 바뀌며, 분노는 온유함으로 다스려집니다. 흩기는 눈은 사랑의 시선으로 바뀌고, 냉소 대신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단순히 늙어가고 병들어 죽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육신은 쇠하여도 영혼은 날마다 새로워지며, 죽음조차 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문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처럼, 자신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영적 마비 상태에 있는 인생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친 이민 생활의 끝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의 권세를 깊이 경험하시기를 소망합니다.

1. 전신불수의 무력상태

오늘 본문에 한 중풍병 든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생입니다. 불치의 병 때문에 그 마음 역시 심히 불행한 상태에 있습니다. 집안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밥도 누가 떠 넣어 주어야 먹습니다. 누구가가 곁에서 늘 병수발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차차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이 중풍병자에게는 아예 그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 중풍병자처럼 육체적으로 전신불수는 아니지만, 영적으로 볼 때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참 많다고 생각합니다.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어 비참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겉모습은 멀쩡한 직장인이거나 사회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내용을 보면 전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뭔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마약이나 도박으로 부터 시작하여, 인터넷게임 중독, 일 중독, 돈 중독, 쇼핑 중독, 그리고 쾌락 중독 등등 입니다.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욕망의 틀에 가두고, 화려한 문명 속에서 영적인 마비 상태를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치유가 필요한 환자가 스스로를 정상이라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사회가 마주하는 가장 깊은 비극일지 모릅니다.

2. 믿음의 시작

그런데 절망적 상태에 있던 중풍병자에게 어떻게 전환점이 찾아옵니까? 그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옴으로 그에게 소망의 빛이 비췄습니다. 아마 친구들에게 예수께 데려 달라고 부탁했거나, 아니면 친구 중에 하나가 먼저 제안을 해서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친구들 또한 거절하지 않고, ‘아, 그분께라면 한 번 가 볼만한 일이다’하고 간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어쩌면 직접 예수님으로 부터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 자이에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나간 것입니다. ‘어디 한 번 가 보자’를 넘어서 ‘예수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감이 그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이 기대감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주님이시라면 하실 수 있다는 기대감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의하면 사람들이 많이 에워싸고 있어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지붕 위로 침상을 메고 올라갔어요. 그 당시 유대인의 집 구조는 지붕이 납작한데 밖에 층계가 있어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 지붕위에서 곡식을 말리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리빙룸 구실도 하고, 여름철에는 천막이나 발을 치고 바닥에 자리를 깔고 쉬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지붕위로 올라간 그들은 지붕을 뜯고 침상 채 달아 내립니다. 예수님께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에 ‘어떻게든지 예수님 앞으로 가보자’한 것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그들의 믿음입니다. 2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아주 다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3. 문제의 근원

우리는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뤄보아, 이 사람의 병은 아마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감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모든 병이 다 그렇다는 것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소경이 된 것은 그 소경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이는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병이나 고난을 섣불리 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경우에는 과거에 지은 어떤 죄와 지금 육체의 불치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을 고치는 것보다 사죄의 은총을 먼저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중한 병이 들고서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 보았을 겁니다. 곰곰이 병의 원인을 생각할수록 자신의 죄를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그리고 뉘우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불치의 병이 들었어요. 병 고침에 대한 희망은 없습니다. 이제 그가 고민하는 것은 이 병의 원인이 되었던 죄의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고민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리를 듣고서 그 분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 그에게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은 바로 이 죄 문제였습니다.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이 그의 고민이었어요.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발병한 것인데, 비록 병이 싹 낫는다고 해도 여전히 죄 문제는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중풍병자의 마음을 짓누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불치의 병보다도, 그것은 이미 단념한 것이고, 이 불치병을 초래한 자신의 죄 문제입니다.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입니다. 이것이 그의 고민이고,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시편 32편은 다윗이 범죄 한 후에 지은 시입니다. 다윗에게는 숨긴 죄가 있었어요. 그 죄로 인해 다윗은 심히 근심하게 됩니다. (시 32:3-4)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숨긴 죄를 고백하지 않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종일토록 신음하였을까요? 신음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뼈가 다 쇠하였다고 말했을까요? 양심가책이 얼마나 심했으면 자기 몸의 진액이 마치 여름에 가물어서 바싹 말라 쩍쩍 갈라진 논밭과 같이 되었다고 표현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은 자동차의 운전석 앞에 있는 계기판과도 같습니다. 만약 자동차의 기계 작동에 문제가 발생하면 계기판에 빨간 경고등이 켜집니다.  경고판에 빨간불이 켜지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양심으로 인해 생기는 죄책감입니다. 지금 뭔가 잘못되었으니 속히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방치해서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이것을 올바르게 선용하면 우리 영적 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죄책감은 우리를 회개와 용서와 구원과 성숙과 행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면에 병든 죄책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정죄의식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죄책감을 근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을 대조하여 말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건강한 죄책감입니다. 세상 근심은 병든 죄책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한 죄책감과 병든 죄책감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4. 죄 사함의 은총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경우 죄와 병과의 관계를 명백히 아시고, 또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을 아시기에 먼저 이렇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얼마나 자애롭고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떨어지는 순간, 병자를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영적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도 들어야 할 음성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음성이 우리 심령에 울려 퍼질 때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지고, 샘솟는 기쁨과 강같이 흐르는 평강이 넘치게 되고, 생명의 활력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 사죄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이를 위해 죄 사함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이 필요합니다. 탕자 아들이 아버지 집에 돌아가 아버지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격과 눈물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죄의 은총이 임하면 우리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깨끗한 희열입니다. 사도행전 3: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 주님 앞에 나아가 내 숨은 죄와 죄책감, 고민과 괴로움, 남모르는 슬픔과 고통을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 사함 받아 우리 영혼이 유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기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왜 하루하루가 지겹고 권태로운 것입니까?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마치 집 안에 가득한 쓰레기를 치우지 않은 것과 같아요. 집 안에 더러운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속에 깨끗함과 기쁨과 평강이 있겠어요? 무엇을 해도 우리 마음이 기쁘지 않고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심으로 우리 죄를 자백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면 우리는 유쾌한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상쾌하게 하루를 출발할 수 있습니다. 통쾌한 하루로 마감할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는 가구로 살지 않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압도적인 사랑이 내 안에 밀려오는데 어떻게 아내를, 남편을 여전히 낡은 가구처럼 대하겠습니까? 용서받은 자의 감격은 가장 먼저 우리 집 거실의 공기를 바꿉니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여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사랑해'라는 생명의 말이 터져 나오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삶에 임하는 사죄의 권세입니다.

결론: 죄 문제는 은닉하거나 회피하고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중풍병자처럼 더 늦기 전에 주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나와서 자복하며 회개함으로써 해결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 사함을 경험한 후 이렇게 교훈합니다. (시 32:8-9)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우리에게 아직 숨기고 있는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책감이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것이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죄를 시인하지도 않고, 마음이 강퍅해 져서 고집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를 거부합니다. 병든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 사함의 은총으로 우리를 정죄의식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이 사죄의 은총을 믿는 자가 복됩니다. (시 32: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이 은총을 입은 다윗은 감격 속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시 32: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병든 죄책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정죄의식에서 자유케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복된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아무게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이 사죄의 은총을 풍성히 누리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는 용서치 못할 죄가 없습니다. 이 십자가 앞에 우리의 모든 죄 짐을 다 내려놓고 겸손히 회개하십시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믿고, 수용하고, 누리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선포하십시다.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다! 나를 의롭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나를 정죄하겠는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누가 나를 끊을 수 있겠는가?” 이 담대한 선포가 또 한 주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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