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04.09.2023) 주일예배 > 주일설교

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



주일예배

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04.09.2023) 주일예배

페이지 정보

조회조회 582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4월 9일
*제목: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본문: 누가복음 24: 13-35
*설교자: 이강웅 목사


본문: 누가복음 24:13-35

서론: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길을 갈 때가 있지만 내리막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힘들고 슬픈 길을 가야할 때가 있는가 하면 기쁘고 즐거운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하고 찬송을 부르면서도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즐겁지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일까, 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과연 내가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인가, 내가 구원 받은 것이 확실한가’하는 의심도 듭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깊어지면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서서히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침체를 한 번쯤 경험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를 어서 속히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거듭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원망에 지친 모세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민 11:15)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엘리야도 북이스라엘 왕비 이세벨이 ‘내일 이맘때에는 네 생명을 취하겠다’는 위협에 도망칩니다. 그리고 지쳐 쓰러져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현재 당면한 문제에 사로잡히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아직 남아있는 세상적인 잔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의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 보시기에 찾아오십니다. 아들이 없다고 낙심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 40년이란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낮아지는 훈련을 하던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갈멜산에서 크게 영적 승리를 거두었으나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영적 침체에 빠져 로뎀 나무 밑에서 죽여 달라던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과거와 현재의 수치를 인하여 사람들의 낯을 피하던 수가 성 여인에게 찾아오신 주님, 그리고 낙심 가운데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1.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오늘 본문은 13절 “그날에”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날이란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 지낸 후 3일째 되는 날 안식일,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그날 오후 두 제자가 엠마오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2제자 사도들이 아니라 더 큰 그룹 제자들 무리에 속한 자들입니다. 18절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Cleopas)라고 밝히고 있고, 다른 제자의 이름은 요한복음 19장 25절에 의하면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이 부부는 주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25리로 약 7 mile(11 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이 부부는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그날 오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에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묻혔던 무덤에 갔다가 두 천사를 만났다는 이야기, 그리고 베드로가 달려가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는데 시신은 없고,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 등등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어안이 벙벙하다는 이야기 등등을 나누던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주님이 부활의 몸으로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6절에서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심지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고 나타났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뭔가 방해하고 붙들어 매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들이 혼동과 의심,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과 낙심 등등 아주 복잡한 마음 상태로 인해서 방해 받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제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던 불신앙이 그들의 눈을 가리웠을 것입니다. 눈 앞에 벌어진 참혹한 십자가 죽음을 보았던 그들은 이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입니다.

함께 동행하시던 주님이 ‘너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고 하였느냐?’라는 질문에 두 제자들은 머물로 서서 몇일 동안 예루살렘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동안 우리가 메시아라고 믿고 추종했던 예수님이 비참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그 분이 다시 살으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들었고, 그래서 베드로가 달려가보니 무덤은 비어 있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우리는 매우 당혹스럽고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의 불신앙을 보신 주님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에 대해 예언된 말씀을 풀어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건에서 성취되었는지를 성경을 풀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강론에 그들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주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식사기도를 부탁받은 주님이 빵을 들어 축복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즉각 그들의 시야에서 주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글로바와 아내 마리아는 서로 말하기를, “주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하고서,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또  다른 이들이 함께 한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모임 중에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34절)는 말을 듣고서, 글로바와 그의 아내는 그들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길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그 분께서 자기 집에서 빵을 떼실 때에 자기들이 그 분을 알게 된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주님이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주님이신 줄을 알아 보게 되었다는 것과 주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 졌다는 대목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의 전통에 ‘은혜의 방편(方便)’이란 신학적 용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라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그 은혜를 담아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도구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가, 일반적으로 세 가지 방식으로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입니다. 이른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을 영의 양식을 먹이십니다. 길고 긴, 그리고 아주 고단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양식이 공급된다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그 일용할 양식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우리의 태도나 행동에 상관없이 변함없이 매 주일마다 생명의 양식을 공급해 주십니다.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영의 양식을 공급하여 주신다면, 이것이 은혜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으로 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눅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성경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세상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할 하나님의 어린양,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실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영광스러운 메시아이지만 동시에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이전에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당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마치 곁에서 목격한 것처럼 아주 생생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기록하면서 어떻게 구약성경에 미리 예언되었는지를 일일히 인용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서 기자들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사실을 인용하여 확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작정된 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래서 우리 구원의 방편으로써 필수적으로 꼭 이루어져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감성적으로 십자가를 접근하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닫게 되고, 그런 죄의 심연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거쳐서 영광의 부활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우리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는 믿음의 싸움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고, 결국 영광의 그 날을 보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됩니다.

두 제자들이 주님으로 부터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처럼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로 인해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은 세례 예식입니다. 세례 예식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와 선물을 뜻하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세례식입니다. 특히 유아세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자기 머리위에 뿌려지는 물방물이 무엇인지, 이 예식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에게 목사는 세례를 베풀며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입양된 것을 확증하고, 이를 선포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은혜의 선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세례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세 번째 방편은 성만찬입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는 성찬 예식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받는 은혜가 크지만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성찬식은 우리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예식입니다. 떡과 포도주를 보고, 냄새를 맡고, 맛보고,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각자의 전통에 따라 성만찬을 서너 가지 다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장로교회에서는 ‘주의 만찬’(Lord's Supper)으로, 성공회에서는 ‘유카리스트’(Eucharist)로, 로마가톨릭에서는 ‘미사’(Mass)라고 부릅니다. 이것들을 묶어서 공통적으로 부른다면, Holy Communion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인 뜻은 “거룩한 교제와 교통”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 ‘거룩한 연대감’이 형성되는 예식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깊고 거룩한 연대가 이루어지게 되는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자녀들 사이의 모든 차별과 구별을 뛰어넘어 서로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는 신비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30절과 31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오늘 성만찬을 거행하며 주님의 살과 피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영안이 열려서 주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 몸 속에 들어가 하나가 되는 것처럼 우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과의 신비로운 연합과 교제가 이루어져서 그 분을 더욱 충만히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떡을 뗄 때 비로소 주님을 인식하였지만 이미 주님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신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그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축복 기도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어떤 절망이나 근심거리에 싸여 있든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든지, 어떤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부활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우리의 신령한 눈이 열려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또 주님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축원합니다.



  • 주일예배
    1부 - 오전 8시
    2부 - 오전 11시
  • English Ministry
    11 am
  • 수요예배
    오후 7시
 
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교회전화: 831-384-48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