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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rmons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사명감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고난의 종 (04.02.2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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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조회 565회 작성일 Apr 23 2023

본문


*날짜: 2023년 4월 2일
*제목: 고난의 종
*본문: 이사야 53: 1-9
*설교자: 이강웅 목사


코비드 팬데믹이 있기 전 교회에서 성지순례를 갔을 때 예루살렘 ‘비아 돌로로사’를 걷게 되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란 문자 그대로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지시던 날 프래토리엄(Praetorium)이라고도 불리는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부터 십자가형을 당하시던 곳 골고다 언덕까지 걸으셨던 예루살렘의 전통적인 길입니다(마 27:2-26). 본디오 빌라도의 판결 이후 로마 군사들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하고, 침까지 뱉었습니다(마 27:26-31). 그리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까지 가야 했습니다(마 27:32-50). 이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오늘날까지도 정확히 확인된 바 없습니다. 다만 그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예수님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저 개인적으로 기대를 많이 하였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직접 걸어간다는 사실 자체 만으로도 감동이 되었고, 그래서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은혜가 배가 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대만큼 그리 내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이 없었습니다. 아마 내 자신이 마음 준비를 잘하지 못해서, 또 기도가 부족해서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은연 중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슬픔의 길’이 별로 은혜 받을 만한 환경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넘치고, 길 양쪽에는 장사치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와중에 우리는 충분히 묵상할 시간 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여행 가이드의 설명 듣기 바빴고, 사진 찍고 이동하고, 사진 찍고 또 이동하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깨달아지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아,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걸어 가셨을 때도 지금처럼 그랬겠구나! 그저 호기심으로 구경하러 나온 구경꾼들이 뒤따랐을 것이고, 장사치들은 지금처럼 그들을 향해 물건 팔기에 바빴을 것이고,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관심이 없었겠지요.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앞두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별다른 생각 없이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에서는 아주 중요한 절기이지만 별로 우리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부활 또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충격에 빠졌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한사코 받아드리기를 거절했습니다. 맨 처음에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그의 부활을 전해 주어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즉각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노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제자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어요. 심지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경배하는 자리에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7)고 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미련하고…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하며 책망하셨습니다(마 16:14). 참 기이할 정도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거부했을까요? 가장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믿으려 하지 않았어요.

물론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우리의 경험이나 의학적 상식으로는 받아드리기 어려워요.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미 예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신 일을 목격한 사람들이에요. 금방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어요. 죽어서 상여에 실려 나가는 나인성 과부 아들을 살리셨어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어요. 이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정했습니다.(마 14:33,16:16)

더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적어도 세 차례 걸쳐 “내가 죽은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그의 부활을 누구 보다 더 열광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드리기를 완강히  거부하였습니다. 주님이 책망하실 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도대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드리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시는데 왜 그토록 십자가 처형으로 참혹히 죽으셔야만 했는지 제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의 전제는 먼저 죽음입니다.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어요. 죽음을 전제되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메시야라고 믿고 따랐던 주님이 왜 죽으셔야 했는지 도무지 이해 되지 않아요. 죽으면 메시아의 사역도 다 끝장이 나는데...진실은 예수님이 피 흘려 죽으셔야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데…그들은 메시아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기적과 이적을 베풀어서 로마 군대를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강하고 부하고 공의로운 메시아 왕국을 세우셔야한다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한 자리하게 될 것이라는 높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서도 ‘서로 누가 큰 자냐’고 다투기까지 했어요.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제자들도 메시아는 이래야 된다는 메시아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어요. 이 프로그램 속에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는다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생각에 꽉 붙잡혀 있으니까 예수님이 ‘이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 받고 죽는다. 그리고 3 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예고하셔도 충격을 받아 그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고, 오히려 묻는 것조차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그 길을 가로막기까지 했습니다. “주여, 그러시면 안됩니다” “메시아이신 주님이 왜 고난 당하셔야 합니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내가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력하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거든요. 제자들은 참혹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을 보았어요.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을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 다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패배입니다. 이제 절망입니다. ‘결국 예수님도 여느 사람과 별다른 게 없구나. 그래서 힘없이 당하셨구나!’이렇게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활에 대한 무슨 기대감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결코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미 이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예언 되어진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힘 없어 무력하게 당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고하신 대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충격에 빠지고,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타나서 깨우쳐 주십니다. 엠마오를 향하던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24:25-27)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래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제자들 모두 앞에 다시 나타나셔서 (눅 24:44-48)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여기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이란 모세오경과 선지서를 의미하는데 구약성경을 이렇게 둘로 표현하기도 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으로 세 묶음으로 구약성경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미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예언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의 당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살았던 선지자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마치 바로 옆에서 지켜 본 것처럼 아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예수님의 고난에는 천사들도 놀랄만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 살펴보며 우리 모두 은혜 받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영광스러운 환경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억압받는 식민지 나라, 팔레스타인 땅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서 충분히 먹지도 못하고 꾸미지도 못하고 자라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쪽 변방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성장하셨고, 장성해서는 목수로 아주 거친 일을 하셨기 때문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제자 중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동남 아시아 여자들이 한국제품 화장품을 최고로 여긴다고 합니다. 피부를 하얗게 해 준다고 여겨 더 좋아합니다. 인도에서는 하얀 피부가 마치 신분과 배경을 표현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피부를 하얗게 하는 일에 아주 진심입니다. 사실 피부가 아니라도 좋은 집안 배경에서 태어나 풍요롭게 자란 사람 보면 왠지 귀티가 나 보입니다. 키도 크고 멋있고 피부도 뽀얗고 금방 눈에 띱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메마른 땅에서 겨우 비집고 나온 약하디 약한 순 같아서 전혀 매력이 없어 보였습니다. 2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고린도후서 8: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스스로 가난을 택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섬김과 대접을 받으며 영광스럽게 화려하게 사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이 땅에 헐벗고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섬기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죄 때문에 고통 받고, 병들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고, 보잘 것 없는 자가 되셨습니다.

빌립보서 2:6,7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비우시고, 인간의 모습,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우리같이 천박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을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2.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난 가운데 죽으셨습니다.
3절에서 예수님은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것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애써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나 흉악범를 보면 얼굴을 가리우고 얼른 피했습니다. 예수님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나병환자나 흉악범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질병과 고통을 짊어지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죄로 인한 수치를 대신 뒤집어 쓰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고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적 고난이요, 대속적 형벌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제물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람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허물과 죄를 범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은 죄, 물질을 사랑하고, 온갖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죄,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자기 자랑, 부모거역, 우매, 배악, 무정 무자비 등등입니다. 병원에 가보면 온갖 질병이 다 있듯이 죄에도 온갖 죄가 다 있습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나 죄 가운데 살면서 죄에 오염되고, 죄에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3: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로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이런 허물과 죄악 때문에 우리는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채찍에 맞고, 상하고, 찔려 죽는 형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여기서 ‘상한다’는 것은 무슨 작은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어성경에 ‘crushed’로써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으깨지는 것’을 말합니다. 맷돌 사이에 집어넣고 갈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손가락 하나만 문틈에 끼어도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52:14,15절에 ‘사람들이 그의 상함에 놀라고, 왕들은 그로 말미암아 입을 봉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몸이 으깨지고, 터지고, 온몸이 피범벅이 될 때에 너무너무 놀래서 왕들도 감히 할 말을 잃고 입을 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형벌은 너무너무 무섭고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웠습니다. 면류관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날카로운 가시로 머리를 찔러 고정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피로 물드셨습니다. 뼛조각이나 병조각, 납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내리쳐서 온 몸을 상하고 터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등이 너덜너덜하다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등뼈가 다 드러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손과 양발에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높이 세워서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물과 피를 다 쏟아지게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며 죽어갈 때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온갖 저주과 욕설을 내뱉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기를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처럼 말없이 침묵하셨을까요?

6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뒤집어쓰고 담당하고자 하셨기 때문에 잠잠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입니까? 말없이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무슨 문제가 있어도 그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다 담당합니다. 무슨 병이 있어도, 무슨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병을 치료하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도, 어떤 수고와 고통이 따라도 다 담당을 합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말없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며 귀하게 여기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나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나의 질고를 지고 나의 슬픔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내 대신 창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를 위한 십자가로 믿고 영접할 때에 우리에게 죄 사함의 은총이 임합니다. 평안이 밀려 옵니다. 우리 내면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5절)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은 시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금 나를 위한 십자가로 믿고 영접하면, 바로 지금 내 안에 죄 사함의 은총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감격을 체험하게 됩니다.

3.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존귀하게 되셨습니다.
12a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52:13절에도 보면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죄를 담당하며 대속적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지극히 높여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저주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요 축복입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역설적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문제에 얽히지 않고, 별 고생 없이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존귀함이 없습니다. 부활의 영광이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새 생명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죽어가던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내면에 참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받았으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죄짐에 눌려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자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의 짐을 같이 져주며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그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희생과 헌신의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있습니다. 인생이 존귀케 되는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풍성하고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세상의 이면에는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사실 온 세상에 죽음의 증상으로 가득 넘치고 있습니다. 과학문명이 발달해서 좋은 줄 알았는데 대기오염, 물 오염, 오존층 파괴가 심해지고, 기후가 매우 불안정해졌습니다. 영적 도덕적 타락은 갈 수록 심해집니다. 사랑은 식어가고 난폭해져 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총기 살육이 일어나고, 전쟁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갈등은 심화 되고, 인종차별로 인한 다툼은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들은 이 세상이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는 증상들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머리가 아프고, 목이 따갑고, 콧물이 나고, 기침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질병, 악, 미움과 증오, 악한 사회 제도과 관습으로 부터 부정과 불의, 가난과 굶주림, 악한 권력으로부터 압제, 전쟁과 미움과 증오, 이런 모든 비참함은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여전히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증상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성경대로 우리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왕 노릇 할 수 없어요. 우리는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죽음의 권세가 깨졌어요. 그래서 사망이 무서워 벌벌 떨며 종노릇하고 있었던 우리가 해방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 아래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고난주간에 십자가 복음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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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레이 한인제일장로교회   285B Carmel Ave, Marina, CA 93933
© Korean First Presbyterian Church of Monte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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